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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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교회 성도님, ‘요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 이미지, 단어는 무엇입니까?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많이 받은 아들, 채색옷, 형들의 미움을 받은 동생, 애굽의 종, 총리, 꿈 등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중 요셉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꿈’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주 붙는 수식어가 ‘꿈꾸는 사람’, ‘꿈쟁이’, ‘꿈의 사람’입니다. 성경은 요셉을 분명히 ‘꿈꾸는 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 당시 성경에서 말하는 ‘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셉 당시 성경에서 말하는 꿈은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입니다. 즉 꿈은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는 방법으로 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꿈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단순히 ‘희망’이나 ‘소망’의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시킵니다. 요셉에게 ‘비전의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 요셉의 비전이 결국 애굽 나라에서 총리가 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우리도 총리와 같은 꿈을 꾸고 그런 기도를 합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우리는 인생의 큰 굴곡 없이 평탄하게 총리로서의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나도 총리, 내 자녀도 총리, 내 손주들도 총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총리’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디에 사용하기 위하여 총리가 되게 하셨는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이야기 후반부를 보면 그가 형들에게 “이스라엘 열두 형제와 그 가문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에 보내어 총리가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나라가 ‘보전’ 되어 그 후손들을 통해 오실 그리스도의 길이 막히지 않게 하는 일을 위해 자신이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요셉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보전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나라의 보전을 통해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애굽 총리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 길을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요셉 이야기의 목적은 믿음의 사람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상속자인 이스라엘 가족들을 보존하고, 세상을 위한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요셉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애굽의 총리가 된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요셉의 이야기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큰 그림을 생각하시면서 그림의 한 부분인 요셉의 인생사를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성공을 함께 보겠습니다. 서론이 조금 길었습니다. 혹시나 요셉의 개인적인 삶, 특히 그의 성공에 대한 부분에만 집중하다가 자칫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큰 숲을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듯이 요셉의 삶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그가 애굽의 총리(나라의 2인자)가 된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이방 나라 총리의 자리에 올려놓으신 이유가 분명히 있었음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것을 뒤로하고 요셉은 인간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아주 성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높은 지위와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도님들께서 잘 아시는 것처럼 요셉의 삶이 항상 승승장구한 것은 아닙니다. 왕 앞에 서기 전만해도 옥에 갇혀 있는 신세였습니다. 그는 소위 롤러코스터를 탄 듯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을 잘 아시겠지만, 정리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신 지 얼마 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편견도 없이 요셉의 삶을 공감해 보시고 성도님들의 삶과 비교도 한번 해 보시면 더욱 와 닿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는 자신이 요셉이라 생각하시고 삶을 되짚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에게서 났고, 그것도 노년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요셉을 더 깊이 사랑했습니다. 편애했습니다. 이로 인해 형들의 시기를 받아 죽음의 위기도 맞았었고, 낯선 땅 애굽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애굽의 친위대장(대통령 경호실장/비서실장) 보디발 집에서 주인 다음가는 실세가 됩니다. 이제는 형통한 삶이 계속해서 이어지나 했지만, 보디발 아내의 유혹으로 인해 오해를 사게 되고 무고히 옥에 갇힙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심과 그의 신실한 삶을 통해 주위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특히 옥에서 떡 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 해석이 기회가 되어 애굽 왕의 꿈까지 해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꿈 해석에만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대안까지 제시합니다. 마침내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발탁됩니다. 함께 봉독한 본문 첫 구절(37절)을 보시면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란 말씀이 나옵니다. 꿈 해석과 함께 그들에게 제시한 대안이 왕과 모든 신하들에게 좋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에 어느 정도 공감이 되십니까? 간략하게 말씀드렸지만 요셉의 인생 가운데 13년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요셉이 가나안 땅에서 처음 등장할 때에 그의 나이가 17세였습니다. 현재 그의 나이를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46절 상반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지금 요셉의 나이는 30세입니다. 우리 청년들 요셉이 아주 부럽죠?^^ 30세에 강대국 이집트의 2인자가 되었으니까요.
이렇게 요셉의 나이가 기록된 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때는 주전 1876년입니다. 출애굽 430년 전으로 이스라엘이 얼마 동안 애굽에 있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 동안 요셉을 훈련하시고 인도하셨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로 팔려 와서 보디발의 집에서 수년을 봉사하였고, 감옥살이를 거쳐 영광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13년이 경과했습니다. 이 기간이 요셉 편에서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참기 힘들었겠습니까? 성도님들의 삶과 요셉의 삶을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지금 성도님들의 삶은 어떠십니까? 또는 ‘내가 요셉이었다면...’ 이런 생각을 해 보시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그는 분명 고생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요셉은 고생한 것에 비해 빨리 성공했습니다. 30세에 총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외가인 하란으로 도망쳤을 때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약 77세가 됩니다. 그 나이에 형을 피해 도망도 갔고, 외삼촌을 위해 20년 넘게 고생도 합니다. 청년 요셉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그 당시에는 소위 죽도록 힘들었겠지만... 실제 형들에 의해 죽을 뻔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에게 힘들었던 세월은 지나가고 초고속 승진을 합니다. 성경은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라고 말합니다. 총리의 정년이 없다는 가정하에 요셉은 30세에 총리가 되어 80년간 그 자리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고난이 짧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성공한 이후의 삶이 훨씬 더 길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사를 보면 요셉은 13년간 고생했고, 80년간 영화를 누렸습니다.
요셉의 인생 그래프를 보면 이렇습니다. 굴곡이 있었지만, 단순하게 표현하면 13년 동안은 하향, 이후 80년은 상향입니다. 성도님들의 인생 그래프는 어떻습니까? 지금 하향이십니까? 상향이십니까? 예배당에서 혹은 온라인으로 함께 예배를 드리시는 성도님들! 우리의 생각을 조금 달리해서 믿음의 눈으로 요셉의 인생 그래프를 다시 보겠습니다. 요셉이 13년간 고생한 부분을 이 세상에서의 삶, 80년간 영화를 누린 것을 이 세상 이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생을 한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고생은 잠깐이고 천국에서 누릴 영화는 영원할 것입니다. 다 함께 로마서 8장 18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과 함께 우리 삶의 모든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은 원어상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가치에 있어서 한참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위대하고 가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활의 몸, 신령한 몸을 입을 때에는 모든 연약함에서 벗어나 영광스런 자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날을 기대합니다! 이날을 소망합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자신의 인생 그래프 마지막을 어디까지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 세상의 삶까지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까지 그래프가 연장되어 있습니까? 성도님들께서 잘 아시는 것처럼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입니다. 그리고 15장은 부활장인데요 다 함께 고린도전서 15장 19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아멘! 성경 말씀 그대로 여기에 모인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총리라 하더라도, 좋은 직장을 가져도, 재물을 많이 가졌어도, 건강해도, 우리의 자녀들이 잘 되어도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 행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기에 오늘 예배의 자리로 나오신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로 결단하신 줄 압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성공과 돈이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생명도 육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맡길 수 있는 분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한 기도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살면서 우리 인생을 맡길 수 있는 분을 만난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행복한교회 성도님! 우리는 우리의 본향이 어딘지 아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여행의 마지막이 어딘지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들지? 행복하지 않지? 이렇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무슨 여행을 하고 있는지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이유를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고난도 만나고, 약함도 만나고, 질병도 만납니다. 그럴 때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나?’란 의문을 품습니다. 도대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여행은 무엇을 위한 여행이겠습니까? 재물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온 여행은 아닙니다. 재물은 우리를 다 떠납니다. 건강을 위한 여행도 아닙니다. 건강도 다 지나갑니다. 이 여행의 목적을 안다면 우리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원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렇게 기도할 따름입니다.
살면서 겪는 고난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재앙으로 여겨질지라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다면,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면 그것으로 인해 나에게는 행복한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행하는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많이 경험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라에 행복한 모습으로 내 영혼을 다 내어 맡기고 ‘이제 주님께 들어갑니다!’라고 즐겁게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 여행으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죽음이 분명한 것처럼 죽음 이후의 세상이 분명하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나의 고난과 시련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게 한다는 그런 믿음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요셉은 자신이 이방으로 팔리고,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생활하고, 억울하게 옥살이 하는 등 13년 동안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통 가운데서 절망하며 눈물을 흘린 날은 없었겠습니까? 힘든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서도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꿈, 말씀만은 품고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루하루를 견디며 보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요셉처럼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옵소서. 경험하게 하시옵소서.
성도님들께서 잘 아시고, 이미 경험하고 계신 것처럼 우리들의 여행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몸을 입는 순간부터 시간, 공간의 제약을 받아서 때때로 질병이 찾아오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고난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는 갈등도 만납니다. 이처럼 몸을 입는 순간부터 우리는 제한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제한을 받기 때문에, 한계 속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성숙할 수 있습니다. 어둠을 만나면서 빛의 영광을 찬송합니다. 물질의 어려움을 만나면서 진정한 보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질병을 만나면서 내 생명의 주인을 만납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내가 천국에서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임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에 합당한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때때로 남이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를 빚어가십니다. 요셉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그를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깔맞춤으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의 이런 믿음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하다보면 마지막 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내 영혼을 아버지께 내어 맡깁니다.’라고 아버지 손에 부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특별하게 잘한 행위 때문에 확신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의 모든 비밀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천국은 이렇게 이루어질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사람 또한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할 뿐입니다. 천국에 기쁨으로 들어가는 것, 즉 나의 마지막 순간에 두렵지 않고 평안하게 들어갈 수 있는 그 길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하나님 나를 평생 사랑하셨군요. 저는 저의 힘으로 제가 살아온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 안에 지내온 것을 다시 확인하고, 이제 이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나를 지키시고 계심을 믿으며 그분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죽음일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이 순간을 다 맞닥뜨립니다. 똑같이 죽음이 찾아옵니다. 잘살았던 사람도, 못살았던 사람도, 유명한 사람도, 무명한 사람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도, 만나지 못한 사람도 다 죽음 앞에 서게 됩니다. 이날이 우리에게 기쁨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최고 즐거움의 날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위해서 지금 만들어지고 빚어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누리고 배우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다 썩어질 것들입니다. 썩어질 것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바꾸어 가는 것, 즉 성도들과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사귐을 미리 알아가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기뻐하는 삶을 알아가고, 찬송을 통해서 내 안에 하나님의 즐거움이 있게 하는 것을 알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방향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이 있어서 우리는 늘 소중합니다. 마지막 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진정으로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이 있기 때문에 그 순간에 합당하도록 우리는 빚어져가고,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철따라 맺는 열매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철에 따라 복숭아도 먹고, 사과도 먹고, 배도 먹고, 감도 먹고... 농사를 짓는 농부가 땀을 흘려 물을 주고, 거름을 주기도 하는 이유는 꽃을 위해서도 아니고, 잎사귀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열매 때문에 그렇게 수고와 노력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기도 하고, 건강을 주시기도 하고, 생명을 주시기도 하고 다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함도 아니고, 단순히 돈을 주시기 위함도 아닙니다. 또한 그런 것을 통해 단순히 세상에서 인정받고, 영광받고, 사랑받고, 존경받고 살게 하심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모든 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영광을 얻든 잃어버리든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야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농부가 얻고자 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씨앗이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것. 예수님의 비유 중 많은 부분의 바탕이 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씨앗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점점 자라갑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겉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속까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 땅에 우리는 하나님을 몸으로 경험하기 위해 왔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빚어져 가야합니다. 지금 세상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가고 계십니까? 나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날 준비로 잘 단장되어 가고 있습니까? 혹시 여전히 세상에만 머물러 계십니까?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십니까? 내가 가진 어떤 것도 내 존재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맡길 수는 있지만 거기에 내 영혼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내 생계를 직장에 맡길 수는 있지만 내 영혼은 거기에 맡길 일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내 영혼을 맡길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것들은 내 영혼을 그분께 내어 맡길 수 있을 만큼 크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 땅에서도 조금씩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울러 천국에 들어가는 준비를 합니다. 성수주일, 즉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킴으로 천국에서의 안식을 미리 경험하며 준비합니다. 주일에 잠시 나의 일을 멈춰도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지시고, 지키심을 경험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가도 주님의 날에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배자이기 때문에 세상의 일을 잠시 내려놓으시고 예배당으로 나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은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지만,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세상과 구별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지켜나갈 수 있기 원합니다. 또한 나에게 주신 모든 시간, 물질, 건강이 전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하나님의 것임을 신앙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만약 그날이 주일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잠시만요. 일 조금만 더 하다가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실 것입니까? 행복한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이 땅에서부터 예배의 즐거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주님의 날에 그 즐거움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몸을 위해서 음식을 가려서 먹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을 위해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하신 예수님을 먹기 원합니다. 말씀을 먹기 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셉이 고생했던 13년은 그가 영화를 누렸던 80년에 비하면 상당히 짧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지낼 시간을 생각하면 이 땅에서의 우리 삶도 매우 짧습니다. 잠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90편은 모세의 시편인데요 10절을 보시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수고와 슬픔뿐이라 할지라도 신속히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영화는 영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현재 누리는 것들이 전부 다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행복한교회 성도님들, 함께 손을 잡고 본향을 향해 걸어갑시다!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는 아삽의 고백이 오늘 저희들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 인생을 맡길 수 있는 분,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니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저희들에게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저희들이 하나님의 크신 뜻과 계획을 알 수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려고도 했었습니다.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고, 그런 행복을 얻기 위해 정처 없이 다니며 방황했습니다. 이런 저희들의 모습을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다시금 하나님 아버지 앞에, 말씀 앞에 나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옵소서. 이 세상에서 여행하는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임마누엘 하나님과 동행하며 길 잃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마침내 본향에 이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저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