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14)

느헤미야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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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성경 : 느9:27-38
저는 그리스도인들의 오해 가운데 하나가 ‘회개’를 이해할 때, 눈물을 한 번 흘리는 것으로 모든 것을 퉁친다는 것이다. 눈물을 한 번 흘리면 그것이 회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눈물 이후에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동일하게 죄를 범할 뿐만 아니라 죄와 싸우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다. 루터시대에 면제부처럼 이 시대 면제부는 눈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회개의 모델로 삼는 사도바울의 회심을 보아도, 누가는 그의 회심을 눈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달라진 그의 삶을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내 죄를 자백할 때, 한 번도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회개의 진실성 앞에 질문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을 청했고 그 율법을 해석해주었을 때 통곡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들에 눈물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9장에서도 나타나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찬양해도, 기도해도 그렇게 눈물이 났다. 그렇게 거의 1년을 울었다. 월요일에는 교회 중보기도 모임에서 울었고, 화요일에는 북한 선교회 가서 울었고, 수요예배, 목요일에는 찬미 집회에 가서 찬양하며 울고, 매일을 그렇게 눈물을 주셨다. 그리고 마음이 단단(좋은 의미로)해지면서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셨다. 신학을 결정하고 삶의 여러 정황을 정리했던 기억이 있다.
느헤미야 8장은 유명하다. 부흥을 좋아하는 한국교회에서 많이 설교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8장에 비해서 9장은 알려지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굉장히 억울할 것이다. 어쩌면 8장보다 9장을 더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9장은 쉽게 표현해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고백하는 내용이다. 이런 고백은 연대기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해석하는 것이었다. 이런 형태는 몇 주 전에 주일 설교에서 들었던 스데반의 설교와 같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족장시대, 출애굽-가나안시대, 다윗-솔로몬시대, 예수 그리스도 시대
하나님의 창조, 아브라함, 모세, 가나안 입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창조 이후에 언약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아브라함의 언약, 모세언약, 다윗의 언약의 관점이다. 그러니까 언약에 관한 신앙고백적 관점으로 역사를 기술한 것이다. 이것이 느헤미야 9장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모여
1절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모였다. 그리고 굵은 베 옷을 입고 띠끌을 쓰며 금식하고 있다. 사실 7월 24일은 초막절이 끝난 다음 날이다. 원래 초막절이 끝나면 이스라엘에는 절기가 없다. 그렇지만 금식일은 있었다. 속죄일이 아니더라도 바벨론 멸망 이후로 이스라엘은 5월, 7월, 10월에 금식일을 정하고, 스스로를 괴롭게 했다. 7월은 유다 총독이었던 그달리야가 암살되던 것을 놓고 회개하며 금식하던 금식일이다. 이스라엘이 이 금식일을 위해 모였는지를 모르겠다. 열왕기도 스가랴도 7월만 언급할뿐 날짜를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이 7월의 금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스라엘은 회개와 은혜를 구하며 금식으로 모였다.
이들은 에스라를 통해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을 거역하여 바벨론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 이들이 하는 회개가 어떤 포퍼먼스나 종교적 행위가 아닌 이유는 2-5절에 나온다. 그 회개가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① 2절에는 우리 성경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지만 ‘씨’라는 제라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자신들과 구분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족에서 떠나게 했다. 이것을 이분법적으로 잘못 읽으면 유대 혈통을 지키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다 보내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원래 이스라엘은 단일 민족이기는 하지만, 이방인이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방인이더라도 이스라엘 공동체 일원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도 이스라엘 민족만 출애굽한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12장을 천천히 읽어 보시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기생 라합이나 믿음의 여인 도 그러했다. 이스라엘이 제라를 강조한 의미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원래 이방인이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자들을 추방했다는 말이다. 이 내용은 13장에서 다시 나온다.
이런 말씀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믿지 않는 가족을 버리는 것이 믿음의 행위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영혼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 가족도 사랑하지 못하고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처럼 내 믿음을 흔들리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게 만드는 만남이 있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떠나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죄조상들의 죄를 회개한다. 이 내용은 우리가 목사님과 함께 봉독했던 33-37절 말씀에 자가의 죄가 나오고 16-30절에는 조상들의 잘못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들은 정말 진심으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② 3절을 보면 부흥회와 일어났다. ‘낮 사분의 일’은 거의 3시간을 말한다. 그러니까 3시간 말씀을 듣고 3시간을 회개하며 엎드렸다. 우리 성경은 경배로 번역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경배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는 예배로 다가오지만, 원문에는 ‘엎드리다’로 나와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말씀 앞에 회개하였다는 것이다.
예전에 제가 학생회 때, 보통 담당하시는 전도사님이 수련회를 인도하셨는데 그때는 담임 목사님이 직접 하시겠다고 나서셨다. 설교를 정말 3시간씩 하는 것이다. ‘나무 젓가락은 나무로 만들어졌다’라고 하시면 되는데, ‘저~기 브라질 밀림에서 몇미터 둘레가 되는 나무를 도끼로 자르지 못해서 전기톱으로 자른다. 그걸 다듬어서 배로 몇 개월 운반해서 한국에오면 가공한다’이렇게 설교하시니까 3시간이 모자란 것이다. 그때 학생 배성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소시적에 경기도 성산교회 학생회 수련회 설교를 하러 갔는데, 담당 목사님이 설교를 3시간 해달라는 것이다. 제가 목사님을 설득시켜서 2시간만 설교했다. 성경 공부가 아니면 3시간을 설교하는 것은 저는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는 성주 성서교회 연합 수련회 때, 오전 전체를 설교해봤다. 그때는 연합측에서 성경 공부를 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지금 앞에서는 수문앞 광장에서 한나절 말씀을 들었고, 지금은 3시간 말씀을 듣고 3시간 동안 엎드려 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니까 말씀을 계속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 눈물을 포퍼먼스나 행사로 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한 것이다.
③ 4절 레위 사람들도 단 위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다. 여기에 부르짖는다는 말은 곤핍하고 가난할 때 구하는 기도였다. 지난 수요일 말씀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수치가 보이고, 그 수치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게 된다. 그리고 5절에서는 다른 레위인들이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제의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바로 이런 모습이 나타날 때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정한 시간이 임재하시면 주의 모든 백성들은 죄를 자복하고, 주의 말씀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한다. 이것이 부흥이다. 우리는 이런 부흥을 사모하고 기도해야 한다.
지난날 마이크 시절도 초라했지만, 설교자가 지금처럼 세련되지 못하고 원고를 그냥 읽어나가는 설교였지만 모두가 그 말씀 앞에 마음을 찢으며 때굴때굴 구르며 죄를 회개했던 그 부흥의 때를 하나님께서 저의 시대에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대구에 있는 러브 호텔들이 다 문을 닫고, 사기 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힘 있는 사람들이 약자를 돌아보는 세대를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다.
더 큰바램이 있다면, 그 부흥의 때에 저도 숟가락을 얹을 정도라도 쓰임 받았으면 좋겠다. ‘아버지 이 세대에 부흥을 허락하옵소서~’
2. 오직 주는 여호와이시라
6절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우리 성경은 “오직 주는 여호와이시라”고 정리해서 번역했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독립인칭대명사가 나오면서 ‘당신’이 여호와시라고 강조되어 나온다. 히브리성경을 직역하면 “당신만이 여호와시라”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여호와가 어떤분이신가하면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으로 나온다. 그런데 언약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엘로힘’이 아니라 먼저 ‘여호와’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7절에는 엘리힘이 나온다.
6절은 ‘천지창조’
7-8절에는 ‘아브라함’
9절부터는 ‘모세’
22절부터는 ‘가나안 입성’이 나온다.
6절은 창세기 이야기다.
그리고 7-8절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중심으로 창세기 이야기다.
9-12절은 출애굽 사건이 나온다. 이것은 출애굽기 이야기다.
13-14절은 시내산 율법과 계명으로 출애굽기 이야기다.
15절은 광야에서 양식과 물을 주시고 맹세하는 내용이다. 민수기와 신명기 내용이다.
두 번째 단락인 16-19절은 민수기와 출애굽기 내용이 썩여있다.
20-24절에 나오는 단어들은 신명기에 나오는 단어들이다.
25-31절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일어난 말씀이다.
느헤미야는 우리처럼 레위기를 어려워했나 보다. 에스라와는 다르게 느헤미야는 몸의 약점과 평신도 관원이었기 때문에 레위인들을 품으면서도 레위기에 대한 내용은 잘 언급하지 않는다. 또 한 번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맡겨진 소명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은보 가족 여러분, 우리는 이 내용을 보면 우리가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알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라는 질문 앞에 서야 한다. 바로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모든 만물 앞에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이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떠나는 신앙을 소유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떠날 준비를 하게 된다. 이 땅은 내 집이 아니며 정거장과 같은 곳임을 알게 된다. 이 땅에서 우리가 놓지 못하고 우리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들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사모하며 살게 된다.
우리가 우상을 만들고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언약을 깨뜨렸고 바벨론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잘못을 깨닫고, 가장 귀중한 것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작은 떠나는 것이었다. 그는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났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떠나는 것이었다. 모세도 이스라엘을 이끄는 리더로서 왕궁에서 살았던 40년이 아니라 미디안 광야로 떠나간 이후로 준비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떠남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그곳에서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했다. 그들이 이 땅이 전부인 줄 알면 하나님은 그들을 대적의 손에 붙이셨다. 그리고 그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면 긍휼을 베푸셨다.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가야 할 자들이다. 우리 눈을 하늘을 향하여 들지 않으면 죄를 사모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늘 떠나는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멈춰 세우시면 우리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나님이신가. 사람인가. 하나님이신가. 세상인가. 지금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속적인 우리 인생을 포기하지 못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 땅의 것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찾으며 시작되고 있다.
남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내게 주신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도 우리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 중심을 비춰 주시고, 내 삶이 어떤 부분에서 대적의 손에 넘어가 있는가를 깨닫는 은혜를 사모한다. 그래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부르짖을 때,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구원하시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소원한다.
결론
우리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자꾸만 하나님을 땅으로 우리 시선으로 끌어 내리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 신으로 만들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우상으로 만들면 안된다.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는 신으로 만들면 그것이 하나님을 이세상 신으로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우상처럼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우리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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