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자랑 Ⅰ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56 views
Notes
Transcript
갈라디아서 6:14 NKRV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얼마전 한 청년을 심방하면서 겪었던 일입니다. 청년부 예배로 초대하고 싶은 청년이 있어서 그 친구와 충대 근처에 있는 해프닝이라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혹시 여기 가본 사람이 있나요? 몇몇 청년들은 저와 함께 여기서 식사를 했던 기억이 날텐데요, 해프닝은 분위기가 괜찮고 뇨끼가 맛있기로 유명한 집입니다.
(건물과 음식 PPT)
아무튼 뇨끼와 파스타를 하나씩 시키고 음식이 나왔는데, 그거 알죠? 그런 감성돋는 맛집을 가면 꼭 사진 찍어서 인스타에 올리는 사람이 있는거. 심방했던 청년이 딱 그런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가 사진을 다 찍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가 음식을 먹었습니다. 요새 워낙 그런 사람이 많고, 제 여자친구도 딱 그런 스타일이기 때문에 이제는 익숙합니다.
어쨋든 SNS에 이런 사진들이 넘쳐납니다. 맛있는 음식, 분위기 좋은 카페, 유명한 관광지 등 너도나도 자신의 경험을 자랑하는 피드들을 SNS에 열심히 올리지요. 좋은 것을 보면 알려주고 싶기도 하고 은근히 자랑하고 싶기도 한게 사람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소수의 파워블로거들이나 블로그에 글을 써서 공유를 했었는데, 이제는 남녀노소 할거 없이 누구나 다 피드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자랑합니다. 터치 몇 번이면 내가 올리고 싶은 글이 올라갈 만큼 쉽고 간편해진 덕분입니다. 바야흐로 우리는 지금 전국민 대자랑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사람은 왜 자기 경험을 자랑하고 싶어 할까요? 인간의 기본욕구를 분석한 사 중에 심리학자 매슬로우와 기업가 토니 슈워츠가 있습니다. 매슬로우라는 사람은 교양 시간에 한 번쯤은 듣게 되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죠?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핵심만 말하자면, 매슬로우와 토니 슈워츠 둘 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5단계의 욕구가 있고, 하위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면 점차 상위 단계의 욕구를 충족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피라미드 PPT)
여기 매슬로우와 토니 슈워츠가 말하는 욕구의 5단계를 도표로 나타낸 것이 있습니다. 이중 왼쪽이 토니 슈워츠, 오른쪽이 매슬로우가 말하는 욕구의 단계인데요, 각기 위에서 3번째 단계와 2번째 단계를 주목해 봅시다. 안전욕구와 존경의 욕구는 모두 타인들에게 자신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과 관련된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고 과시를 하지요. 곧 자랑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이자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SNS에 그토록 많은 자랑과 과시가 가득했던 것이 이제서야 이해가 갑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습성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참 맛집 사진과 갬성 사진들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한가지 재미있는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인스타그램을 한다면 어떤 피드를 올릴까요? 사람들이 바울의 계정을 눌러 들어가 피드들을 쭈욱 훑어 본다면,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요? 한번쯤 해볼 수 있는 신박한 상상 같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자랑하는 사람인가?”하는 질문 말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번 묻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자랑하는 사람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차근차근 살펴가보도록 합시다. 이 한 절에 담긴 심오한 뜻을 다 살피는데 앞으로 몇주가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제 능력이 닿는데까지 정말 충실하게 다루어보려고 하니,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더욱 십자가를 단단히 붙드는 그리스도인 다움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해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갈라디아서에 담긴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본래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보낸 편지였는데, 갈라디아 지역이 어디일까요? 지도를 통해 한 번 살펴봅시다. (지도 PPT)
갈라디아는 유럽에서 이주한 갈리아 족 (Gaul)의 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후에 로마 제국이 이 땅을 정복하고 로마의 한 주(州)에 편입시켰으며(A.D. 25년경), 일찍부터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살아가던 곳입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이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유대인들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한 바가 있지요. 사도행전의 기록들을 잠시 기억해봅시다. 사도행전 13장과 14장에 걸쳐 당시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쫓겨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이고니온으로 사역지를 옮겨야 했으며(행 13:45, 50),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급히 루스드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행 14:5–6). 급기야 루스드라에서는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쫓아온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성밖에 버려지기까지 하였구요(행 14:19).
사도행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 갈라디아 지방은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강했고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 역시 개종한 유대인들의 입김이 강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어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헛된 복음-다른 복음을 전하는 유대인 교사들이 갈라디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분노하며 급히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곳곳에는 바울의 격정에 찬 메세지들이 담겨 있습니다. 몇 부분만 한 번 같이 확인해볼까요?
갈라디아서 1:6–10 (NKRV)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 3:1 (NKRV)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라디아서 4:9 (NKRV)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갈라디아서 4:20 (NKRV)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유대교 출신 교사들의 미혹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지키기 위해 이 편지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부분은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 다시 말하며 정리를 하고 있는 부분이지요. 갈라디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참 진리와 원리가 무엇인지 다시 상기시키고 있는 부분이다 이말입니다.
바울이 선포하는 기독교 신앙의 참 진리와 원리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 말을 6장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갈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어떻게 해야 성령을 위해 심고 영생을 거둘 수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고 영원한 기쁨과 축복의 세상으로 들어가게 합니까? 무엇이 오늘도 우리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합니까? 여러분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바울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을 봅시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기독교 신앙의 참 진리이며 원리라 강조하기 위해서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갈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이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1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진수다! 진리 중의 진리이며, 원리 중의 원리이다! 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높이 들어올립니다. 맞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야 말로 복음의 핵심이자,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모든 사도들이 함께 그들의 목숨까지 다해 전한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였고, 지난 수천 년 동안 교회가 고이 간직해온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저주와 진노를 받으시고 처참하게 피흘리며 죽으신 바로 그 십자가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단순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핵심이자 정수입니다! 하며 말하지 않았습니다. 14절을 다시 한 번 들여다봅시다. 바울이 무엇이라 말하였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 앞에서 발가벗겨지고 고꾸라집니다. 사실은 믿음이 없는 자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가 다 그렇게 됩니다. 일종의 참된 그리스도인을 가리는 시금석과 같은 말씀이지요. 바울처럼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고백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는가?에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가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거치는 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얘기한 바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중립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모든 인간을 구분하고 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대적하는 것이 된다든지, 아니면 우리가 자랑삼아 말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뛰어난 것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맞습니다. 대적이 아니면 자랑, 오직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치는 돌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벧전 2:6-8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또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누군가에게는 가장 귀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장 쓸모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누군가에게는 구원의 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자 미련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히 믿기지 않고 그닥 귀해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혐오와 적대감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고 헬라인들에게 버림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도들이 핍박을 겪고 순교를 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진행되어오는 내내 동일하게 되풀이 되어온 문제입니다. 오늘날에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람들에게 혐오와 적대감을 일으키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피 냄새가 진동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며, 인간의 죄악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 나오는 것이 보이십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못 박히신 손과 발에서, 채찍질을 당하신 등에서, 가시면류관으로 짓눌리신 이마에서 계속해서 피가 흘러 나옵니다. 피가 고여 웅덩이를 이룰만큼요. 그것뿐입니까? 마침내 로마 병사의 창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꿰뚫자 물이 섞인 피가 뿜어져 나옵니다. 마치 한 편의 잔인한 느와르 같지 않습니까? 혹자는 이야기합니다. “신이라면 굳이 이런 잔인하고 참혹한 광경을 벌이지 않고서도 죄를 용서할 수 있지 않습니까? 너무 미개하고 잔인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판사가 죄의 죄질과 정도에 따라 상응하는 형벌을 정할 수 있습니다. 보통 양형기준이라는게 있어서 판사들은 이걸 참고해서 징역을 선고하지요. 보통 동기의 살인은 10년에서 16년, 천만원에서 삼천만원 까지의 뇌물수수는 1년에서 3년, 일반 강간은 2년 6개월에서 5년, 일반 강도는 2년에서 4년 이런 식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에는 이런 형법이 있는데, 이것들이 나타내는 바가 무엇입니까? 죄에는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며, 죄인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죄질과 정도에 따라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대한민국에 헌법이 있듯이 하나님의 세계에도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인간, 온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에게 하나님의 법을 세우시고 가르치셨지요. 창 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사실 아담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최초의 명령 안에 모든 계명과 율법이 다 담겨 있었습니다. 설명이 필요한 내용이라 오늘은 간략하게 언급만 할텐데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리신 명령의 골자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선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악입니다. 자세한 계명과 율법으로 나타나지는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할 수 있었던 능력이 있었습니다. 아담의 지성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잘 분별할 수 있는 온전한 지성이었고, 아담의 감정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함께 미워하는 온전한 감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의지는 감정과 지성이 가리키는 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거절하는 온전한 의지였지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그 댓가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분명 죽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과하다 생각이 드십니까? 형벌은 죄의 죄질과 정도에 상응해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럼 생각해봅시다.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죄는 얼마만큼의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영원한 저주와 고통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이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계 20:11-15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말은 곧 창조 이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변하지 않으셨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죄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그저 죄를 눈감아 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죄에 대해서는 일말의 주저함도 자비도 없이 응징하시는 하나님을 보이시지요. 모든 사람이 심판 이후 받아야 할 자기 죄에 대한 형벌을 처참하고 참혹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인간은 부패하였다. 인간에게는 심판을 이길 만한 자격이 없다. 그 어떤 사상과 철학과 종교로 포장하여도 결국 모두가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운명이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 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10:1-4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바울은 왜 십자가를 자랑했는가?
십자가에서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다. 공의와 자비, 이 둘을 동시에 이루시는 지혜가 나타나며, 이것을 영원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나타난다.
십자가보다 더욱 놀라운 것이 무엇인가? 십자가보다 더욱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 십자가보다 더욱 자랑할 것이 무엇인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