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삶

매일성경(에베소서)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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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에베소서의 성경적인 교회론에 매료되어서 사역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우주적이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과 같이 일체화 되어가는 놀라운 신비, 즉 시대를 가로지르며, 온 세계를 포괄하여 만들어지는 이 놀라운 신비에 전율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어찌보면, 바울이 그린 큰 그림에 깊이 사로잡혀 사역을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보니 바울이 정말 던지고 싶은 메시지들은 보다 미시적인 부분이라는 것이 보여집니다. 에베소 성도들의 삶을 실제적으로 터치하는 교훈과 적용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율법 계명과 다른 것은 바울이 끊임없이 우리 주 그리스도와 함께 연결하여 하나님의 계획, 작성하심에서 출발한 큰 경륜 속에서 던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단편적인 조항이 아니라, 풍부한 맥락 속에서 살아있는 정신과 같이 복음과 그리고 계명과 같은 교훈이 던져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오늘 본문이 시사하는 바는 큽니다. 세상과 거룩함에 반반씩 걸치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당시 에베소 성도들과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섬광과 같이 던지는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에도 그리스 신화와 철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매료되었던 시대였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화려함이 사람들의 이목과 마음을 사로잡는 시기입니까. 저 또한 교회에서 방송 사역을 담당하면서, 교회가 손쉽게 포기할 수 없는 사역이지만, 동시에 얼마나 헛된 것인지 실감하고 있습니다. 교회나 성도님들의 간단한 요구가 방송 사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백조가 호수를 헤엄치듯이 수면 위에서는 고요하게 흘러가지만, 호수 속에서는 쉴 틈 없이 발이 움직이고 저어가듯이 수 많은 수고와 고민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역들보다 쉽게 지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왜 더 세련될 수 없는지, 왜 더 편리한 기능을 사용할 수 없는지 물어봅니다. 다 하면 좋지만, 얼마나 우리가 단순히 이목을 끄는 것에만 초점되어 있는지 한 단면을 보여주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우수한 교회, 명망있는 교회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신앙이라기 보다는 종교적인 사람들이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던진 말이 심도 있는 말인지, 충분히 연구된 말인지 검토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목적으로 던지는 말인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한 사람을 온전히 평가하실 수 있지만, 저는 의외로 가까운 사람들의 평가가 하나님의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신앙이지, 종교는 아닙니다. 종교는 겉과 이면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사람 전체를 걸고 가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은 구원의 길이냐 심판의 길이냐로 갈리는 것입니다. 체에 거르듯이 알곡과 가라지가 걸러지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오늘 바울은 본문에 조금 앞선 부분이지만, 6절과 같이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교회라는 것은 서로의 삶이 얽히고 섥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입체적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지역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로를 향해 젠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사람을 겉으로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상당 시간이 흘러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구나를 깨달을 수 있는 거지요. 그러나 속는 것은 한편으로는 나 또한 동일한 범주 속에 있는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외면에 이끌리는 사람들은 그 사람 속에서도 외면에 치중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속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경험적으로 깨닫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방송 사역이 중요할 수 있지만, 정확한 목표점 없이는 덧없는 것임을 느껴가는 저처럼요. 겉에 아무리 포장하고 발라도, 알맹가 없으면 의미가 없구나를 경험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안은 선명하고 분명한 기준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은 그냥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세워진 기준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전쟁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기준점이 분명하게 세워진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심사숙고하며, 깊이 묵상하고, 분명히 걸어가야할 진리라고 정의되면 그것은 마치 항해사들이 쫓아가는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우리를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낮은 기준으로 자신을 낮춰가게 됩니다. 편한 곳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편해지고, 더욱 부지런해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지표로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이전의 나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모습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속지 않기 위해서는 바른 기준점을 가지고 있어야하고, 그 기준점을 통해서 나와 다른 사람을 비춰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5장 1-2절과 같이 기준점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사랑이 기준이고, 변화됨이 시금석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삶이 있는가 입니다. 정체되어 있고, 도무지 변하려는 모습이 없다면, 또는 과거의 영광 속에 살고 있다면, 참된 빛 가운데 살아가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과거에 주님의 은혜와 충만히 동행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 삶 속에서 주님과 동행함이 없다면 지금의 비참함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자녀는 늘 현재 속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늘 오늘 가운데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들입니다. 그런점에서 본문에서는 9절과 같이 빛의 열매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던져주고 있는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의아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열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것 안에서 열매가 맺힌다고 말합니다. 모든 착함과 모든 의로움과 모든 진실함 안에서 열매가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께서 가지고 사셨던 가치들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탐욕이 없었습니다. 오직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신 선함만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길은 또한 의로운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서 의로우신 길이었고, 사람들에게도 의로운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진실된 길이었고, 진리의 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따라 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길이요 빛이요, 참된 인생의 부모요 스승의 길이었습니다. 그 분이 걸어가신 길은 끊임없이 사랑이 필요한 자들에게 다가가서 실제적인 사랑과 더불어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을, 거룩함을 나누셨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그 삶은 제자들을 통해서, 또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참된 길로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모든 선함과 모든 의로움과 모든 진리가 낳은 열매가 교회입니다. 단기간 속에서는 열매가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강과 같이 흐르는 생명력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점에서 분명한 기준점이자 목표점이 되어서 살아가는 가운데, 내 삶에서도 주님이 보이셨던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비춰보아야할 것입니다. 내가 행하고 있는 사역과 말, 내가 남기는 모든 것들이 주님께서 기억하실 만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내려놓을 필요도 있습니다. 다시 나의 삶을 교정하고,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들에 해당되는 것들이 도전이 되고, 가르침이 될 부분은 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탐욕은 그렇지 않습니다. 탐욕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인생 끝까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내 중심으로 끌어 내리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마음 속에 있는 탐욕들을 늘 경계하고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 앞에서 떳떳할 수 있다면, 그 탐욕들이 내게 작용해서 행한 일이 아니라면, 참된 교회를 위해서, 장기적인 미래를 위해서 행한 일들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칭찬하실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단순히 칭찬받는 일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서 기도하며 주님과 깊은 사귐의 기도를 하시면서 죄된 모습을 깍아내고, 다듬어 내시는 시간이 되길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개인과 가정의 문제, 그리고 교회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들 모두 때로는 작은 출발에서 또 주님과 깊은 기도 속에서 내가 깍여지고 다듬어질 때, 실타래가 풀리고, 해결점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어제 어린이부에서 아이들과 룻기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사사기와 비교되는 룻기는 아주 평범한 소시민들의 삶을 조망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룻과 나오미와 보아스가 서로의 삶을 채워주는 아름다운 결말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따라가는 그 자리에 채움과 하나님의 평안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얻는 힌트는 그것입니다. 10절에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험하라는 것은 시도하고 테스트하라는게 아닙니다. 영어만 봐도,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기준을 분명히 세우고 삶 속에서 정립해나가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신중하게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유혹과 시련 속에서도 꺽이지 않을 주님의 신념을 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우리가 기도할 것은 주님 말씀에 비춰서, 또 주께서 보이신 삶의 모범을 통해서 나의 삶을 깍아내고, 다듬는 시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들은 우리의 정신을 집중하고 모아서 나아가야하는 작업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어떻게 바라보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역자로서 외줄타기를 하는듯한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이 길을 걷고 있구나, 그리고 목숨을 걸고 사역을 해야겠다라는 각오로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저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신앙하는 사람들의 모두가 가져야할 각오입니다. 그렇기에 14절과 같이 바울은 이렇게 마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아멘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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