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사무엘하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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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 /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누리며, 흘려보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자.

제가 최근에 가장 감동적으로 본 드라마가 ‘나의 아저씨’ 입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 대기업에 다니는 팀장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직원들 서류 카피같은 잔심부름하는 어린 용역직 여직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친구에게는 직원들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여직원의 삶을 더 들여다보면 참 비참합니다.
부모님 두분 모두 안 계신데다가 말 못하고 거동도 제대로 못하시는 할머니 한 분 모시고 살아가는 힘겨운 인생입니다.
심지어 빚쟁이가 되어 나쁜 놈한테 쫓기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그 팀장이 이 여직원을 주목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세상과 단절하고 싶어 매번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니던 그녀의 삶에 키다리 아저씨 같은 분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녀가 그 아저씨를 오해합니다.
자신과 같이 아무 것도 되돌려줄게 없는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는 그 분이 너무 이상했던 것이죠.
심지어 그녀를 도와주려다가 그 팀장은 사람들에게 오해까지 받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도와주려 합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긍휼이라고 표현하기도 뭐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성경에서도 본 적이 있습니다.
바로 보아스와 룻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지만 그녀를 마음을 다해 도와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 헤세드는 정확하게 번역하기 힘든 단어입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번역이 존재합니다.
사랑, 자비, 긍휼, 배려 등등…
그러나 제가 보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자격이 없는데도 베풀어주는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이런 헤세드를 보여주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첫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찾으시는 사랑입니다.
1절입니다.
하루는 다윗이 물었다. “사울의 집안에 살아 남은 사람이 있느냐? 요나단을 보아서라도 남아있는 자손이 있으면, 잘 보살펴 주고 싶구나.
앞서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자신의 화려한 왕궁도 지었으며, 바로 앞에 나온 8장을 보면 여러나라와의 정복 전쟁에서도 승리했습니다.
또한 그는 나라 안 백성들을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잘 통치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라 안 밖으로 모든 것이 잘되고 평안한 시기가 온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다윗이 사울 집안에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 지 신하들에게 묻습니다.
왜냐하면 어릴 적 요나단과 했던 약속이 불현듯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 했을 때 미리 그 위험을 알려준 사람이 바로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자신이 물려받을 왕 자리도 다윗에게 양보하면서 다윗과 약속을 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후손까지 책임져주라고 말이죠.
다윗은 그 약속이 불현듯 생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나단의 후손을 찾기 위해 수소문합니다.
결국 사울집안을 섬기던 종 한 사람을 찾아내는데 그의 이름은 ‘시바’입니다.
‘시바’는 사울집안의 집사와 같은 역할을 했던 종입니다.
다윗왕은 그를 데리고와서 사울 집안에 남은 사람이 있는 지 묻습니다.
이에 시바는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3절입니다.
요나단의 아들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두 다리를 접니다.
시바는 요나단 아들의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 다리를 전다는 말만 합니다.
이것은 다윗왕이 무시해도 될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두 다리를 절면 전쟁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왕으로서 자격 미달입니다.
그러니까 시바는 다윗왕이 견제하지 않아도 될만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왕은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습니다.
두 다리에 장애를 갖고 있다니까 오히려 더 마음이 쓰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시바에게 요나단의 아들이 있는 곳을 묻습니다.
요나단의 아들은 로드발에 있는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은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옵니다.
다윗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그의 말대로 요나단과 했던 약속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크게 성공한 후에도 요나단과 했던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왕으로서 절대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과거 했던 약속은 무시해 버렸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득을 볼 일도, 피해를 볼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럼 다윗이 왜 그 약속을 잊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이 3절에 있습니다.
이게 또다른 이유이자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바로 자신이 받았던 ‘하나님의 은총’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되고, 모든 것이 평안해진 이유는 자기가 잘나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때문임을 압니다.
어떻게 한낱 양을 치던 자, 형제중 막내인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자수성가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아버지 집에 가서 왕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았을 때 다윗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결국 그 집의 막내 다윗을 찾아내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될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 후 오랜 광야생활로 숨어다녀야 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오랜 약속이 결국 이뤄져 왕이 된 것입니다.
다윗 입장에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찾으시는 사랑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중 한 명이 바로 어거스틴 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었기에 막 나갔습니다.
성적으로 방탕한 삶을 즐겼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쾌락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습니다.
무엇이 그를 돌이켰을까요?
그의 뒤에는 그를 위해 항상 기도하시는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영혼을 끝까지 찾았던 것입니다.
그가 그 경험을 기록한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어거스틴의 참회록, 고백록입니다.
바로 이 책입니다.
1600년이 넘었는데도 그의 고백은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회심케 만듭니다.
비단 어거스틴 뿐이겠습니까?
그 수많은 사람중에 왜 하필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찾으시는 사랑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천국의 사냥개’로 표현했습니다.
천국의 사냥개,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고 끝까지 추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찾더라도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갈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빛나는 왕 앞에 감히 죄의 누더기 옷을 입고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부족한 모습으로 왕 앞에 나아갈 때는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두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두려움없는 사랑입니다.
6절입니다.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다윗에게 와서 엎드려 절하였다. 다윗이 “네가 므비보셋이냐?”하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예, 임금님의 종, 므비보셋입니다.”
다윗은 결국 요나단의 자식을 찾아냈고, 그의 이름은 므비보셋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수치를 없애는 자’입니다.
그의 수치가 어떻게 없어졌길래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일까요?
므비보셋이 두 다리를 절게 된 이유는 4장 4절에 등장합니다.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모가 5살 난 므비보셋을 업고 다급히 도망가다가 그를 떨어뜨려서 두 다리를 다치게 된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한꺼번에 죽고, 집안이 망한 것도 서글픈데 두 다리까지 장애를 가지게 된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할아버지 사울의 원수였던 다윗왕 앞에 불려왔으니 그는 보복당할까봐 두려웠을 것입니다.
아버지 요나단과 다윗의 약속을 알 길이 없으니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다윗왕 앞에서 누가 그를 보호해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이전 왕의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여 후환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극에 보면 정권이 바뀔 때 삼족을 멸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므비보셋도 다윗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죽을까봐 너무나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의 대답을 보십시오.
스스로를 임금님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덜덜 떨면서 바짝 엎드린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떨고 있는 그에게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7절입니다.
겁낼 것 없다. 내가 너의 아버지 요나단을 생각해서 네게 은총을 베풀어 주고 싶다.
므비보셋에게 뭔가 사랑받을 만한 점이 있어서 그에게 은총을 베푸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요나단과의 약속 때문에 그에게 은총을 베푸는 것입니다.
아버지 요나단과 다윗의 약속을 안다면 므비보셋은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있어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그 약속의 성취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두려움없이 나아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세번째, 하나님 사랑은 회복시켜주시는 사랑입니다.
9,10절입니다.
사울과 그의 온 집안이 가졌던 모든 것을, 내가 이제 너의 상전의 손자인 므비보셋에게 주었다. 그러니 너는 너의 아들들과 종들과 함께 모두 그 땅을 갈고 거두어서, 너의 상전의 집안이 먹을 양식을 대도록 하여라. 그러나 너의 상전의 손자인 므비보셋은 언제나 나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것이다. 시바에게는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명이 있었다.
다윗은 사울이 가지고 있던 그 많은 땅을 므비보셋에게 주었습니다.
원래 땅을 준다는 것은 반역을 꾀할 수 있기때문에 위험 천만한 일입니다.
사울의 땅이 얼마나 크고 넓겠습니까?
그 땅에서 몰래 무슨 짓을 벌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과감히 모든 사울의 땅을 므비보셋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집안의 종이었던 시바에게 그 땅에서 나는 것을 경작해서 므비보셋을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시바의 열 다섯 아들과, 스무명의 종들도 므비보셋에게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난게 아닙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왕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자격도 부여한 것입니다.
이 말은 왕자로서 인정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죽은 개와 같이 쓸모없는 자라고 고백했는데 이제는 왕자로서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7, 10, 11,13절에서 네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수의 자식에서 왕의 자식으로 완전한 신분 회복이 이뤄진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녀인 우리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죄로 얼룩진 누더기 같은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 당당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식탁에 함께 앉아 교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이 땅에서 실천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식탁에 당시 사람들이 원수처럼 여기던 죄인, 창녀, 세리들을 초대하셔서 함께 먹고 마시셨습니다.
어떤 학자는 다윗이 이렇게 한 이유가 므비보셋을 가까이 두어 매번 감시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왜곡된 눈을 가지면 모든 은혜도 왜곡되게 보일 뿐입니다.
므비보셋은 어차피 두 다리를 절어 전쟁을 나가야 하는 왕으로서의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그를 견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총과 요나단과의 약속 때문에 그의 신분을 회복시켜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므비보셋이 두 다리를 다 절었다는 말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다리를 다 절었다.’
성경에서 여러번 쓰였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멸망한 왕족은 죄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 죽임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마길의 집에 숨어 살았고, 심지어 두 다리를 절어 수치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를 자신의 식탁에 초대해 왕자의 신분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요?
오늘 우리가 진행할 성만찬이 바로 하나님의 식탁으로의 초대입니다.
므비보셋처럼 죄로 인해 두 다리를 저는 자와 같던 우리들이 하나님 식탁에 초대된 것입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찾으시며, 우리를 두려움없이 나아가게 하시며,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누리며 흘려보내며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나의 아저씨’를 보면 마지막 장면에서 악수 한번 하고 헤어집니다.
그러면서 말로는 하지 않지만 그 여직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네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하는 질문이 아닐까요?
나의 아저씨되신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이 아닐까요?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나 첫번째 하신 말씀이 바로 ‘평안하냐’며 묻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누리며, 흘려보내며 살아가는 사람이 소유한 것이 바로 평안, 샬롬입니다.
이런 샬롬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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