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무리와 제자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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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
찬송가 :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자)
본문 : 막 6:30-4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당시 통치자는 헤롯 왕입니다.
그는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했습니다.
헤로디아라는 여자였죠.
이 여자도 대단합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여자였습니다.
어느 날, 헤롯 왕의 생일이 되었을 때,
자기 딸을 시켜서, 자기를 죄인으로 비판했던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 오라고 시킵니다.
굉장히 잔인한 성격을 지닌 여인입니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위해서라면, 이웃의 목숨도 아깝지 않은 여자가 헤로디아였고, 그의 딸이었고, 헤롯 왕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은 목자없는 양이라고 생각하셨는데,
‘목자’라는 단어는, 대통령이나 군대 사령관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목자’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왕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에스겔 34:2을 보면은,
너는 목자들에게 예언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목자는 왕입니다.
그 목자들에게 예언하기를,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 당시 통치자, 정치인들이 자기들만 배를 불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통치자, 정치인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정당한 통치차라면, 당연히 백성들을 먹여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지 않으니,
이제는 여호와, 나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먹이는 목자가 되겠다.
내가 친히 잃어버린 양떼를 찾아 다닐 것이다.
그게 에스겔, 34:10,11, 15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리라.
그래서 목자라는 단어는 정치적 용어이고, 군사적 용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종말의 목자를 기대했죠.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자신을 목자로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시대나 정치인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백성들을 먹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만 배불리는 정치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정치인들 뿐만 아닙니다.
우리 기성세대도 다음 세대를 먹이는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먹이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양질의 꼴을 먹일까?
좋은 음식을 먹여줄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리더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도자들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을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아무리 힘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부모이고, 가장 이고, 어른이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특정 정치인이나 지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허락하신 영혼들을 잘 먹이고 있는가?
나는 나에게 맡긴 양떼들을, 목자 없는 양들처럼 내팽겨치고 있지는 않는가?
이것을 질문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무리들은 배고픈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메말랐고, 육체적으로는 궁핍한 존재들입니다.
무리들은 항상 요구만 합니다.
원래 무리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주는 사람의 마음은 이해하지 않고, 언제나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리들에게 어떤 기대도 걸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도를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을 향하여, 좀 쉬어라 라고 하십니다.
31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지금 전도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12제자들이 전도하러 갔다 왔는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오고 가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서,
밥 한끼 먹을 여유조차도 없었습니다.
사역이 굉장히 잘 되고 있었죠.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자들은 무리들로부터 격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원문을 보니까, 나를 따라오라.
나를 따르라.
원문을 보니까 생략되어있지만,
예수님이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듀테. 너희는 ‘나를 따르라’
무리를 보지 말고, 무리를 따르지 말고, 사역이 잘 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제자들아, 너희는 항상 나만 보고, 나만 따라와라.
이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무리들이 하는 게 뭔지 아느냐?
무리들은 항상 요구만 한다. 항상 필요만 충족하려고 한다.
그러니, 사역이 잘 되든 잘 되지 않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너희는 나만 따라오너라.
듀테!
나를 따르라.
이게 제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리들을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역의 결과물을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잘 했나?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나?
전도가 얼마나 잘 되었나?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사역을 내려놓고, 주님과 한적한 곳에 가서 쉴 수 있는 것, 그게 제자의 길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매일 아침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일상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자기 전 저녁 시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성과도 우리 마음을 쉬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쉴 수 있고, 주님 안에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생기를 되찾아야 우리는 일상을 살아낼 수 있고, 사역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한적한 곳에서 쉬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무리들은 항상 배가 고프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지금 무리들은 지도자에 대한 목마름이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32-33절입니다.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제대로 된 지도자를 만났다.
이제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대통령을 만났다.
새로운 나라가 왔다.
새로운 나라가 임했다.
이런 기대감이 무리들에게 얼마나 컸던지, 그들이 걸어간 것도 아니에요.
달려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야 우리가,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되고,
악한 헤롯 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겠구나.
이제야 우리가 제대로 된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겠구나. 라는 기대감이 얼마나 컸던지, 그들이 예수님이 피하는 것을 보고, 배를 따라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에요.
로마 제국을 전복시키고,
헤롯 왕을 왕위에서 쫓아내는 그런 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쫓아내고 싶었던 왕은, 어둠의 왕, 죄악의 왕, 사탄이지, 로마 제국의 황제, 헤롯 왕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정치세력을 전복시키면, 새로운 나라가 올 것이다.
이런 기대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달랐어요.
예수님은 한번도 무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로마와, 대제사장들의 무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죠.
예수님이 주고 싶으신 세상은, 죄가 없는 나라, 사망이 없는 나라,
영원히 하나님과 사는 나라를 주고 싶으신 것이지,
겨우 로마 제국의 멸망 정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왜 따르고 있습니까?
이게 중요한 질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나요?
로마제국의 멸망, 헤롯 왕의 탄핵, 뭐 이런 걸 기대하고 있나요?
나를 괴롭히는 세력의 멸망, 나를 경제적으로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망하는 것, 뭐 이런 걸 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에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해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에요.
천국에서는 영원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공부가 아닙니다.
좋은 대학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대학이라도,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도, 하나님의 말씀 없는 인생은 시한부 인생입니다.
언제 죽어도 천국 가는 인생이 아니라,
언제나 위태위태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밥이요 영양제입니다.
*이제 저녁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말씀이 달았는지, 제자들과 무리들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말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제는 각자 흩어져서, 저녁을 사 먹고, 집에 돌아가 쉬면 될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예수님,
여기는 광야요, 빈들입니다.
쇼핑몰도 없고, 식당가도 없고, 분식집도 없으니, 무리를 보내셔, 근처 동네에서 저녁을 사먹도록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 당시 무리가 남자만 오천 명이었습니다.
그 당시 가버나움이라는 동네 사람들의 숫자가 500명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무리가 모였는지 파악이 되지 않습니까?
그 무리가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파지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금세 사그라들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하여, 무리들이 돌을 들고 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무리들은 항상 자기의 필요만 요구합니다.
무리들은 항상 굶주린 존재들입니다.
자기들이 직접 무언가를 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항상 누군가에게 요구만 하는 존재가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리에 대하여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나에게 요구만 하고,
언젠가는 필요를 채워주어서 만족하다가도, 언젠가 배가 고파지면 으르렁 거리면서, 목자를 공격하는 존재가, 양떼들이요,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리에 대하여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리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쉬는 존재들이고, 예수님 안에서만 진정으로 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으세요.
무언가를 달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역을 잘해도, 그것 때문에 기뻐하지도 않으시고요. 우리가 사역을 잘 못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실망스러워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것,
듀테!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주님을 따라 사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죠.
*31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 광야에서 가서 쉬자고 하시면서,
물리적인 동행을 요청하였다면,
37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면서,
긍휼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예수님과 심리적인 동행을 같이 하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가 이 무리들을 먹여라.
너희가 해야 한다.
주님, 우리가 어떻게 이 무리를 먹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디가 가서 200데나리온, 1,500만원어치의 떡을 사다가 먹이겠습니까?
말이 안 되는 요구를 하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심리적인 동행’을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 안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
그런데 제자들아,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는 얼마나 내 마음과 같아져 있느냐?
얼마나 나의 마음과 일치되어 있느냐?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말고, 너희는 얼마나 저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들처럼, 불쌍히 여기고 있느냐?
그것을 내가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게 이것 뿐입니다.
그러니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우리는 다 모자란 점이 있습니다. 잘나서 사역하는 것도 아니고, 잘나서 교회 봉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실 때,
나는 못합니다. 가진 게 없습니다. 안 됩니다. 라고 말하지 말고,
겸손히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작은 것을 드려서,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떡과 물고기를 받으신 예수님은, 무리들을 100명씩, 50명씩 앉히라고 하십니다.
마치 푸른 풀밭에,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십니다.
유대인들은, 가족들이 식사할 때에, 가장이 대표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5,000명을 먹이시는, 대가족의 가장으로서 대표로 하나님께 축사하시며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계산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200데나리온의 떡을 사다가 먹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가장이 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먹이는 목자가 되겠다.
자, 다 앉아서 나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도록 하자.
여러분,
무리들은 요구만 합니다.
항상 자신의 필요만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누구입니까?
제자는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말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과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제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따라 한적한 곳에서 쉬기도 하고, 주님과 함께 치열하게 사역하기도 하는 존재가 제자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을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목자 없는 양같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던 그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게 하여 주시고, 오늘 하루, 나에게 맡기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용기도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
묵상
제자는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를 보고 배우는 사람이다.
무리는 요구만 한다.
무리는 바라기만 한다.
그게 무리의 특징이다.
그러나 제자는 다르다.
제자는 예수님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떠나고, 예수님과 함께 쉬고, 예수님과 함께 피곤하지만 그들을 먹어야 한다. 그게 제자이다.
주석
헤롯의 잔치 이후 기록되었다.
제자들은 전파하고, 축귀하고, 고치는 사명을 마치고 돌아왔다.
제자들은 집중적인 선교 사업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들의 활동은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예수님은 광야에서의 안식을 인도하신다.
예수님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 대신에 ‘하나님의 임재 그자체’이시고, 만나 대신에 ‘살아있는 떡’ 그 자체이시다.
예수와 제자들은 군중을 피하셨다.
군중은 호수 주위를 걸을 수 있었고, 배 앞의 상륙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군중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휴식을 방해했으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화를 내시기보다는 긍휼히 여기셨다.
황폐한 곳에서는 음식을 얻을 가능성이 없었다.
근처 마을도 500명 규모였다.
5천 명 이상이 먹을 음식은 없었다.
(제자들의 반응은, 출애굽 때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과 비슷하다.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의 떡을 사서 먹이리이까?)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 떡은 제자들이 직접 공급해야 했다.
200 데나리온은, 8개월치의 월급이다.
마가는 풀이 푸르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그 시간이 늦은 겨울이나 이른 봄에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갈릴리의 풀은 비가 온 뒤에 푸르게 변한다.
무리를 100명씩, 50명씩 나누었기 때문에, 함께 먹은 사람의 수가 5천 명이었다는 것을 쉽게 계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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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잔치에는 귀한 사람들만 초대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잔치는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열린 것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무리들은 가족으로 대하고 있지 않다. 기적보다도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초대교회는 오천 명을 먹이신 것과 최후의 만찬 사이에 유사점을 보았다.
두 기자 모두 “떡을 가지고… 축사하고… 떼고.. 제자들에게 주는” 순서를 포함하고 있다. (14:22)
예수님은 모인 무리들을 가지고 군사적 봉기를 일으키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모인 무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셨다.
양들을 위한 목자로서 사셨다. 이게 예수님의 목표요 목적이었다.
우리는 영혼 그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그 영혼을 통해 무언가 다른 것을 이루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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