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죄책감과 속죄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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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 252장 (나의 죄를 씻기는)
본문 : 로마서 4:1-12 (1-8)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죄책감이 없으면 좋을 텐데, 죄책감 때문에 인생이 힘이 듭니다.
죄책감이 뭐에요?
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인데,
나는 죄에 책임이 있다는 것인데,
이런 과중한 책임감,
물론, 죄책감은 건강한 감정인데,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측면에서는 건강한 것인데,
예를 들어, 돈이 없어서
돈이 없는 것 때문에 주눅 든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않은,
잘못된 죄책감인데,
세상이 주는 죄책감인데,
얼굴이 못 생겨서, 주눅이 들거나,
돈이 없어서 주눅이 들거나,
배경이 형편 없어서 주눅이 든다면,
건강하지 못한 죄책감,
세상이 주는 죄책감,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죄책감이라,
이런 죄책감을 가진 인생은, 잘 안 됩니다.
왜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고,
세상을 경외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죄책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아이들도 이런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를 못 하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외모 때문에,
여러 가지, 다른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안 믿는 것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느끼는 죄책감이 아니라,
좋은 대학 못 가면 어떡하지?
좋은 인생 못 살면 어떡하지?
내 인생 별볼일 없으면 어떡하지?
세상이 주는,
잘못된,
헛되고 헛된 죄책감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를 해방시키는 말씀인데,
거짓된 죄책감,
헛된 죄책감,
잘못된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1절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합니다.
아브라함이 별볼일 없었다.
별볼일 없었는데,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 받았다.
의롭다는 말은, 고발 고소를 받은 사람이, 무죄 선고를 받는 것을 의롭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발 고소를 받았어요.
고소를 당했어요.
이거 큰 손해를 보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에요?
재판관이 갑자기 무죄를 선고하는 것입니다.
와, 드디어 해방이다.
드디어 끝이다.
이게 뭐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 받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세요.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수사적 질문을 하는데,
없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얻은 것은 없다. 라는 것이죠.
바울은, 의도적으로 창세기, 15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의로운 행동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유대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태어나서 3살 때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3살 이야기가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분열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내세울 게 있다.
자랑할 게 있다.
이렇게 하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죠.
여러분, 세상은 원래 공로주의입니다.
내가 이것을 하였다. 저것을 하였다.
자랑하는 게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경외하는 사람은, 세상이 말하는 죄책감을 가지는 것이죠.
내가 돈을 벌었다. 많이 벌었다.
내가 얼굴이 예쁘다. 내가 잘 생겼다.
공로주의죠.
자랑하고, 이렇게 해서 급을 나누고, 등급을 나누는 거죠.
이게 분열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두려워하면,
잘못된 죄책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왜 돈을 못 벌지?
나는 왜 못생겼지?
나는 왜 좋은 학벌이 아니지?
이게 세상이 말하는 잘못된 죄책감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죄책감은 가져도 되지만, 잘못된 죄책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게을러서 가난하게 될 필요는 없지만, 열심히 살았음에도 가난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우리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더 중시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에요.
공부의 결과보다도,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을 더 중시해야 하는 것이죠.
물론 결과를 버릴 수는 없겠지만, 결과가 전부인 것처럼, 교육을 시키며 안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죄책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노력했는데, 수고했는데, 그 수고에 대해서 감사하고 해야 하는데,
결과만 보고, 좌절하고 죄책감 가지고 그러면,
우리 아이들 인생이 주눅 들고, 안 되는 것입니다.
*죄책감이 마케팅에도 사용이 되는데,
자기를 개선하는 느낌,
죄를 씻는 느낌,
여러분이 까페를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뭔가, 청량감, 개운감, 씻음 받은 느낌, 뭔가 새로워지는 자기 개선의 느낌 때문에 가는 것인데,
이게 뭐냐면, 속죄 행위입니다.
내 안에 뭔가 불순물,
죄책감,
더러움이 씻겨져야 할 것 같을 때,
우리는 까페를 찾거나, 여행을 가거나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속죄 행위죠.
중국 소비자의 죄책감이 수입품 선호에 미치는 영향 연구가 있습니다.
중국 소비자 대상으로,
죄책감을 가진 중국 소비자가,
수입품을 선호하는 것과,
상관관계가 있냐? 없냐?
이걸 연구한 것인데,
기본적으로, 중국 역시
소득이나 사회적 지위의 격차를 중요시하는 사회입니다.
소득이나 사회적 지위의 격차를 중요시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소득이 낮으면 죄인이죠.
사회적 지위가 낮으면 죄인이죠.
그런 잘못된 죄책감이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중국인들 역시,
내면에서 죄책감이 생겨나면,
이 죄책감을 제거하기 위해서 속죄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이죠.
중국 시장에서도 국산품보다는 서양 수입품이 훨씬 고급스럽고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수입품을 사용하는 것이,
자신의 소득 수준이나 사회적 지위의 격차를 드러내는 유용한 수단이죠.
그러므로 죄책감이 들고,
자신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중국인 소비자들은,
수입품들을 구매하여서, 자신의 내면의 부족감을 채우려고 한다는 것이죠.
이게 뭡니까?
속죄 행위인 것입니다.
죄책감을 가지면, 속죄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인데,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으니까,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보기에, 저 사람은 의인이야. 성공했어. 잘 되었어.
라고 믿게 만들 수 있는 수입품을 선호함으로써, 내면의 죄책감을 해소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옆에 거대한 쇼핑몰도 있지만,
똑같은 제품도,
시장에서 사는 것이랑, 화려하고 멋진 쇼핑몰에서 사는 것이랑, 사실 다른 것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것보다는,
뭔가 화려하고,
아름답고,
충족적인 대형 쇼핑몰 같은 장소에서 물건을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보상이죠.
속죄 행위죠.
자기 내면에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한 속죄적 행위가 거대한 쇼핑몰에서의 소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저는 경영은 잘 모르니까,
분석은 안 되는데,
똑같은 마트인데,
근처 동네마트는 잘 안 되고,
낡은 마트는 잘 안 되고,
금방 지어진 마트, 깨끗하고, 화려하고, 거대한 마트가 잘 되는 이유는,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죄책감을 씻어내고 싶은,
속죄 행위라고 정리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꾸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반복해서 고급 수입품을 사려고 하거나,
그렇게 하는 이유가 정말,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부족감이나,
불충분한 느낌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예수 때문에 자족하고 감사하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으로,
죄를 씻은 듯한 느낌을 얻기 위해서,
속죄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용서 받은 사람은, 과도한 쇼핑 행위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사람은, 밀려오는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도, 죄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죄책이 사라진 것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지어요.
죄를 지으면 죄책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시도 때도 없이, 부족감, 불충분감, 도태된 것 같은 도태감을 느끼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영, 사탄, 마귀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영향만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 우리는 잘못된 죄책감으로 우리 인생을, 속죄 하는 데에 낭비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무엇을 얻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쇼핑몰에서 쇼핑하면서 속죄를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죠.
아브라함이 만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는 강박적인 행위들,
자주 씻거나,
자주 청소하거나,
뭔가를 계속해서 생각하거나,
자주 반복해서, 무언가를 하고,
줄을 맞추고,
이런 강박적인 행위들도,
자신의 잘못된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한, 속죄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병이에요.
여러분은 이미 용서 받았고,
예수 때문에 용서 받았고,
믿음으로 용서를 받았는데,
용서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신이 잘못되었고, 문제가 있고, 틀렸고, 고쳐야 하고,
이런 생각들이 가득하다는 것은, 굉장히 문제가 있는 것이고,
지금 예수의 은혜가 가득채워진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생각으로, 여러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절에,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일을 열심히 해서, 일을 해서 돈을 받는 자에게는,
그 월급이 은혜가 아니라, 당연히 받아야 할 빚이다.
당연하죠. 내가 노력해서, 내가 일해서 받는 돈이다. 아이구,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평생, 구원 받은 느낌을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개혁주의,
종교개혁 교회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해서,
믿음을, 구원의 숟가락, 그러니까, 구원을 떠 먹는 도구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는 아니에요.
가톨릭 교회는,
믿음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구원을 떠먹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제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사제가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중보하는 중보자인 것입니다.
이게 문제죠.
그리고, 재량 공로라고 해서, 보속 행위,
그러니까 고해성사를 하든지, 착한 행위를 하든지,
뭔가 추가적으로 자기가 일을 해야, 의롭다 하심을 받는 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너 하는 거 보고,
너 일 잘 하는지 못 하는지, 그거 보고 내가 구원하든지 안하든지 할게.
이게 가톨릭이라는 것입니다.
공로주의죠.
그러니, 이단이죠.
성경이 어디 공로주의가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미국이든지 중국이든지, 유럽이든지, 어디든지 입국을 하려면,
입국 심사를 받아야 합니다.
자, 1번 손님 통과, 하면 입국되는 것이고,
2번 손님 불합격, 그러면 입국이 거절되는 것이죠.
우리가 천국에 다 입국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입국을 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입국이 불가하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은,
철저히 공로주의,
자신은 의롭다고 믿고,
세리와 창녀들은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했던,
공로주의자, 바리새인들이 가장 천국에 입국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자, 여러분,
여러분이, 죽어서,
혹은, 살아서 천국에 입국해야 될 일이 생겼는데,
어떻게 입국을 하시겠습니까?
가톨릭처럼, 사제에게 세례를 받으면 입국이 가능합니까?
아니면, 재량 공로처럼, 고해성사를 하거나, 착한 행위를 쌓거나 하면 천국에 입국이 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일을 안해도
경건하지 않은 사람,
불경한 사람,
죄인,
죄지은 사람,
죄책감이 가득한 사람,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서,
너 사탄에게 고소 고발 당했지?
그래서 너 이 재판에서 지면, 손해가 막심하지?
니 목숨을 다 팔아도, 못 갚지?
그런데 뭐에요?
그런 사람을 향하여,
땅땅, 너 무죄! 이렇게 선고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자는,
누구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믿음이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거에요.
공로주의,
자기 자랑,
내가 했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내가 사회적으로 이런 사람이다. 내가 경제적으로 이런 사람이다.
물론, 그 사람의 노력과 수고를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적어도, 교회는, 그 모든 인간의 자랑거리가 모래알처럼 작아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다.
예수가 내 자랑이요, 예수가 내 믿음이요, 예수가 내 전부다.
이게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높이고 다니는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고,
세상이 말하는, 가짜 속죄 행위를 하고 다니는 거에요.
중국 소비자들이, 죄책감이 많이 있을수록, 수입품을 선포하며, 수입품을 통해, 자신의 소득이나 사회적 지위 격차를 드러내서, 그 죄책감을 씻으려고 했던 것처럼,
아직도 자신의 행위나, 무언가를 자랑하는 사람은, 가짜 속죄 행위에 속고 있는 것이죠.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속죄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왜요?
이미 속죄를 받았는데요.
이제는 무엇을 하느냐?
세상에서 힘 없고, 연약하고, 죄 많고, 자격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이게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로마교회에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의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지니라.
서로 비판하지 말라.
서로 사랑하라.
어찌하여 네 형제를 무시하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인데.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은 이미 받은 속죄로, 연약한 사람, 죄 많은 사람을 품고 용서하며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방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신의 자랑 거리, 자신의 무언가를 드러내면서, 가짜 속죄 행위를 반복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볼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
*주기도문 :
죄책감을 덜 느껴야 하는 이유
● 과한 죄책감의 부작용
이렇게 죄책감을 잘 느끼는 사람들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이다. 죄책감은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또는 객관적인 손해를 끼치는 것과 관련된, 즉 타인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성립되는 감정이므로 감사, 사랑 등과 함께 ‘사회적’ 감정으로 분류된다.
이런 죄책감은 가급적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고 잘못을 한 후에는 ‘반성’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등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발휘한다. 하지만 문제는 죄책감이 ‘지나칠’ 때이다. 지나친 죄책감이 불러오는 부작용들이 있다.
어려운 과제를 하거나 자신감이 부족할 때 사람들은 보통 주변의 ‘도움’을 구하곤 한다. 이렇게 실제적인 도움이나 또는 정서적 지지 등 다양한 ‘사회적 지지’를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비교적 잘 헤쳐나오는 모습을 보인다 (Cohen & Wills, 1985). 예컨대 실직을 한 후에도 사회적 지지를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재취업이 빠른 경향을 보인다. 또 큰 병에 걸렸을 때도 이들은 비교적 예후가 좋은 경향을 보인다. 또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술’ 등에 의존하는 부적응적인 대처 방식도 덜 보인다.
하지만 성격 및 사회심리학지(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에 실린 한 연구에 의하면 죄책감을 잘 느껴 버릇하는 (guilty prone)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이런 사회적 지지를 덜 구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Wiltermuth & Cohen, 2014). 자신의 부족함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될까봐, 또 타인을 실망시킬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 발목을 잡을까 두려워 아예 협력을 피한다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에게 어려운 과제를 할 것이라고 알렸다. 그리고 과제를 혼자 하거나 아니면 해당 과제에 전문성을 지닌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고 알렸다. 참가자들은 어려운 과제를 혼자 할 것인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죄책감이 덜한 사람들은 과제에 자신이 없으면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반면 죄책감을 잘 느끼는 사람들은 정반대로 자신이 없을수록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 다른 실험에서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에게 파트너의 프로필을 보고 어떤 사람과 과제를 함께 할 것인지 고르도록 했다. 그 결과 죄책감이 덜한 사람들은 유능한 파트너를 고르는 반면 죄책감을 잘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감이 없을수록 능력치가 ‘낮은’ 파트너를 고르는 경향이 나타났다. 자기보다 잘 하는 파트너와 함께 하면 자신이 그 사람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되거나 그 사람을 실망시키게 될까봐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하고 만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이렇게 죄책감을 잘 느끼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프리 라이딩’을 피하려고 애쓰는 편인데, 종종 아예 그럴 ‘상황’을 통째로 피함으로써 프리 라이딩을 피하는 편이라고 한다. 즉 도움을 거절하고 협력을 마다한다. 또는 유능하지 않은 파트너를 고르는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
연구자들은 죄책감을 잘 느끼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팀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좋은 성과를 내는 경향을 보이나 스스로 특히 ‘유능한’ 사람들과 함께 일할 상황을 피하는 경향이 있어서 좋은 파트너가 될 가능성과 좋은 파트너를 만날 가능성을 놓치게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리더’가 될 능력이 충분히 있음에도 큰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경향을 보여 리더가 될 기회를 놓쳐버릴 수 있다고도 언급했다.
● 하지만 도움을 주고받는 경험은 대체로 모두에게 이롭다
혹시 사람들의 발목을 잡거나 누군가를 실망시킬 가능성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 때문에 이런 비합리적인 결정들을 내린 적은 없는지,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등의 일반적인 도움 요청에 대해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요청에 응한다는 연구들이 있었다. 도움을 요청받는다는 것은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며 자신이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기부나 봉사 활동을 통해 자존감과 행복도가 향상되는 현상 또한 같은 이유에서다. 또한 일반적으로 도움을 요청한 사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인상보다는 일을 잘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으며 유능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는 연구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이 그 사람이나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자. 사회적 지지를 주고받는 경험은 사회적 동물인 우리들에게 있어 근본적으로 ‘즐거운’ 경험이라는 점을 기억해보자.
묵상
입국심사 :
입국심사기준을 통과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죄의 나라에서, 의의 나라로 입국하였다. 그 나라 백성다운 삶을 살지 못하더라도, 입국이 취소되지는 않는다.
아직도 구원이 필요한가?
이신칭의
이방인들이 이 공동체(교회)에 구성원이 되려면 유대인들의 율법, 특히 할례의식을 행하는 일과 경제적으로 평등한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유대교에서 이단으로 몰린 교회는 먼저 데살로니가, 갈라디아에 교회를 세웠고, 이후 로마와 다른 지역으로 세워졌다.
복음의 핵심 내용은 간단하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도록 내어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었다.
로마교회는 유대인의 의식을 행하는 문제로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유대인의 대표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유대교의 전통이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였다.
유대인이나 비유대인 모두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길이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폐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는 길(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길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율법에 대한 강조는, 비유대인에게 할례를 강요함으로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할례(율법)의 범주 안에 기독교인이 될 자격(이로워지는 기준)을 만듦으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분명하게 거부하면서 믿음을 강조한다.
의 :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
믿음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충성
믿음은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율법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율법의 정신은 유대인이나 비유대인 모두를 사랑으로 환대하는 윤리적인 삶을 따르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십자가를 함께 지면서 서로 환대하고 함께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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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도구인 : 세례, 속죄성사
속죄성사 : 고해성사, 재량공로(보속 행위)
개혁자들의 도구인 : 오직 믿음
이중전가 : 예수님의 죽음 + 예수님의 삶 ---> 통해 구원받음.
전가 : 법적 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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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 법정 용어
무죄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전가 : 상거래외 회계 언어에서 유래한 용어 / 신용을 쌓지 못한 누군가의 계좌에 그가 벌지 않은 금액을 입금하는 것이다.
외부에서온 의
죄인들이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기 위해선 ‘의롭게’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이 죄사함이 우리가 칭의를 말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단순히 용서받은 것뿐 아니라, 그와 더불어 의롭게 되었다.
한때 빚으로 가득하던 우리의 계좌는 완전히 지불되고 청산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간과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빚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갚도록 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빚을 갚아주셨으므로, 은혜로우시다.
공의와 은혜(사랑)가 함께 충족된 것이다.
단어 연구
*로기조마이 : 세다, 계산하다, 여기다, 생각하다
3 믿으며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5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
----> 계산하다, 고려하다, 생각하다.
재정과 상업의 영역 - 계산하다.
-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생각, 객관적 사실을 파악하고 적용하려는 추론.
- 로마서 19번 / ‘여기다’의 의미로 9번 - 모두 로마서, 4장에서 나옴 / ‘생각하다’로 4번, 6:11 너희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로 생각하라
*죄책감 : 죄책감은 일상생활 중 개인이 사회 준칙에 따라, 내면에서 자아평가를 하면서 생기는 복잡한 감정이다.
사회 도덕 기준을 어겼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거나, 보상을 함으로써 죄책감을 완화하게끔 한다.
죄책감을 느끼는 소비자들은 ‘자기개선에 대한 보편적인 열망’에 기초하여 ‘자기개선을 실현해 줄 수 있는 제품’을 선호한다.
자기개선은 ‘사회적 지위나 신체 이미지’에 대한 개인의 속성이나 행동표현 등이 포함된다.
중국 소비자들은 수입품을 ‘사회적 지위의 표현’으로 인식함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다.
‘수입품’은 자기개선 기능을 돕고 있다.
죄책감은 ‘자신의 행동에서 오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죄책감은 ‘후회에 대한 감정’으로서 걱정, 초조 등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한다.
죄책감은 한 사람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 3가지
1) 좋지 않은 행위(예를 들어 내가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를 특정 오류로 귀결하는 사람이 더 죄책감을 느끼기 쉽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행동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2) 자신의 어떤 행동을 상상만해도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3) 죄책감은 자기자신 뿐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다른 사람이 고생하는 것을 보며, 그 사람을 혼자 고통 받게 한다는 느낌이 죄책감의 바탕이 될 수 있다.)
죄책감은 부정적이지만, 부정행위의 원인을 인정하도록 함으로써, 이를 바로잡게 하는 기능적 이점이 있다.
수치심은 ‘매우 부끄러운 마음’이고, 죄책감은 ‘잘못에 책임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따.
*죄책감과 질투
죄책감은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춰 자기 변화를 이루려는 욕구인 반면, 질투심은 ‘사회적 비교’에 초점을 맞춰 자기계발을 실현하려는 보편적인 욕구이다.
*죄책감은 하위 행위, 즉 ‘자기개선’욕구를 촉발시키는 행위이다. 죄책감은 ‘속죄’라는 목표 달성을 부추길 수 있따.
소비를 통해 스스로에게 보상한다는 매커니즘으로 죄책감을 줄이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개선 소비’
---> 그래서 낡은 제품을 쓰거나, 국산품을 쓰거나, 저가 브랜드를 사용하면, ‘죄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가 아니라, ‘소비’를 통해 구원받으려고 한다.\
중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시장 개혁으로 대다수 중국 소비자들은 외국 제품을 트렌드, 새로움, 패션과 연결짓고 있다. 중국 소비자들이 서양 제품을 사회적 지위의 표현에 사용하고 있다.
사회학적으로도 ‘소득 및 지위의 격차가 중요’한 사회에서 자신의 사회적 신분 정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분 중시 사회’
*속죄란?
죄나 속박에 대해서 값을 치르고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노예제’에서 비롯된 말이다. 빚을 갚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 수단.
두 당사자가 서로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카파르’는 숨기기 위해서 덮는다는 의미와 누군가를 덮어준다는 (누군가의 범죄나 처벌을 묻지 않는 것) 모두에서 덮는다는 개념을 전달한다.
죄의 속죄는 대부분 ‘흠 없는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이루어졌다.
신약에서는 ‘속량하다, 화해시키다’로 등장한다.
‘대속물’
‘희생 제물’
*디카이오쉬네 : 의, 올바름
3 그것이 그에게 의로
5 그의 믿음을 의로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디카이오오 : 의롭다고 하다, 의로 정하다
2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5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에르가조마이 : 일하다, 활동하다, 행하다
4 일하는 자에게는
5 일을 아니할지라도
*에르곤 : 행위, 일
2 행위로써
6 일한 것이 없이
*아브라함 : 많은 무리의 아버지
1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카타 : 아래로, 밑에, 따라서, 맞서
1 육신으로
2 은혜로
4 보수로
*마카리오스 : 복된, 행복한, 행운의
6 복에 대하여
7 복이 있고
8 복이 있도다
*피스튜오 / 피스티스 : 믿다, 맡기다 / 믿음
3 하나님을 믿으매
5 믿는 자에게는
5 그의 믿음을
주석
바울은 유대인들의 ‘아브라함 이미지’를 뒤집고 있다.
인간 앞에서의 자랑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랑과 분리될 수 없다. (3:27-31)
인간관계에서는 행위에 대한 대가가 기대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에는 문제가 완전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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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스마엘과 에돔인의 조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육신으로도 아브라함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아버지이다.
바울은 바리새인들의 교리를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반대자들이 아브라함의 예를 즉시 인용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유대교사들은 아브라함이 3살때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아브라함이 상급을 약속 받은 날(15장)과 할례를 받은 날(17장) 사이에는, 14년의 간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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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
1 그러므로 무엇인가?, 우리가 휴리스코(찾다, 만나다 / 완료)했다고 말할 것인가?(미래), 우리의 프로파트로(조상, 선주) 아브라함(많은 무리의 아버지)가, 사륵스(몸, 육체)를 따라서,
*사륵스 : 로마서에서 사륵스?
2 만약에 아브라함이 에르곤(행위, 행실, 일)들로부터 디카이오오(의롭다고 하다, 공의를 보이다, 의로 정하다 / 과거 수동태)받았다면, 그는 카우케마(자랑)할 것을 에코(가지다)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니다.
*에르곤 :
*디카이오오 : 로마서에서 디카이오오?
*만약에 아브라함이 행실들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면, 그는 자랑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3 무엇, 그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었다, 그 하나님을, 그리고 그것이 로기조마이(세다, 계산하다, 여기다, 생각하다 / 수동태)되어졌다, 그에게 디카이오쉬네(의, 올바름)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1)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2) 그것이 그에게 의로움으로 생각되어졌다.
4 그러나 아르가조마이(일하다, 활동하다, 행하다 / 분사)하는 자에게는, 그 미쏘스(품삯, 보수, 상)이 카리스(은혜)에 따른 것으로 로기조마이(생각하다 / 수동태)되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오페일레마(빚, 의무)에 따른 것으로.
*일하는 자에게는, 그 품삯이 은혜에 따른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일한 것의 빚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로기조마이가 반복된다.
1)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생각하셨다.
2) 아브라함은 그 상을 은혜에 따른 것으로 생각하였다.
---> 이것이 건강한 대신관계이다.
5 그러나 에르가조마이(일하다)하지 않는 자, 그러나 믿는 자, 디카이오오(의롭다고 하다)하는 분을, 아세베스(경건하지 않은) 자를, 그의 피스티스(믿음)을 로기조마이(생각하다)하신다, 디카이오쉬네로,
*일하지 않는 자이지만,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을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여기신다.
*아세베스 :
6 그와 같이, 다윗이 말한, 그 사람의 그 마카리스모스(복)에 대하여, 하나님이 로기조마이(생각하다)하시는 것, 에르곤(행위)없이 의로움으로,
*행위 없이도 하나님이 의로움으로 여기시는 그 사람의 그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것처럼.
7 마카리오스(복된, 행운의, 행복한)하다!, 그 오노미아(불법적 행동)들이 용서되었고(부정과거), 그 하마르티아(죄, 불법)들이 에피칼륍토(가리다, 덮다 / 수동태)되어진 자들은,
*모두 ‘부정과거’다.
1) 불법적 행동들이 용서되었다.
2) 죄들이 가려졌다.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복되다!
8 마카리오스(복된)하다!, 그 사람은, 로기조마이(계산하다, 세다, 생각하다)하지 않으실, 주님께서, 그 죄를.
*마카리오스 x2 (7절, 8절)
*주님이 그 죄를 세지 않는 그 사람이 복되다!
9 그러므로 이 마카리스모스(복)이, 페리토메(할례)이냐, 또는 아크로뷔스티아(무할례)이냐, 우리가 말한다, 과연 로기조마이(생각하다)되어졌다, 그 아브라함의 그 믿음이, 의로움으로,
*이 복이 할례이냐, 무할례이냐?
*우리가 말하기를, 과연 아브라함의 그 믿음이 의로 생각되어졌다고 한다.
10 그러므로 어떻게 로기조마이 되어졌느냐? 할례냐 또는 무할례냐, 할례가 아니라 도리어 무할례이다.
*어떻게 계산된 것인가?
*할례가 아니라 무할례 때 계산된 것이다.
11 그가 할례의 세메이온(표, 표적, 표시)을 람바노(취하다, 얻다)하였다, 의로움을 도장 찍은 것이다, 무할례시에 그 믿음으로. 그가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무할례를 통하여. 로기조마이(계산하다, 생각하다)되려고, 그들도 의로움으로,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로워진 것을 도장 찍은 것이다.
그가 무할례를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어서,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을 수 있도록.
12 그리고 할례의 아버지이다, 다만 할례로부터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의 그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무할례자로서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또한 할례자의 아버지도 되었다. 그래서할례자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동일한 한 아버지를 모시는 것이다. 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다.
로마서 5장 개요
5-8장의 핵심적 주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는 미래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5:1-11 소망의 확실성
-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들은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가지며 심판의 날에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덕분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것임을 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의 객관적인 법적 지위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지 않는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이건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이다.
구원 받은 자는 ‘완전한 구원’, 즉 영화롭게 될 그 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현재의 시련이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그리스도와 닮게 만드는 점진적 변화를 낳기에 기뻐한다.
로마서 5장 주석
자기 아들을 죽음에 넘겨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의 행위는, 동시에 그리스도 자신의 자기 포기의 행위이기도 하다.
바울은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열거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둘째, 우리는 환난 중에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