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존재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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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views1. 탕자의 요구 2. 내어주는 아버지 3. 모든 것을 잃다 4. 모든 것을 되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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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대부분 다 아시는 내용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탕자에 대한 이야기는 어렴풋이 다 알고 있을만큼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본문에는 두 명의 아들이 나옵니다.
첫째 아들 장남입니다.
책임감이 강하고 아버지의 일을 잘 도와주는 성향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책임감이 강하고 또 아버지를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는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말미에 돌아온 동생을 향해 분노하는 장남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지극히 유대 전통에 사로잡힌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거든요.
그가 아버지에게 쏟아내는 그 말들을 잘 보면, 하고 싶지 않은데 장남이라서 어쩔 수 없이 순종하며 살아왔다는 것.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중에 물려받을 재산을 위해 참으려 했다는 것을 우린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아들 둘째입니다.
이 아들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아버지를 벗어나 독립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자녀들이 대학교를 들어가면, 자취를 하거나 기숙사에 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독립을 꿈꾸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둘째의 꿈은 단순한 독립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게에 재산을 물려 받아 빨리 독립하여 하고 싶은데로 사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어느 날 둘째가 아버지를 찾아가서 재산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재산. 땅을 달라는 것은 사실 지금 우리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크게 거슬리거나 문제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에게 먼저 재산을 물려주는 사례가 종종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때 당시는 달랐습니다.
재산을 주는 것은 아버지가 죽기 직전에만 가능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죽기 직전의 상황도 아니고, 또 죽을 병이 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요구한다는 것은 굉장히 큰 불효 였습니다.
지금 둘째. 탕자의 아버지는 굉장히 건강합니다. 현역이라 불릴만큼 기력이 넘치는 상황입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재산 상속을 요구합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이 말은 “아버지 빨리 돌아가세요. 난 당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내 인생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굉장히 모진 말을 탕자는 아버지에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중동 사람들은 이러한 탕자 이야기를 들으면 분노한다고 합니다. 만약 현대인 지금에도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재산 상속을 요구한다면, 파렴치하고 무례한 자식으로 여겨 때리거나 쫓아낸다고 합니다.
또한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재산을 나눠주는 법률이나 풍습도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탕자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빨리 죽을 것을 요구”합니다
아버지의 반응
아버지의 반응
그래서는 안되지만 만약 우리의 자녀가 만약 이러한 요구를 한다면, 일반적으로 아들에게 왜 그런지 묻거나 혼을 내는 등의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 일반적이지 않은 반응을 합니다.
12절 말씀처럼 “그 살림을 각각 나누어줍니다.” 장남은 2/3, 둘째는 1/3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최대 수혜자는 누구일까요? 큰 아들입니다. 동생이 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 재산의 2/3를 받습니다. 큰 아들도 둘째 아들과 같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른 척 재산을 받습니다.
아버지의 이러한 반응은 큰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를 찾아와 비난하고 항의하면서 마을에서 쫓아낼 수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자녀를 잘못 키웠다는 외부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과감하게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줍니다. 자식들에게 엄청난 기회를 제공합니다.
행복한 탕자
행복한 탕자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빨리 재산을 받았습니다. 탕자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완전 좋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었을거에요.
드디어 탕자가 집을 나섭니다. 자신이 꿈꾸던 자유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탕자가 살던 지역은 50만명 정도가 살았는데, 그는 먼 나라 400만이 넘는 유대인이 살고 있는 대도시로 재빠르게 이주합니다.
대도시에서 문화적 혜택을 누리며 또 마음껏 멋대로 살고 싶었더 것이죠.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재산을 상속 받았는데 이것은 현금, 현물이 아니라 땅이었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땅은 들고 갈 수 없고, 또 먼 나라에서 지금 살고 있는 땅의 땅 문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땅에서 나는 모든 소득과 이윤은 아버지가 가져가게 됩니다.
고민하던 탕자는 한가지 선택을 합니다. 바로 땅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13절 “며칠이 안되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여기에 나오는 “다 모으다"라는 말은 가진 모든 것들을 현금화 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땅을 며칠이 안되어 급작스럽게 판다는 것은 제 값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탕자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시세보다 싸게 손해를 보고 땅을 팔아 넘겼어요.
아무리 재산을 상속 받았어도, 이 땅을 처분하는 것은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살아있기에 그 땅에 나오는 모든 권한과 소득은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가 물려 받았다 하여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또 한번 죽이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아버지에게 “빨리 돌아가세요. 내 인생에 필요없어요"라고 하며 상처를 준 것을 넘어 이제 탕자는 땅을 팔며 “부모가 죽은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그래도 “부모님을 살아있는 존재"로 대했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죽은 존재"로 받아드리겠다는 그의 모습입니다.
탕자가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재산을 준 것만으로도 공동체에서 쫓겨날 수 있는데, 이제 그 재산을 아들이 팔아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이 땅을 너가 무슨 권한으로 파느냐?” 묻지 않았겠습니까?
그럼 탕자가 뭐라고 했을까요.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고 했고, 받았고 그것을 파는 겁니다.” 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탕자는 지금 공동체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죽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아들이 행동하는데도 아버지는 어떤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습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불행한 탕자
불행한 탕자
모든 것을 팔아 현금화 시킨 탕자. 아버지와 가문과 손절. 모든 것을 끊어낸 탕자는 돈을 들고 이제 먼 나라로 떠납니다.
많은 재물을 가졌습니다. 그가 일을 했을까요? 전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효율적인 재정관리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13절 하반절을 보면,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라고 합니다. 효율적으로 재정관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태하고 사치스러운 낭비벽이 심한 생활을 합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그 돈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았던 탕자의 삶에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꿈을 꾸며 찾아온 그 먼 나라에 큰 흉년이 찾아온 것이죠.
북적거렸던 그의 곁에 사람들이 남지 않았어요. 가진 재산이 사라지자 다 그를 떠납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세상이 우리를 다루는 방법입니다.
모든 것을 다 줄 것처럼 하며 우리에게 다가와요.
세상이 알려주는 방법대로 살고, 세상의 가치를 붙잡고 살면 성공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해요.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면 실패하고 무시 당한다고 해요.
한번쯤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우리를 유혹해요.
사역을 시작하기 전 저는 직장을 다녀보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만나게 될 청년들과 성도님들이 직장을 다니고 그 안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경험해보지 않고 그들에게 섣부른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직장을 다녀보면서 회식자리에서 술을 거절하는 것에 따른 어려움도 겪어보고 싶었고, 또 주일에 출근해야 하는 그 마음의 어려움을 저도 알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취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 마음의 소원을 정말 신실하게 이루어 주셨어요.
그 어느 부서보다 빡쌘 부서였습니다.
그 부서에 배정을 받으면, 사람들이 내기를 합니다.
“쟤는 하루만 하고 도망친다. 쟤는 10일은 버티겠다.”
나중에 들었는데 저를 보고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야 쟤는 3일짜리"
얼마나 신실하게 이루어 주셨는지 퇴근 시간이 없습니다. 주말 주일 출근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야근과 주말 출근에 대한 수당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회식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퇴근하니 새벽 4시 반이었습니다. 집에 가서 자고 나오기 애매해서 그대로 새벽예배 가서 기도하고 집에 들려서 옷만 갈아입고 나왔던 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회식자리에 가면 늘 술에 대한 유혹이 있었습니다.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술을 마셔야 하고, 팀장들과 함께 술 친구가 되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저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술을 권했던 분은, 제가 다녔던 교회 집사님이었고, 옆 교회 장로님이셨습니다.
그 때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정말 술을 마셔야 잘 되는 것일까? 술을 마셔야 사회생활을 잘 하는 것이고 성공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이 알려주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저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1시간 먼저 출근해서 청소 해놓고 커피도 내려놓고 환기도 시켜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저는 신대원을 가야했기에, 기한을 정해놓고 취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더 후회없는 직장생활을 위해 열심히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퇴사를 준비할 때 정직원에 대한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술도 마시지 않아서 늘 구박 받았고, 정직원이 되기 위한 세상의 방법대로 살지 않았음에도 정직원에 대한 이야기가 저에게 들려왔습니다.
정직원이 되는 것이 세상의 성공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때 일하면서 받았던 월급은 그 당시 제 인생에서 있어 가장 큰 돈이었습니다.
100만원 중반도 되지 않았던 그 월급. 단 한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큰 돈이 제 통장에 들어온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더라구요.
그 돈들로 뭘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너무 기분이 좋더라구요.
그리스도인로 살고 섬기기 위해 뛰며 일하던 그 때 아이러니하게 제 마음의 위안과 안정을 주던 것은 그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눈 딱 한번 감고 술 한번 마시면 정직원과 가까워진다는 이야기 그리고 술친구가 되어 어울리면 훨씬 더 안정적여질 것이라는 이야기 앞에 솔직히 흔들린 적도 있습니다.
신대원. 목사 그 길 가지 않고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다라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다루는, 다스리는 방법이에요.
모든 것을 다 줄 것처럼 하며 우리에게 다가와요.
세상이 알려주는 방법대로 살고, 세상의 가치를 붙잡고 살면 성공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해요.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면 실패하고 무시 당한다고 해요.
한번쯤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우리를 유혹해요.
탕자는 세상의 유혹에 빠져 그대로 살았어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던 그 순간 신기루처럼 모든 것들이 사라졌어요.
그리고 혼자 남았어요.
영원할 것 같았던 세상의 행복이 갑자기 끝이 났고, 탕자에게는 공허함만 남았어요.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그 공허함을 채우는 방법은 아버지 집으로 가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를 포기해요.
그리고 스스로 먹고 살 길을 찾기로 결정해요.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자국민들도 먹고 살 길이 막막했기에, 외국인에게 그 누구도 일 자리를 주지 않는 것이죠.
그러다 정말 간신히 들에서 돼지 치는 일을 얻게 되었어요.
유대인이 돼지를 친다는 것은 굉장히 큰 사건이에요. 어디 가서 말도 할 수 없는 굉장히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에요.
위기 11장 7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고기를 먹지도 않고 사육하지도 않아요.
또한 유대 문헌에는 “돼지를 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라"라는 글도 있어요.
유대인은 절대 돼지랑 가까이 하지 않아요.
탕자도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아무리 그가 망나니처럼 살고 부모님에게 폐륜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는 유대인이에요.
돼지가 유대인에게 어떤 동물인지 정말 잘 알고 있어요.
돼지. 불결한 동물과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밑바닥보다 더한 곳까지 내려가는 것을 말해요.
절대 같이 살 수 없는 동물인 돼지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요. 유대인으로써 무조건 꼭 지켜야 하는 안식일. 쉬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그 안식일 조차도 살아내지 못해요.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으로도 모자라서 그가 갖고 있었던 신앙조차 사라져가요.
아버지 곁을 떠나 흥청망청 살면서 그는 하나님을 잊어 갔어요. 이제 희미하게 남아있던 그 신앙. 그 믿음 조차 돼지와 살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면서 잊고 있는거에요.
여기까지만 해도 최악의 삶이잖아요.
부정한 짐승인 돼지와 함께 구르며 살고 안식일조차 지킬 수 없는 삶. 이것보다 더 최악이 있을까 싶은데요. 또 남았어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이렇게라도 하면서 돈이라도 벌면, 그에게 전부였던 돈이라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을텐데요.
그런데 이 일조차 돈벌이가 되지 않아요.
너무 흉년이 심해서 품삯이 형편 없어요.
힘들게 돼지를 치면서 몸으로 때우면서 일을 하는데 먹을 것이라도 잘 먹어야 하잖아요. 먹을게 없어요. 정말 고생하면서 일하는데 그 배를 채울 음식조차 없어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돼지가 먹는 열매를 먹는 것 이었어요.
부정한 돼지와 함께 살아요. 온 몸은 땀투성이 더러워요.
그리고 안식일도 지킬 수 없어요.
이것만으로도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하는 것인데, 이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남은거에요.
돼지가 먹는 열매까지 먹어요. 하지만 그 돼지 먹이조차 없어서 배부르지 않아요.
인간의 존엄성이 완전히 뭉개졌어요.
집으로 돌아오다
집으로 돌아오다
이제 그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어요. 더 이상 미래가 그려지지 않아요. 그래서 그 힘든 순간에도 외면해왔던 마지막 한가지 대안을 떠올려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외에 희망이 없어요.
그런데 그 유일한 단 한가지의 희망을 감히 선택할 수 없어요.
그 희망은 자신이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온갖 모욕과 수치를 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왔던 고향의 집과 아버지의 품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을거에요. 잊으려 했을거에요. 하지만 그럴 수록 오히려 더 선명하게 그 집과 아버지 품이 떠올랐을거에요. 그리고 마침내 그가 이런 생각까지 해요.
17절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 곳에서 일하는 품꾼들. 나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뭉개가면서 일하지 않는 그들도 먹을 것이 많은데, 원래 그들의 주인이었던 나는 여기서 굶어 주는구나.
오랜 고민 끝에 염치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용서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그냥 그 집에가서 무릎꿇고 사죄해서 품꾼 중 하나가 되어 배부르게 먹고 싶었어요.
그의 유일한 소원은 품꾼 중 하나가 되어 배부르게 먹는 것이었어요.
소원이 배부르게 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그는 절박했던거에요. 다시 부자가 되고 싶다.가 아니라 그저 먹고 싶었어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오만가지 생각을 해요. 그래서 머리속에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야지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면서 와요. 그리고 정말 아버지의 그 화를 누그러 뜨릴 수 있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고의 답을 찾아요.
18-19절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저를 품꾼 중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가 생각한 최고의 답변이었어요.
탕자는 자신의 잘못을 정말 뉘우친 것이 아니었어요. 그는 단지 아버지의 화를 누그러뜨려서 배부르게 먹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마을 입구가 보여요. 저는 탕자가 바로 마을로 들어왔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쭈뼛쭈뼛 했을 것이고 그 입구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정말 많은 고민과 생각을 했을 거에요.
만약 자신이 이렇게 말을 했는데도 아버지가 받아주지 않으시면 자신은 더 이상 갈 곳이 없거든요. 그렇게 되면 정말 이제 아무런 선택지가 없어요. 마을 사람들은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난할거에요.
그가 그렇게 고민하며 마을 입구로 들어설 때. 어쩌면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땅만 보고 있었을 그를 누군가 달려와 와락 안아버립니다.
20절 하반절입니다.
“아직 곧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탕자는 지금 먼 거리를 걸어왔어요. 돼지치다 왔어요. 좋은 옷. 신발 살 돈도 없어요. 그의 행색은 정말 초라했을거에요.
많은 것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나갔을텐데, 돌아오는 그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 없어요. 꼬리꼬리한 냄새도 나요. 딱 거지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아버지는 그가 어떤 모습, 어떤 냄새를 풍기던 전혀 상관하지 않고 달려와서 와락 안아버렸어요.
이 당시 성인 남성들은 발목을 덮는 긴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리고 발목을 노출 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어요. 그래서 무조건 걸어야 했고, 걸을 때도 발목이 노출 되지 않도록 했어야 해요. 남자 어른은 절대 뛰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 성인 남성이 지금 발목 노출을 신경쓰지 않고 막 달리고 있는거에요. 사회적 관습을 또 깨고 있어요.
아들은 안은 아버지는 목을 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해요. 입을 가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는거에요. 아들이 어떤 변명도 말도 하지 못하도록 막으며, “너가 어떤 모습이던지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재산 분할 요구에도 말 없이 주었던 아버지, 그 재산을 팔아 현금화 시키는 것을 보고 있었던 그 아버지가 이번에는 아들을 향해 달려가요.
왜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달려 갔을까요? 달려 간 것이 아니라, 달려갈 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가 아닌 동네 사람들이 먼저 탕자를 발견했다면, 마을로 두번 다시는 들어올 수 없었거든요.
당시 풍습 중 이렇게 아버지에게 폐륜적 행동을 저지르고, 그 가문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준 아들이 돌아오는 경우 마을 사람들이 그 앞을 가로 막아요.
그리고 케차라라는 의식을 진행해요.
질그릇 항아리에 태운 콩과 태운 옥수수를 가득채워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들고와서 걸어가는 그 아들 앞에 내던지면서 깨뜨려요.
질그릇 항아리가 깨지면서 질그릇 조각과 함께 안에 있던 태운 콩과 옥수수가 뿌려지는거에요.
그 때 사람들은 이렇게 외쳐요.
“00는 그 백성으로부터 끊어졌다!”
이 케차차 의식을 당하면 다시는 마을로 돌아올 수 없어요. 쫓겨나서 영영 회복하지 못하고 끊어진 인생을 살아야 해요.
아버지는 알고 있었던거에요. 이 아들을 다른 누군가가 발견하면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다는 것과 자신은 더 이상 아들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알고 있었던거에요.
그래서 아들을 기다렸고, 저 멀리 보이는 아들이 보이자 발목이 노출되던 말던 신경쓰지 않고 달려와 아들을 안고 입을 맞춘 것이죠.
시력이 몽골사람처럼 7.0 / 8.0이어서 아들을 알아 본 것이 아니에요. 아들의 실패를 이미 알고 있었어요.
아들의 행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리고 그 먼 나라에 흉년이 든 사실을 알았기에 그가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에요.
동네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봉변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서있다 드디어 아들을 만나게 된 것이죠.
아버지에게 수치와 부끄럼을 주고 떠났다 돌아온 이 아들의 이야기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나오는 큰 아들, 탕자 그리고 아버지는 누구를 말할까요.
큰 아들과 탕자는 저와 여러분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선택해 주셨어요. 그리고 구원을 선물로 주시며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어요.
저와 여러분은 그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아요.
하지만 우리도 탕자처럼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해 눈을 고정하고 발걸음을 옮길 때가 너무 많아요.
그분은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고, 세상에서 봉변을 당하고 있는 우리를 구해주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수치와 부끄러움 그리고 상처를 주는 세상을 동경해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지 그 모습 그대로를 다 받아주셨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 것에 대해 감사하기보다 잊고 살아갈 때가 많아요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신이 먼저 다가 온 종교는 없어요.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을 찾아가려고 고행을 하고 금식하며 어떻게든 몸부림을 치는데 찾지 못하죠.
제가 인도에 있었을 때 “구루"라고 부르는 선각자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 중 하나는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20년동안 눕지 않았다. 라고 하며
눕지 않음으로 신을 찾아가는 사람도 만난 적이 있었어요.
20년동안 눕지 않았음에도 그는 신을 찾지 못했어요.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어떻죠?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죠.
우리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미쳐 깨닫지 못한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어요.
하나님은 모든 일반적인 관습과 생각을 깨고 우리에게 달려 오셨어요. 그리고 대신하여 죽으셨죠.
우리가 계속 세상을 향해 달려가고 다른 곳에 눈과 마음을 주어도 하나님은 늘 우리를 기다리고 계셔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한주를 살아내며, 제대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했음에도 이 자리에 다시 나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화려한 세상을 쫓고, 세상이 주는 안락함과 평안함이 아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고 나를 먼저 선택해주신 하나님에게서 오는 진짜 평안과 기쁨입니다.
탕자는 세상을 향해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탕자 이야기를 통해 무슨 생각과 마음이 드시나요?
하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의 반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계속 서서 기다리시며, 우리가 몸을 돌려 바라보면 바로 달려와 안고 입을 맞춰 주실거에요.
몸을 돌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바라봄을 통해 주시는 그 분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고
그것을 또 나눌 수 있는 은혜가 있는 오늘 이 시간과 한 주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