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비보셋에게 임한 헤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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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세드는 무엇인가?
1. 헤세드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다윗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질문인가요. 1절에 나옵니다.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다윗은 사울의 집안에 관심을 갖고 질문합니다. 왜 질문할까요? 1절 하반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남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은총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은총입니다.
먼저 은총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총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그러므로 1절의 다윗의 은총은 다윗의 헤세드라 부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헤세드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요? 헤세드의 뜻은 ‘대가 없는 호의’, ‘인자함', ‘언약적 사랑', ‘충성된 사랑' 입니다.
요약하면 헤세드는 ‘대가 없는 언약적 사랑’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대가 없는 언약적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헤세드하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대가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1절에 다윗의 헤세드도 그 의미를 본다면, 다윗의 약속에 기초한 대가 없는 사랑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쓰일 수 있는 표현입니다.
헤세드!! 이것은 세상의 일반적인 사랑과 확연히 구분됩니다. 여러분은 일반적으로 사랑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여러가지가 떠오르시지요? 철학자 플라톤은 사랑을 네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에로스, 성적인 사랑입니다. 둘째 스토르게, 부모와 자식간 혈육의 사랑입니다. 셋째 필리아, 친구와의 우정입니다. 그리고 넷째 아가페, 신과 사람의 사랑입니다.
네 가지 사랑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육체적 사랑을 통해서, 태어나고 <스트로게>에 의해서, 부모와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양육받으며, <필리아>에 의해서, 친구와의 관계, 사회속에서, 다듬어지고, <아가페>에 의해서, 신적 사랑을 통해서, 완성된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종류가 이 안에서 거의 설명이 되어집니다.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관계입니다. 관계에 기반을 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고 받는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식사 교제를 하더라도 내가 밥을 사면 상대방이 디저트를 사는게 자연스럽게 기대되지 않나요? 일반적인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헤세드는 언약적 사랑입니다. 일방적 사랑입니다. 관계가 중심이 아닌 언약이 기준으로 작용하는 사랑입니다. 헤세드의 예를 성경에서 하나 보자면 아브라함과 늙은 종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사명을 띠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떠납니다. 어떤 사명인가요? 이삭의 아내를 구해오는 미션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이삭이 결혼할 배우자를 찾지 못하면, 아브라함의 대가 끊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인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란 주님의 말씀이 위험에 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늙은 종은 비장합니다. 그때 그가 했던 고백이 있습니다.
창세기 24:12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은혜를 베푸소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베풀어 주소서입니다. 언약적 사랑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겠다 약속하신 그 약속에 바탕한 사랑을 베풀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헤세드의 도구로 늙은 종인, 자기 자신을 사용하여 달라 고백합니다. 늙은 종은 헤세드 베풀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늙은 종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삭의 배우자가 될 리브가를 그곳에서 만나게 하십니다.
여러분, 헤세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임한 대가 없는 사랑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에 주어진 선물과 같은 사랑입니다. 헤세드는 약속을 한 사람이 베푸는 일방적 사랑입니다. 여기까지 헤세드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2. 다윗은 왜 원수 사울의 집에 헤세드를 베풀기 원하나?
2. 다윗은 왜 원수 사울의 집에 헤세드를 베풀기 원하나?
본문 1절 말씀으로 가서 다윗의 헤세드를 보겠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집에 베푸는 대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에게 사울
은 어떤 존재인가요? 원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다윗은 과거 사울의 칼날을 피해 10년 이상을 도망다녔습니다. 광야의 동굴에서, 블레셋의 땅에서 낯선 이방인으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다윗은 10년의 고난의 시기를 지나 30세의 나이에 유다 족속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못했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그의 군대 장관 아브넬이 따로 11개 지파를 모아 다른 왕국을 건설합니다. 자신들이 왕위를 이을 적통이라는 것이지요. 사울도 그렇고, 그의 후손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다윗과 그의 왕국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그런 광야와 같은 세월 보내기를 7년 6개월, 도합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다윗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수도를 옮겨와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제야 비로소 다윗과 그의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두 발 뻗고 잠잘 공간이 생긴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이제 좀 평안해진 시기에, 다윗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하기 원합니까? 사울의 집안에 헤세드 베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왜 이런 이해 안되는 행동을 할까요?
물론 우리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다윗처럼 원수를 사랑할 뿐 아니라 헤세드를 베풀기 원한다 기도도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에게 헤세드를 베푸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윗의 헤세드 선언이 어떤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아직도 사울 집안을 중심으로 반란을 꿈꾸는 세력이 왕국 곳곳에 남아있고, 그들은 사울의 혈육을 추대해 왕국의 분열을 꾀할 것이기에, 이를 다윗은 사전에 방지하고자 사울 집안의 남은 자를 꾀어 잡아두려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 집안의 남은 자들을 잡아 두어 은총을 베품으로 민심을 잡고, 반란세력의 꿈틀거림도 잡고 등, 일석이조의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정치적 의심은 그만 접어도 됩니다. 근거는 말씀에 있습니다.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1절의 질문과 답은 3절에도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성경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그 부분이 중요하다는 강조의 의미입니다.
그만큼 사울의 집에 남은 자에게 헤세드를 베풀겠다는 다윗의 의지가 강함을 보여줍니다. 그에게 숨은 의도는 없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진심입니다. 마음다해 사울의 집안에 헤세드 베풀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헤세드 베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원수 집안에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헤세드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기억해야할 진리가 있습니다. 헤세드를 경험한 사람이 헤세드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요. 헤세드를 경험한 사람이 헤세드를 베풉니다. 다윗은 삼하7장에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찐하게 경험합니다. 다윗 언약이라 불리는 중요한 본문인데요, 하나님은 다윗 왕조가 영원할 것이란 약속을 주십니다.
사무엘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다윗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하자 이전에 자신이 사울의 집안에게 당한 억울한 일들이 눈녹듯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일까요?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대가 없는 사랑을 깊이 경험할 때 그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원망과 원수 맺는 것이 풀려지는 것입니다.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깊은 언약적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영원한 언약의 말씀으로 그 인생의 현재와 미래의 모든 문제까지 책임져 주신다 하신 그 대가 없는 풍성한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인생의 모든 문제를 덮고도 남음이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한 사람은 헤세드 베풀 상대를 찾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받은 값없는 구원의 은혜가 커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받은 헤세드를 베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그녀는 인생의 목마름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날 우물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는 그녀의 내면에 존재하던 근본적인 공허함의 문제를 아시고 자신이 곧 영원한 생명의 물이심을 밝힙니다. 예수가 모든 문제의 근본 해결점이 되신다 알려주셨습니다.
약속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친히 인생이 가진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신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헤세드 아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대가 없이 오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삶에 친히 그분께서 길과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 약속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가에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녀는 자신이 이고 있던 물동이를 내어 던지고 자신이 경험한 바 헤세드를 다른 이들에게 베풀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얻는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때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헤세드를 경험한 사람이 헤세드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헤세드를 경험했습니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얻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셨습니까? 이것은 과거형의 질문이 아닙니다. 현재형입니다. 현재, 지금도 여전히 헤세드의 은혜를, 예배의 자리에서, 삶의 현장 가운데 경험하고 있냐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가 아닌가는 다윗의 헤세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처럼 받은 헤세드를 누군가에게 베풀기 원하는가 아니면 그 헤세드의 물줄기가 멈춰있는가를 내 삶에서 확인하면 될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집의 남은 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냥 누군가 정도가 아니라 나의 인생 가운데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을 찾아 일부러 헤세드를 베풀려 하는 것입니다.
3. 다윗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므비보셋에게 헷세
3. 다윗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므비보셋에게 헷세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드디어 요나단의 아들 하나를 찾습니다. 찾고자 하면 보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그 대상이 내가 헤세드 행할 대상입니다.
여러분, 헤세드는 ‘대가 없는 언약적 사랑'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다윗의 헤세드를 다시 자세하게 보십시오. 은총을 베풀리라. 무엇에 근거해 헤세드를 베푼다 고백하나요?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해서 보았던 언약에 근거한 선언입니다. 이것이 왜 언약일까요? 과거 다윗과 요나단이 약속을 했는데, 다윗은 요나단과 과거에 했던 약속을 기억하여,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헤세드 베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한 다윗은 이제 자신의 헤세드를 요나단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행하려 합니다. 약속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20: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요나단의 집안을 보전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헤세드 = 일관성 있는 사람,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 사람, 앞뒤가 같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