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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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 남은 백성과 그 땅의 백성
성경 : 느9:38, 10:28-29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카톡은 일상과 소통의 중심이 되어 있다. 그곳에서 많은 이야기와 마음이 오고 간다. 그 카톡을 보면 일명 ‘프사’ 프로필 사진이 있고, ‘인삿말’이 공간이 있다. 그곳에 제가 프사에 연꽃을 올려놓는다면, 인사말에 ‘연꽃에 내 마음을 빼앗겼다’라고 쓴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저를 잘 아시는 분이라면 ‘목사님 눈에 연꽃이 이뻐 보였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저를 잘 모르시는 ‘목사가 왜 불교 꽃을 올렸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한국에서는 연꽃이 불교를 상징한다. 그래서 교회와 관련된 물품에 연꽃이 있다는 것은 불경하게 여긴다. 그러나 초기 로마교회 그러니까 지하교회에서 십자가와 함께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헌신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연꽃을 사용한 것을 알고 있는가. 또 이집트 초대 교회에서도 연꽃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리고 중동 지역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에서도 교회가 연꽃 이미지를 사용했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불교가 연꽃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연꽃을 독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독점을 우리 성도님들이 조금씩 찾아오시기를 바란다.
우리 믿음은 이분법적으로 다가서야 할 부분이 있지만, 이분법으로 다가서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 경계는 어렵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이해와 우리 세계관을 넘어서는 일이기에 타문화를 배워나가듯 에너지를 요구하기에 우리는 잘 하지 않는다. 이런 부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이 사도행전이다.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부분인 것이다.
우리는 일본하고는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 축구팀이나 야구나 배구도 일본과 경기를 하면 이겨야 한다. 시합에서 지면 한국에 돌아오지 못할 분위기가 된다. 저도 일본이 너무 싫다. 정신대 할머니들에게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거 괘씸하고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거 싫다. 그런데 저의 첫 선교 여행지는 일본이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위를 바라보며 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별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고 수도원을 만들어 세상을 등지는 것도 아니다. 만일 우리가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세상은 복음이 필요한 곳이다. 어떠한 죄인이든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내가 싫어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든, 친일파 후손이든, 무당이든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배제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다. 이분법적으로 그들 자체를 배제하고 심판받을 백성으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과 같은 것이다.
1. 봉인한 약속
1절 “그 인봉한 자는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제가 읽은 1절뿐 아니라 10장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9:38절 말씀을 먼저 살펴야 한다. 우리 성경은 10장이 “그 인봉한”으로 시작하지만, 히브리성경은 9:38절이 10:1절로 되어 있다. 목사님께서 가끔 설교시간에 말씀하시지만, 성경에 장,절은 사람이 나눈 것이기에 사본이나 번역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래서 우리 성경은 9장 마지막에 있지만, 10장을 이해하기에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9:38절을 한목소리로 함께 읽겠다. 도대체 무엇을 봉인했다는 말일까.
9:38절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
조금 전에 읽은 1절에서 이들은 무엇인가를 인봉했다. 그것이 무엇이냐라면, 9:38절에 나오는 언약이라는 약속이었고, 그 약속을 한 대표 명단이 1-27절까지 나오고, 그 약속의 내용이 28-39절까지 나온다고 보면 된다. 크게 그 내용은 6가지다.
이방인과 단절 문제
안식일 문제
나무를 헌물하는 문제
첫 소산물을 드리는 문제
레위인들과 십일조 문제
성전에 대한 섬김의 문제
느헤미야 시대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의식하며 이 문제를 피하자고 약속한 것이다. 우리가 이 문제만큼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말자고 정한 것이다. 먼저 앞에서 이들은 수문앞 광장에서 학사 에스라를 청해 말씀을 들었다. 그 순간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언약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다. 그리고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또다시 모여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다. 그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그 은혜를 지켜내기 위해, 세상과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 홀드 라인을 세운 것이다. 이것을 지극히 인간적인 운동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수년 전에 1907년 평양 부흥을 기념하고 그런 부흥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울 큰교회를 중심으로 올림픽 경기장으로 알고 있는데, 그곳에 모여 회개 기도회를 가졌다. 물론 회개 기도는 우리가 언제든 드릴 수 있지만, 우리가 그렇게 회개한다고해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불러오리라고 기대했던 주체 목사님들이 안타까웠다. 모여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이기에 모든 것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부흥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모임이나 약속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그리고 기도하고 나자 스스로 겸비함을 느끼며 서로 약속한 것이다. 이것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때 앞장선 자들이 느헤미야를 비롯한 1-27절에 나오는 사람들이었다. 다시 9:38절을 살펴보겠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
우리말로 ‘언약’으로 번역된 ‘코리팀’은 『자르다 배어내다 죽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가 나올 때 거의 같이 나오는 짝궁이 있는데, ‘베리트’라는 언약이다. 물론 학자들 중에는 카리트도 베리트와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고 하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한 언약에는 거의 베리트가 따라온다. 오늘 본문에서는 카리트와 함께 베리트가 아닌 ‘굳건한, 견고한’이라는 아마나가 따라왔다. 이제 어려운 이야기는 지나갔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쌍방에서 구원과 관련된 언약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이 이들이 스스로 믿음을 지켜내기 위한 (이스라엘 공동체) 서로 간의 약속이었다. 이것이 깨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는다. 조금 더 쉽게 예를들면 우리가 11월에 사통팔통 기도회가 있으니까, 기도회를 통해 은혜를 받고 우리 안에 기도해야한다는 마음이 생겼다. 우리 믿음이 연약했던 이유가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끼리 서로 아둘람 기도회는 빠지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믿음의 좋은 현상이지만, 하나님과 함께 구원과 관련된 언약은 아니다. 피곤하거나 여러 상황 때문에 새벽기도에 참석 못 할 수도 있다. 지금 본문의 상황이 이런 상황이었다. 이것을 이분법적으로 다가서면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이 되어 버린다. 이런 내용이 하나님 앞에서 약속이 좋은 것이었지만, 예수님 시대로 넘어가면서 나중에는 변질된 유대교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버렸다.
물론 오늘 말씀에서는 이들이 하나님께 드린 믿음의 내용을 우리가 폄하하면 안 되겠지만, 이 내용을 이분법적이거나 구원과 관련된 문제로 접근하면 안 되겠지만, 그러나 오늘 저는 이스라엘처럼 반응을 함께 살피며 도전받고자 한다.
2. 분리된 사람들
28절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
28절부터 나오는 중요한 단어가 ‘바달’이라고 해서 우리 성경은 “절교”로 번역했다. 레위기에서 중요하게 쓰인 단어다. 정함과 부정함을 분리하는 기준을 말할 때 쓰였다. 하나님이 창조때 낮과 밤의 분리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지만, 바달이 레위기에서는 중요했다. 그처럼 포로기 이후에는 이방인들과 함께 하는 것이 부정한 신학적 의미를 담은 것이다. 느헤미야 시대에는 이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거룩(카도쉬)’을 위해 절교를 선택한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고 돌아오면서 그들 스스로 무너진 이유를 찾다 보니 이런 문제를 이겨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서 ‘헤렘’의 명령을 주셨다. 그러나 2세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사가 지나고 솔로몬을 비롯하여 이방여인들과 결혼했다. 그 결과로 이방 종교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그래서 언약 국가인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며 거룩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우상으로 인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방 사람들과 절교를 약속한 것이었다. 그중에 가장 큰 문제를 결혼에서 찾았던 것이다.
30절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여기 순서를 보면, 안식일이나 헌물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 가장 먼저 나온다. 믿음은 물질을 어떻게 여기느냐에 의해서 거의 표현된다. 지난 화요일 원목사님댁에 교직원이 이동하면서 이란 사태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히잡 문제를 말하면서 요 몇 년 사이에 자유와 자본주의를 맛본 사람들이 예전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상원 리 목수님이 말씀하셨다.
저는 이 시대 가장 큰 우상은 돈이라고 생각한다. 돈 때문에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있고, 돈 때문에 자국 민족주의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그래서 저는 오직 하나님과 라어벌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시대는 돈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 가장 강력한 우상은 돈이다. 그리스도인조차도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이방 사람들과 결혼했던 첫 번째 이유는 돈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와 보니 농사를 잘 짓는 것이다. 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정착하여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이 잘살고 있었다. 그들과 통혼하면 가문을 일으키고, 쉽게 살 방법이 결혼을 통한 안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들과 결혼했던 것이다.
제가 짬밥이 20년이 넘었는데요, 그렇게 믿음이 좋아 보이던 성도님들이 믿음을 말하면서도 자식들 결혼 앞에서는 돈을 먼저 본다. 그때는 믿음은 뒷전이다. 교회에 소개하지 않는 이유는 사위나 며느리가 믿음이 없는 것이다. 직업이나 스펙은 자랑하는데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또 결혼 당사자들은 세상 사람이 더 이쁘고, 잘 생겼고 능력도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청년들을 보면, 시들해 보이는 것이다. 크게 성공도 못했고, 안 생긴 것이다.
저도 머리숫만 많으면 최고인데, 저의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지요. (개밥에 무시 같다고) 그런데 그들은 믿음이 없는데 능력이 있고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은 늘 직장을 위해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있는 하나님을 그때는 어른들도, 청년들도 욕심 때문에 잘 못보더라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은 지키고 있는데, 그걸 못 보는 것이다. 밑에 이어서 나오는 십일조, 첫 소산, 안식일, 성전 섬김 모두가 돈과 연결되어 있다. 이쯤 되면 돈이 유일한 라이벌이라고 말한 이유일 것이다.
31절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품이나 온갖 곡물을 가져다가 팔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않겠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성일에 물품을 가져온 자들은 산발랏과 도비야와 관련 되었을 것이다. 또한 오경에서 안식일에 따른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안식년이 되면 땅을 쉬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욕심 때문에 그리고 믿음이 없어서 안식하지 않았다. 농사를 1년 쉰다고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다음 해에 농사를 지어도 농사가 잘되리라는 보장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안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예레미야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셔서 70년 동안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하셔서 땅이 안식하게 하셨다. 그리고 모두가 포로가 되니 빚은 자동으로 탕감되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사업장이 부도나고 나서 깨달은 것들 중에 온전한 십일조와 주일 안식의 문제였다. 하청에 하청이기에 강압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안식하지 못하고 온전한 십일조로 드리지 못한 것을 회개하며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회사가 멈추고 나니까 쉬더라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게 하신다. 내가 믿음으로 하는 어떤 행동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하나님은 반드시 빼앗아 가신다. 그리고 믿음의 길을 다시 걷게 하신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주일날 일하지 않는 것이 믿음의 테스트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으로 기업을 멈추는 것이 테스트일 수 있다. 주일 하루 일한다고 당장 직업을 잃거나 사업장이 부도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유치한 분은 아니시다. 그러나 믿음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이 강력히 요구하실 때가 있다. 그때는 순종하지 않고 우리 중심이 믿음에서 떠나면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무너뜨리는 경우가 있다. 그때서야 인생의 주인이 누구시며, 내 삶을 채우시는 분이 누구인지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 초막절이라는 절기를 주셨다. 그러나 여호수아 이래로 초막절은 지켜지지 않았다. 초막을 짓고,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기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생각하는 절기였지만 그들은 지키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의 조상들처럼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포로에서 돌아와서야 말씀을 들으며 초막절을 지키기 시작했다.
여러분, 돈 때문에 예배를 등한시하고 있는가? 예배 한 번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돈 보다 가치가 없는가?
35-36절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또 우리의 맏아들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과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주고”
사실 곡식의 열매나 동물의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은 전부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 중에 제일 좋은 것을 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라기를 보면 그들은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든 것을 알고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다.
저의 첫 사역지가 동촌에 있는 고아원이었다. 그때 사례비는 없었고 선생님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주신 몇 만원이 사례였다. 그래서 매월 달랐다. 제 기억으로 첫 사례가 5만원이었다. 그 첫 사례를 다 드린 기억이 있다. 여러분의 첫 열매를 드려본 기억이 있는가.
36절 시작이 ‘맏아들’이다. 예전에 목사가 되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대에도 똑똑한 자식은 신학을 시키지 않았다. 조금 덜 똑똑한 아들을 신학교에 보냈다. 더 똑똑한 아들은 성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은 것은 헌신하지 않는다. 진짜는 헌금하지 않는다. 정말 더 애정이 가는 자녀는 하나님께 드린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요즘은 8천원 커피는 매일 같이 마셔도 헌금은 하지 않는다. 여러분에게 물질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흔들림은 없는가.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먹이시고 옷과 신이 해어지지 않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의 헌금 생활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 받기 위해 헌금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거 싫어하신다. 그건 하나님을 우상으로 여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왕의 재정 같은 책보고 부자되기 위해 헌금하지 않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많이 헌금하시기를 바란다. 그것은 내 삶을 책임 지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것을 돌려 드리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물질을 부어 주심을 20년이 넘는 사역의 현장에서 많이 지켜봤다. 우리는 31절에 나오는 “이 땅의 백성”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결론>
마6: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러분은 보물은 하늘에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만큼이라도 두 주인을 섬기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원한다.
찬양 : 문들아 머리 들어라(1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