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09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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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79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본문 출 15:1-18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거룩한 주일을 허락하시고, 이 새벽부터 주님 앞에 나아와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주님을 높여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베푸시는 크신 은혜를 묵상하며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게 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날마다 찬양의 능력들을 경험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꿈꾸던 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후 440년이 흘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애굽 땅에 머물던 이스라엘은 수십수백만명에 이르렀고, 이를 경계하던 애굽은 이스라엘을 굴복시켜 자신들의 노예로 삼아버렸다. 온갖 착취와 억압 속에서 이스라엘은 고통 중에 울부짖기 시작했고,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과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셨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모세를 지도자로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여러 재앙을 애굽 땅에 내리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되심을 나타내셨지만, 완악해진 바로는 이스라엘을 내보내주지 않았다. 마침내 10번째 재앙인 장자죽음의 재앙을 통해서야 비로소 바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가도록 허락했다. 그런데 바로는 이스라엘이 나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변심하여 군대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잡아오게 한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모든 것이 다 잘 풀린 줄 알았다. 이제 행복만이 남은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말 달리는 소리와 군대들의 이동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애굽의 온갖 병거들이 바짝 추격해오고 있다. 붙잡히면 죽거나 노예로 잡혀가서 이전보다 더욱 심한 고생을 하게 될 것이 불보듯이 뻔하다. 그렇다고 양 옆과 바로 앞은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다. 물에 빠져 죽든지 애굽에서 노예로 죽든지 둘중 하나 밖에 없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던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눈 앞의 홍해바다를 반으로 가르셨다. 그리고 마른 땅을 내게 하시사 그 땅을 건너게 하신다. 이스라엘이 채 건너기도 전에 애굽 병사들도 홍해의 마른 바닥을 건너 추격해 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시야를 가리셔서 추격속도를 더디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다 건너자마자 다시 홍해를 하나로 합치심으로 추격해오던 애굽의 온 군대가 물에 수장되었다. 아주 놀라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역사를 경험한 자들이 하나님께 기쁨의 찬양을 올려드리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1절을 보니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라고 말씀한다. 그들이 왜 노래했는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구원에 감격스러운 나머지 순간적으로 터져나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때에’ 노래 했다고 말하는데, 그 때란 14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이적을 베푸신 그 때를 가리킨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이집트의 군대를 홍해에서 모조리 몰살시킨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체험하고,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감격스러운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그들은 어떠한 내용을 노래하고 있는가? 2절을 함께 읽어보자.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기 보면 ‘여호와는 나의 힘’ 그리고 ‘나의 구원’ 이라고 노래한다. 방금 읽은 2절의 고백, 즉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 가운데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다 들어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라는 칭호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계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혜를 받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됨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또한 ‘나의 구원이시로다’라고 고백함으로서 그들의 생명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며, 또한 그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함으로서 내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내 아버지의 하나님’ 이라는 고백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바로 자신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 고백문들을 천천히 묵상하다보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체는 모세와 이스라엘 회중이다. 그들은 입으로 여호와를 고백하고 노래한다. 그러나 그 고백과 노래를 일으키시는 분, 찬양을 일으키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어째서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라고 노래할 수 있는가? 무엇 때문에 그들이 여호와를 나의 구원이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타난 그들의 감격스러운 고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한 필연적인 반응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의 감격적인 찬양은 사실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베풀어주시고, 그에 대한 합당한 반응으로서 우리는 기쁨의 찬양, 감사의 찬양, 확신의 찬양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찬양은 내 영혼이 형통할 때에만 터져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성공의 길을 걸을 때에만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푸른 초장과도 같은 길을 걸을 때도 있지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도 있다. 분명한 것은 어느 길에서나 최고로 선하신 목자,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분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시며, 날마다 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가신다는 것이다. 인생의 괴로운 순간들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우리를 붙들고 계신 주의 손이 우리를 놓으신 것이 아니기에 찬양은 멈출 수 없다. 괴로운 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기에 주님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모세와 이스라엘이 지금 감격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그들의 신앙고백에서 비롯되었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의 찬양 역시도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4절에서 여호와께서 바로의 병거와 군대를 바다에 던지신 것처럼 우릴 집요하게 붙들고 있었던 마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해방시키셨음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6절에서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신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충만히 나타내셨음을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사건인지를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들의 눈에 생생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목격하면서, 그분의 위대하심과 영광스러움을 노래하고, 그분이 베푸신 구원을 심히 감격해 하는 그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라. 거대한 바다가 갈라져서 마른 땅을 건너고, 그 뒤로 추격해오던 애굽의 병사들이 홍해 바다에 수장된 이 놀라운 일들이 눈앞에서 펼쳐졌다고 생각해보라. 그들이 과연 얼마나 감격하며 하나님을 기뻐했을까?
그런데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입었던 모세도, 이스라엘도 결국은 죽었다. 그들의 구원은 일시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는 시간과 환경을 초월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는 영원하다. 그 일시적인 구원의 은혜를 누렸던 이스라엘도 넘치는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송했거늘, 오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저와 여러분들은 얼마나 뜨겁게 하나님을 노래해야 하겠는가?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의 권위에 의지하여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도전한다.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구원을 어떻게 인식하며 살아가는가? 십자가 복음 앞에 나의 죄성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았을 때,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분의 위대하심과 영광스러움을 생생하게 느낀 적이 있는가? 이전의 무시무시했던 저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감격해 하며,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앞에 압도되어 본 적이 있는가? 그분의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깨닫고는 찬송하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하던 때가 있는가? 물론 사람마다 구원이 임했을 때의 반응은 다양하다. 예수를 영접하는 계기도 다양하다. 그럴지라도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그 측량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하나의 실제적인 사건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우신 사랑이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지속적으로 부어지고 있음을 날마다 깨닫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위대하신 사랑이 우리의 어떠함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며 찬송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16절의 표현대로, 우리는 주께서 사신 백성이다. 그리스도의 피값을 주고 사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이 사실을 믿으시는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얼마나 가치가 있고, 위대한지 깨달아 감격해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자가 마땅히 보일 반응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이다. 내 모든 것들을 온전히 쏟아부어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위엄과 영광과 자비하심과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여러분의 삶으로, 여러분의 예배로,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과 시간들을 통하여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시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하자.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자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행할 것은 그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늘 우리의 입술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이 멈추지 않게 하시고, 늘 기쁨과 감격 속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높여드리는 우리만 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