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9] 청년설교 '우리가 갖추어야할 모습' (살전1:1-3)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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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성도)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2. 교회(성도)의 모습은? 1) 믿음의 역사 2) 사랑의 수고 3) 소망의 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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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갖추어야할 모습

데살로니가전서 1:1–3 (NKRV)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오늘부터는 데살로니가서를 볼 겁니다. 데살로니가서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과 후서 3장,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편지입니다. 이 데살로니가서는 바울이 기록한 성경입니다. 총 세 번에 걸처 떠났던 전도여행 중 2차 전도여행 때 ‘데살로니가’라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17:1을 보면,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차 전도여행을 떠난 바울과 그 일행은 ‘데살로니가’라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이곳을 지도로 한번 살펴보면, (2차 전도여행 사진) 처음에 사진 우측 하단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안디옥을 거처 드로아까지 올라갑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동쪽에 있는 비두니아, 지금의 터키 수도인 앙카라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여 바다 건너 마게도냐 지역으로 넘어갑니다. 지금의 유럽입니다. 그래서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지도를 계속 보면 네압볼리와 빌립보를 지나 방금 행17:1에서 읽은 것처럼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다녀간 후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데살로니가로 가게 되는 거예요. 이 데살로니가는 오늘날 그리스에 속한 한 도시예요.
아까 본 행17:1에 이어서 2절을 계속 보면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얼마동안 복음을 전합니까? 대략 3주 내지 4주, 채 한 달이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아주 놀라웠습니다. 4절에 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도행전 17: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사실 세 안식일은 그리 긴 기간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비교적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는 로마시대로 황제가 집권하던 시대였죠. 당연히 그들에게 왕은 누구입니까? 로마황제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전하니 이를 반대하는 이들이 들고 일어섭니다. 사도행전 17:7을 보면,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여기서 가이사는 로마황제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와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저 바울이란 작자가 “황제의 명을 거역하여 말한다. 다른 임금 즉, 다른 왕이 있는데 그가 예수다. “라고 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랬더니 데살로니가의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이 와서 소동을 일으키게 되고 바울과 일행들은 결국 이곳을 떠나게 됩니다. 이 이야기들이 모두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로 바울은 이들을 계속 기억하고 잊지 못합니다.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짧은 기간 동안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또 신앙 공동체가 세워진 것을 보고 왔는데요. 바울은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 안에서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라는 소식을 듣고 이 편지, 데살로니가서를 쓰게 된 거예요.
이게 오늘부터 살펴볼 데살로니가서의 대략적인 배경입니다. 이들은 비교적 짧은 3~4주 가량 되는 기간동안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믿음의 뿌리가 온전히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핍박을 받고 있던 게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이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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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이 쓴 편지가 뭐라고요? 이 데살로니가서인데,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글을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는데 어디 안에 있는 교회라고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 성립 조건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거예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이를 떠나서는 교회 공동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교회를 표방한다고 교회일까요? No. 건물을 일반 교회 건물처럼 지어놓고, 간판도 ‘00교회’라고 걸어놓는다고 다 교회일까요? No.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어디 안에 있느냐, 누구 안에 있느냐에 따라 그것이 교회이고 그렇지 않고로 나뉩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분포 사진) 사진을 보시면 정말 많이 분포되어 있죠. 2018년도 통계청 자료를 보면, (통계청 자료 사진) 기독교 단체 총 수가 56,879개라고 합니다. 근데 이게 이단들도 포함되어 있는지 아니면 순수 개신교만 되어 있는 건지는 조금 불분명한데,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불교나 천주교 등 타종교에 비하면 정말 많은 교회가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히는 교회 건물을 기준으로 조사한 것이에요. 교회 건물이 이만큼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과연 이 5만 여개가 넘는 교회 중에 ‘진짜’ 교회는 얼마나 될까요? 정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참된 교회는 얼마나 될까요? 제가 감히 판단하고 따질 순 없겠지만 주님은 아시겠지요. 진짜 주님의 교회가 이중에 몇 개가 될지는요.
우리 선린교회도 당연히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56,879개 중에 하나의 교회겠지만, 단순히 이런 통계청 조사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 어느 기관에 교회로 등록되어 있다고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교회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우리도 겉으로는 이런 교회 건물을 갖고 있고, 십자가도 달려 있고, ‘선린교회’라는 간판을 달아놓았어도, 통계청 자료 조사에 교회로 들어가 있을지라도 실상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면 교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인 선린교회 공동체가 어디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를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를 우리에게 적용해봅시다.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의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 작은 교회는 ‘나 자신’이 됩니다. 가장 작은 교회의 단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예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면 ‘나’라는 교회를 볼 때에 ‘과연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죠. 내가 교회라면, 바꾸어 말해보면, ‘예수 안에 있음으로 나는 교회인가?’ 자문해보십시오. 그리고 자답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디 안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 속에서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우리가 속한 곳은 세상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학교도, 직장도, 공부도 세상 속에서 다니고 있고, 세상 속에서 하고 있지만 우리의 속함은 세상이 아닌 주님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사는 자라면, 여러분의 하는 생각도 하나님 안에서 하는 신령한 것일 것이고, 나오는 말도 신령한 것일테고, 행하는 것들도 선한 것들일 겁니다. 반면에 ‘나는 그리스도인이야. 예배도 매주 빠짐 없이 드려. 헌금도 꼬박꼬박 내는걸?’ 라는 등의 교회 간판을 겉으로는 달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아닌 그저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면, 그의 모든 것이 세상의 것들과 또 세상 사람들의 것들과 다를 바 없을 거예요.
이것은 곧 정체성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면, 그게 곧 나를 나타내고 보여주는 것이 될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그 반대로 나타나겠죠.
사랑하는 선린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세상에 속한 이들이 아니라, 그 세상 속에 빛과 소금으로 특별히 보냄 받은 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임을 기억하고 여러분이 가진 그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게 곧 교회이고 한 성도 한 성도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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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제가 읽겠습니다.
살전1: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한다. 바울과 실라,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인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왜 감사할까요? 그리고 기도할 때에 이들을 기억한다고 하는데, 무엇을 기억하는 걸까요? 이에 대한 내용을 바울은 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바울은 이들의 어떠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이들을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역사이고, 사랑의 수고이며, 소망의 인내입니다. 사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에 복음을 들었고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의 뿌리가 충분히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고 서두에 말씀드렸죠. 이들은 이런 상태에서 박해를 받았던 것인데, 디모데가 전해온 소식은 모든 걱정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했던 거예요. 어떠한 모습 때문에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이런 모습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이들을 기억할 수 있던 것이에요. 이 세 가지 모습은 데살로니가서에 계속해서 나오는 큰 주제인데, 사실 신앙인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교회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모습이고, 그 교회된 우리가, 내가 갖추어야할 모습이라는 거예요. 이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행하는 모든 일에 신실함이 담겨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사회 관습으로 잘 알려진 고용인과 고용주 간의 관계에서 특별히 고용인(종, 하인 같은 사람, 아랫 사람)에게 요구되는 충성의 덕목과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는 대상을 향한 신실한 행동을 ‘반드시’ 수반합니다. ‘때때로, 가끔,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가 아니라, 믿음이란 건 ‘반드시, 언제나, 항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역사는 우리가 믿는 대상에 대해 반드시, 언제나, 항상 신실한 행동을 갖춘다는 걸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음의 역사는 우리가 믿는 대상에 대해 반드시, 언제나, 항상 무엇을 갖춘다? 신실한 행동을 갖춘다는 걸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죠.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실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뿐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함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신실했습니다. 이게 성도의 모습이고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만 믿음의 역사를 다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시고 우리 위에 세우신 이에게도 신실함을 담아 행해야 합니다. 그의 내리는 명령이나 요구사항이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셨다고 인정하고 해야하는 것입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만 신실하고 그 외의 곳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은 오히려 성경에 반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안에서의 삶과 그외 모든 삶의 영역을 동일하게 보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3:22-23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과 다른 곳에서의 모습이 동일함을 기억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역사는 우리가 믿는 대상에 대해 반드시, 언제나, 항상 신실한 행동을 갖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사랑의 수고입니다. 이것은 모든 수고에 사랑이 담겨 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수고의 동기가 무엇이라는 겁니까? 사랑이라는 뜻이죠. 성도 안에서의 수고에는 어떤 강요가 없습니다. 억지로 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타인의 유익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자발적인, 자원하는 수고입니다. 마지 못해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 사랑에 의하여 그 모든 수고와 희생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 또한 받은 그대로 사랑이 담긴 수고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수고는 어떤 수고입니까?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수고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사랑이 이유가 되어 하는 수고입니까? 그리고 그 수고 속에는 주님께 받은 사랑이 녹아져 있습니까? 어떤 이들은 수고를 하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만큼 하는데 당연히 고마워 해야지.” 물론 그런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선 안 되죠. 받는 이들도 감사로 받아야겠지만, 그 전에 이와 같은 마음으로 한다면 이는 시작부터가 사실상 잘못된 것입니다. 비록 내 수고를 아무도 몰라줘도, 내 수고에 대해 아무도 감사할 줄 모른다 할지라도 우리의 기본 베이스는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하고, 사랑을 담아 수고와 헌신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신 것처럼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요.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이름 붙여진 장인데, 고전13:3을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한 마디로 내 모든 걸 쏟아 부어 수고하고 희생하며 헌신할지라도 그 안에 무엇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어떻다고요? 아무 유익이 없다. 그래도 모든 걸 다 쏟아 부었으면 조금이라도 유익이 있겠지. 아닙니다. 여기 ‘아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데이스’라는 단어인데, 그 뜻이 nothing입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전혀 없는’ nothing이에요. 아무 유익이 없다고, 조금도 없고 전혀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교회와 사회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고보다도 먼저 확인하고 점검해봐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 가운데 사랑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고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하고 능력이 뛰어나고, 교회에서 이 봉사, 저 봉사, 온갖 헌신은 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사실상 꽝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이 무색해지는 것은 바로 사랑이 없을 때 그러함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억지로의 수고’가 아니라, ‘사랑이 없는 수고’가 아니라 ‘사랑이 있는 수고, 사랑의 수고’를 더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소망의 인내입니다. ‘인내’란 특별히 고난 가운데 참고 견디는 태도를 말합니다. 어떻게 고난 가운데 참고 견딜 수 있습니까? 사람의 개인 역량으로 할 수 있을까요? 참을성이 많으면 될까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심정으로 기다려보면 될까요? 아닙니다. 인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입니다. 단순히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약속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리라는 확실한 약속입니다. 불분명하고 헛된 기대가 아니라 확실한 약속 가운데 우리는 인내하며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인내하십니까?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내 힘으로 참아내고, ‘이 또한 지나갈 거야’라는 심정으로 참아내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세상 속에서의 고난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성도로 살아가지만 인생의 고난이 항상 동반되지 않습니까? 이게 인생이고 삶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세상에서 성도라는 이유로 받는 어려움까지 포함합니다. 삶 속에서 있는 어려움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어려움들도 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해요. 우리의 인내는 소망에 기반한 인내라고요. 어떤 소망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입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짧습니다. 금방 지나갑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나그네’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우리의 인생은 잠시 잠깐이고 금방 지나간다는 뜻이에요. 우리의 삶이 고난의 연속일지라도 이 짧은 인생 속에서 오직 예수님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붙들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내 힘으로 그저 하루하루 죽지 못해 견디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약속 붙들고 소망의 인내를 이루며 살아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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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갖추어야할 모습이 무엇인지, 성도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인지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성도는,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결코 성도라고,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외형의 건물과 간판, 이름만으로 교회를 이루는 게 아니고, 오직 주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교회라고 불리는 것이에요. 성도인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교회입니다. 왜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이 사실을 꼭 기억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여러분의 정체성임을 꼭 기억하길 바랍니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오직 주 안에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나’는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입니다. 왜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도된 우리의 정체성임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 즉,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에 합당한 삶의 모습이 뒤따릅니다. 그것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역사 ; 성도로서 하나님을 향한 견고한 믿음을 구하고 지켜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 뿐만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함에 있어서도 항상 하나님께 신실하길 바랍니다.
사랑의 수고 ; 그리고 여러분의 수고를 그저 여러분의 힘으로 하기보다 사랑에 기반하여, 사랑이 담긴 수고를 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여러분이 속한 곳곳에서 사랑의 수고를 더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소망의 인내 ; 마지막으로 고난의 연속인 우리의 삶 속에서 내 힘으로, 정신력 등으로 버티고 견디기 보다, 우리의 모든 것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하는 자가 되길 바랍니다. 제가 졸업한 합신의 한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혼자 참으면 고난이지만, 십자가 붙들고 참으면 경건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십자가만 붙들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그러한 믿음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교회, 그러한 경건의 청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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