더 큰 사랑으로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4 views
Notes
Transcript

나를 내어놓는것은 주님을 사랑할 때 가능하다.

오늘 본문에는 세명에 등장인물이 등장합니다. 먼저는 예수님이시고 한 사람은 바리새인 시몬, 그리고 한 사람은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등장하는 여인 입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이 두 사람은 아주 극단적인 대조에 놓여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은 당시 아주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죄를 짓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스스로를 율법을 지키며 사는 의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죄인들은 정죄하고 만나려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사회적 지위도 있고 체면도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 부랑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다면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아마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을 부르거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지적 수준을 갖췄거나, 명성이 있는 사람을 초대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여기서는 아마 그런 입장일 것입니다. 지위가 높지는 않았지만 지적 수준을 갖추었고 명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당시 바리새인이 사람을 초대하는 것을 컴포지움의 형식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분명 저녁 식사자리에 초대 했지만 식사 이후 자신의 사상을 나누고 토론하고 심지어 논쟁으로 까지 이어지는 형태였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초대한 주인도 이 논쟁에서 질 수 있고 또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오늘 이런 자리에 지위 높은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오신 것입니다. 자신의 유대적 지식을 비교해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죠.
아마 이미 예수님과는 관계가 있었기에 이런 초대도 가능했을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지금까지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에 대한 소개를 보면 그 동네에 죄를 지은 여자라고 표현합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이 여자가 죄인임을 다 알고 있을 정도라면 아마 작은 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짓는 알게 모르게 짓는 죄의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는 정도의 죄, 누구나 비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말한것처럼 바리새인은 의로운것을 추구하며 의롭게 보여지는 사람이고 절대 죄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근데 그 집에 초대받지도 않은 누구에게나 드러난 죄인이 찾아옵니다.
이 죄인도 바리새인과 같은 이유로 이 장소에 나옵니다 . 바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입니다. 아마 이 여인도 예수님과 이미 알고 있던 관계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 집에서 식사하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아주 이상한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죄인인 여인은 손에 옥합을 하나 들고 옵니다.
옥합이라는 것은 고대에서 아주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흰색으로 된 점토를 가공하여서 그 안에는 귀한 내용물을 담기 위한 도자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취급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부자가 아니면 다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여자가 죄인이면서 이렇게 부요할 수 있다는 것은 부정적인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었을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비싼 물건을 가지고 예수님과 바리새인이 있는 곳으로 온 여인은 당당하지가 못합니다. 죄를 지어서 그런것인지, 아니면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어서 그런것인지 이 여인은 예수와 바리새인의 앞에 서지 못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 뒤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보면 그분의 앞에 설수도 없을만큼의 죄인이라는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행동은 더욱 놀랍습니다.
그 여인은 계속하여 눈물을 흘리는 중인데 그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이용해 예수님의 발을 말려드립니다. 그리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초대 받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보통 좋아 하는 사람과 식사를 합니다. 약속을 잡고 초대를 하는 것은 내가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열려있습니다. 특별히 요즘은 더욱 자신의 집이나 개인적인 것을 개방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에 나와 기호가 맞거나 알고 지내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을 우리 집에 들이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볼때 바리새인도 예수님에게 베푼 호의는 상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계층에 사람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특별히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까지 부르며 존경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 그의 입장에서는 이정도면 아주 훌륭한 대접이라고 생각 할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보기에도 이 정도면 그 사람을 배려하고 잘 대접하는 일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도 결코 무례하거나 잘못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이 여인의 무례하고 계획되지 않은 행동이 불쾌할 수 있고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이 죄많은 여인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거야?! 하면서 정죄할 수 있었겠지요.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하는 자리에 불쑥 찾아와서 이런 무례를 범하고 있다니!!
굉장히 화가 났을수도 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갑자기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데
빚진자 두 사람을 비유로 들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한 사람은 50 데나리온, 한 사람은 5백 데나리온을 빚졌는데 두 사람 모두 갚을 길이 없어서 빌려준이가 그 빚을 둘다 탕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럼 둘 중에 누가 더 돈 빌려준 사람을 사랑하겠니? 예수님의 이 질문은 굉장히 이성적입니다. 합리적으로 볼 때 이해가 됩니다. 당연히 더 많은 빚을 진 사람이 더 큰 사랑을 느끼고 다시 그것을 갚으려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이 비 정상적으로 보이는 상황을 비유를 통해 이해하도록 해주십니다. 그 여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이런 내막이 숨어져 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 시몬도 예수님께 배우고 스스로 느낀바가 있고 자신에게 찔림이 있으니 더 배우려 했고 예수님을 초대하였겟지요. 그리고 그분에 대한 예를 갖추려 했겠지요. 그러나 그가 했던 것은 아주 형식적인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발 씻을 물도 내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머리에 바를 기름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마음대로 준비하고 자신이 생각한 정도로 준비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신분이 로마 시민이거나 아주 유력한 가문의 신분으로 오셨다면 이렇게 했을까요?
그러나 여인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본질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지식적인 깨달음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다 른 모든 사람이 자신을 손가락질하고 자신도 벗어날 수 없는 죄 가운데 신음하고 있을 때 찾아오시고 위로하시고 죄를 사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영적인 구원을 주시고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을 만난 것입니다.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그녀는 느꼈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고 호의를 가졌고 자신의 것으로 대접했지만 이런 차이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더 용서 받았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죄인인 여인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것이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 체면을 구길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밑보일 수 있는 일이지만 부끄러움 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발을 닦고 그분을 높여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큰 사랑을 받았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넘어선 이성을 넘어선 전인적 변화를 일으키는 그분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죄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사랑을 가감없이 전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