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은혜언약2 (구속자, 환대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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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 267장(주의 확실한 약속의 말씀 듣고), 268장(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사도신경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기도 :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삼일 밤 기도회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주님을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더욱 강화되게 하시고, 주님이 주신 구원을 은총을 날마다 즐거워하는 은혜가 성도들과 모든 주의 다음 세대 아이들 위에 있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하오며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 마1:21-23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환대받는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강하게 봉쇄를 하고,
차단을 하고,
비대면을 하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혐오와 배제, 차별, 격리하는 분위기가 강해졌습니다.
저 사람은 바이러스가 있는 사람인가?
저 사람은 바이러스가 없는 사람인가?
혐오와 배제, 차별, 격리하는 분위기가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가득차게 되었는데요.
실제로 바이러스는 일억개 중에, 21개만 숙주에게 해를 끼치고,
나머지 9999만, 9979개는, 인간의 몸에 영향소를 재순환시키는 아주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 21개의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바이러스를 혐오하고 있죠.
그런데 실제로 바이러스로 혐오해야 할 대상이냐?
9999만, 9979개는 우리 몸에 좋은 것인데, 단 21개의 악한 바이러스 때문에 전체 바이러스를 통째로 혐오하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 인생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원래 부정적이에요.
항상 부정적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만 보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냐?
하나님이 안 계시냐?
합리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고통을 경험하면, 부정적이게 되는데,
고통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 입니다.
고통으로 인해 더 자기 안에 갇히느냐, 고통 때문에 자기가 깨어지고,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게 되느냐?
이 두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고통 때문에 갇히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고,
고통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타인을 위해 살겠노라 결단하면, 그것이 뭐냐? 우리 인생의 비전이 되는 것이지요.
단 몇가지 고통 때문에
세상을 어둡게 보고,
사람들을 나쁘게 보고,
21개만 나쁜 것인데,
9999만 9971개도 다 같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인생은,
그 자체로 눈먼 맹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지적으로 선한 것을 보려고 해야 하고,
긍정적인 것을 보려고 해야 하고,
되는 것을 보고,
잘 되는 것을 보고,
잘 하는 것을 보고,
세워줄 줄 알아야 하는 것이죠.
혐오와 배제,
차별과 비대면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때야 하는가?
되는 것을 보고,
긍정적인 것을 보고,
잘 되는 것을 보고, 잘 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환대하고, 서로 대면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역하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냉랭한 분위기였죠.
회당은 차가웠고,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를 드러내기에 바빴습니다.
환대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혐오와 배제, 차별의 분위기 아닙니까?
여기에서 죄인들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죠.
그런데 어느날, 30살의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이 청년은 12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회당을 찾아다니며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바닷가에서 배를 강단 삼아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사역 가운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청년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말씀을 들을 때에,
병든 자들이 낫고,
귀신이 사람의 몸에서 떠나가고,
죄로 억눌린 자들이 치유되고 용서받는 기적 같은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보통 랍비들이 아니라, 선지자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거든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이 청년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문제점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청년이 세리와 창녀, 문둥병자와 같은 죄인들과 식사하며 접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정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데,
율법에 따라 정죄하고 혐오하고 차별하고 배제해야 할 인간들을,
환대하고 포용하고 품고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조사단들은 이 사실을 예루살렘 공의회에 보고하였고,
그때부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주시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자, 오늘 소요리문답 21문은요.
과연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세운 구원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합니다.
21문입니다.
제21문 :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의 구속자는 누구이십니까?
답 :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의 구속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한 위에 양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셨으며, 지금도, 그리고 영원토록 그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제한 속죄입니다.
그 사람들의 구속자입니다.
그 값을 치르고, 노예에서 해방시켜줄 사람,
돈을 지불할 사람,
우리가, 빚을 지면, 노예가 됩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 대신에 보증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갚을 수 없는 빚을,
우리 대신에 보증 선 그 사람이 갚아주는 거죠?
그게 보증인입니다.
보증인이 바로 구속자입니다.
누가 우리의 보증인인가?
누가 우리 인생의 천만금같은 빚을 대신 갚아줄 보증인이신가?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자,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죄’를 빚으로 표현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을 진 자의 용서한 것처럼, 주님도 우리의 빚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 지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걸 갚을 길이 없습니다.
갚아도 갚아도 갚을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청산할 수 없는 빚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죄의 빚을 지고, 사망이라는 댓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죠.
죽지 않는 사람만, 빚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죽지 않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하나님 앞에서 빚이 없는 분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죄가 없으시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아들이 죄가 없으신대도 죽으셨기 때문에,
성부께서는 이 아들을 살리심으로, 세상에서 죄 없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신 것이죠.
*성경에 보면 언약이 많이 나옵니다.
첫 사람 아담과 맺은 언약은 아담 언약입니다.
그 다음, 창세기, 6장에서 홍수로 심판 하신 이후에,
내 다시는 물로 심판 안 한다.
이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낮과 밤과, 더위와 추위가 반복되며, 일상이 회복될 것이다.
이게 뭐에요?
노아랑 맺은, 노아 언약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아
내가 너 큰 민족이 되게 해줄게
네 이름이 대통령 같은 유명한 이름이 되게 해줄게
네 자손이 온 세상에 복 주는 자손이 되게 해줄게
이게 뭡니까?
아브라함 언약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백성들과 함께 맺은 모세 언약,
이건 국가를 만들기 위한 언약입니다.
그래서 법조항이 많죠.
이 법들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사랑해라.
하나님만 예배해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를 만들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되어라.
이게 십계명에 나옵니다.
그리고, 다윗과 맺은 언약
다윗이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백향목과 금으로 반듯하게 지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했는데,
하나님이 아니다.
내가 언제 너한테 집 지어 달라고 했느냐
나는 언제나 이 장막, 저 장막에 다니면서,
백성들과 함께 살아왔는데,
내가 언제 너한테 백향목 집 지어달라고 했느냐,
내가 너를 위해서 집을 지어줄게.
내가 너를 위해서 위대한 왕조를 세워줄게.
그게 뭐냐 다윗 언약입니다.
조금 어렵기는 한데 정리하면,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맺은 언약은, 행위 언약이라고 부르고요.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맺으신 언약은, 다 은혜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왜요?
아담이 맺은 행위 언약은,
행위가 조건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느냐, 따먹지 않느냐? 그것에 따라서 복을 받을 수도 있고, 죽게 될 수도 있죠.
이게 행위 언약입니다.
그런데, 노아언약부터는 달라요.
조건이 없습니다.
나중에 창세기, 9장 보세요.
노아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잘먹고 잘 살아라.
하시는데,
이 복을 받기 위해서, 노아의 행위가 결정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노아가 뭔가를 해야 이 복을 받고,
노아가 뭔가를 안하면 이 복을 잃고, 그런게 아니에요.
그렇죠?
인간의 행위가 조건이 아니죠.
아브라함 언약 보세요.
대뜸 뜬금없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내가 이 복도 주고, 저 복도 주고, 할게.
이것도 뭐에요?
아브라함의 행위가 이 복을 받기 위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죠.
자, 모세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다윗 언약도 보세요.
내가 하나님 집 지어드릴게요. 했는데
아니. 내가 너의 집을 지어줄게.
내가 너의 후손들을 위대한 왕들로 세워줄게.
내가 너의 후손을 통해 위대한 나라를 세워줄게.
다윗의 행위가 조건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이죠.
이게 은혜 언약입니다.
노아한테도 내가 해줄게
내가 복줄게
아브라함 한테도 내가 큰 민족 이뤄줄게, 내가 니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어 줄게, 네 후손을 복의 통로가 되게 해줄게.
다윗한테도 내가 너의 집을 지어줄게, 내가 너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줄게.
주체가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언약은, 조건으로 복을 받지만,
은혜 언약들은,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약속을 믿음으로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의 절정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구속자, 우리 빚을 대신 갚아줄 보증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이 절정인 것입니다.
아브라함한테도
하나님이 내가 할게
노아한테도 하나님이 내가 복 줄게
다윗한테도
내가 해줄게, 내가 할게 했던 하나님이,
그러면 언제 그걸 하신 것입니까?
언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큰 민족이 되게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큰 민족을 지금 교회를 통해 만들고 계십니다.
언제 다윗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견고하게 세워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온 것입니다.
이거, 어려운 말로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하는데,
구약성경에서 아담 이후에 맺었던
모든 은혜 언약들의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되게 되었다.
이걸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이 하시겠다.
하나님이 하시겠다.
했는데,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시구나!
아브라함아, 야 내가 너한테 복줄게
그게 예수 그리스도셨구나.
다윗에게, 다윗아, 야 내가 너의 집을 지어줄게, 내가 니 나라를 영원한 나라가 되게 해줄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셔서, 아브라함과 맺었던 약속, 다윗에게 맺었던 그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다 이루시고 가신 거구나.
이걸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뭐에요?
은혜로 주시마 하신 것을, 그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노아에게 주시마 했고,
아브라함에게 주시마 했고,
다윗에게 주시마 했고,
선지자들에게 돌판이 아니라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주시겠다고 했던, 그 복을 지금
우리는 믿음으로 다 받아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게 됩니다.
누구나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이 얼마나 찬송할 일입니까?
이렇게 부름받은 사람들이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굉장히 밝아야 해요.
환대가 넘쳐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찾아오면,
저 사람 뭐야?
저 사람 바이러스 있어? 없어?
저 사람 잠깐 왔다 가는 거 아니야?
혐오와 배제, 차별이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의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리와 죄인과 창녀들을 환대하고 받아들이며,
긍정적으로 보고
밝게 되고
되는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말하면서,
새로온 사람을 포용하고 환대해야 하는 것이죠.
나도 은혜로 거저 구원받았으니,
저 사람도 나처럼 거저 구원받도록 환대하고 도와야겠다.
*말씀을 맺습니다.
구약에서 조상들에게 복 주시마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제로 복을 주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분은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신적 속성과 인간적 속성을 함께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땅에서
아담이 하지 못했던 행위들을 다 순종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우리 죄의 빚을 대신 갚는 보증인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자가 되셔서,
모든 죄인을 값없이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모든 빚진 자들의 보증이 되시기를 기뻐하시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모든 죄인을 혐오하고 배제하고,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죄인들을
환대하는 공동체
환대하는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
죄,
문제점만 바라보는 사람은,
이 은혜언약의 기쁨,
나의 모든 빚을 대신 청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고,
그 사람의 나쁜점만 찾아보는 것이고,
9999만 9971개의 좋은 점은 보지 못하는 맹인인 것이죠.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 창녀들과 함께 식사하셨고,
그들은 예상치 못한 예수님의 환대로 인해서,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과 닮아서,
예수님처럼, 한 영혼을 귀하게 보고,
한 영혼을 환대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교회를 위해서 : 담임목사님과 사모님, 사역을 위해서. 진행중인 청지기 교육을 위해서.
다음세대를 위해서 : 예수님을 만나도록, 환대받는 은혜를 알도록, 양육의 은혜가 있도록.
*주기도문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사역
1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게네시스)의 책이다, 다윗의 아들, 아브라함의 아들
*게네시스 :
21 그가 낳을 것이다(미래, 틱토), 아들을. 그리고 너는 부를 것이다(미래, 칼레오), 그의 그 이름을 예수라고. (바로)그가, 왜냐하면 구원할 것이다(미래, 소조). 그의 그 라오스(백성)을, 그들의 하마르티아(죄, 불법, 죄악)으로부터.
*라오스 :
소요리문답 21문
제21문 :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의 구속자는 누구이십니까?
답 :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의 구속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고, 한 위에 양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셨으며, 지금도, 그리고 영원토록 그러하십니다.
예수 :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마 1:21
하나님은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자를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자기 백성’이라는 개념이 마태복음에서 확장된다. (유대인 + 이방인)
사자의 아들은 사자이고, 기린의 아들은 기린이듯,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성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자는 성부의 영원한 아들입니다. 시간 속에서 출생하여 성부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성부의 아들로 존재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본성인 ‘신성’과, 사람으로서의 본성인 ‘인성’입니다.
한 인격이신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에 함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거나 변질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예수님은 하나님도아니고 사람도 아니게 되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없습니다.
인성 : 우리를 ‘대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성 : 우리를 ‘대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택함 받은 모든 죄인들을 대신할 가치가 있는 존재는 하나님 뿐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이자 사람으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토록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십니다(히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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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 선택받은 자는 곧, 아들을 ‘받은’ 자이다. 선택받은 자는 구원에로 나아올 ‘양’이다. 그리스도의 양떼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되고 그 음성을 들을 때 비로소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성경은 구원받고 싶어하는 사람을 거부한다는 그림으로 선택 교리를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만장일치로 하나님을 거역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필수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몯 파멸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구속 : 값을 지불하여 사람, 동물 또는 재산을 속박에서 풀어주는 것
‘가알’ 구속하다, 기업을 무르다
‘파다’ 몸값을 지불하다, 구속하다
가족관계가 가까울수록, 도움이 필요한 가족 구성원을 대신하여 구속할 의무가 커진다.
땅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기업이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땅의 임차인들이었다. 기업 무를자는 재산을 구속해서 가족에게 회복시킬 수 있었다.
선지서 본문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구속하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한다. ‘날이 오리니’ ‘그 날에’ ‘그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 :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 세상의 창조주와 구원자, 기독교의 창시자, 기독교의 원리와 실천에 대한 죄없는 모범
예수아 : 여호수아
‘그리스도’는 예수가 이스라엘이 기대한 메시아였음을 인정하는 이름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대개 ‘그리스도’로 불린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들의 쇠퇴기에 예수의 성육신이 일어났다. 이 쇠퇴는 마카비 가문의 몰락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절정에 이르렀다.
1세기에 부의 양극화, 1세기 중반의 기근과 같은 자연재해, 억압적인 과세로 인해 백성들은 혼란에 빠졌다.
사회에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혼재했다 : 혁명적인 열성파, 실용적인 사두개파, 이상적인 바리새파, 금욕적인 에세네파.
지배 계층은 반란의 소문이 로마인들에게 들어 갈까봐 두려웠다. 로마인들이 유대 지도자들의 일에 개입해서 그들의 특권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중보자로서의 예수 :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셔서 성부 아버지의 공의가 만족될 수 있도록 인간의 죄를 위해 죄이 대가를 대신 치르신 것이다.
중보자 - ‘사이에 서 있는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현재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요일 2: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자신이 겪었던 죽음의 상처를 성부 하나님께 보이며 인간의 죄의 대가가 완전히 치러졌음을 증명하고 계신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시며 우리를 대신해 간구하시는 성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는 사해진다. 이는 항상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에서, 그에게 의존한 상태에서 일어난다.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예수 : 첫째 아담은 불순종을 통해 죄와 죽음을 이 세상에 불러들였다. 둘째 혹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첫째 아담이 했던 일을 다시 되돌리는 사역을 하셨는데, 이 사역은 그의 순종을 통해 죽음으로 점철된 곳에서 삶과 의로움을 불러들인 사역이었다.
둘째 아담, 마지막 아담, 종말론적인 아담
은혜 언약과 행위 언약 사이의 기본적인 차이점은, 첫째 아담이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에 의해 대체되었따는 점이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에서는 아담의 죄가 혈통적으로 넘어간다고 이해했다. 전통적 개신교 신학에서는 아담의 죄의 전가를 인정하면서 이를 ‘언약적 관점’으로 풀어나갔다. 인류의 ‘언약적 머리’였던 아담의 죄가 ‘전가’를 통해 아담의 후손들에게로 넘어갔따고 보는 것이다.
영원하신 아들 :
신인양성 :
위격적 연합은 ‘두 본성으로 한 인격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고 해서 그 고유한 신적 본질이 손상되지 않는다.
신성과 인성 각각은 위격 안에 있으나 위격은 아니다. ‘성’은 위격과는 달리 그 자체로 개체적 존재성이 없다.
존 볼(John Ball, 1585-1640)의 언약신학에 대한 연구: 행위언약의 성격과 은혜언약의 조건성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볼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언약을 통해 관계하시기로 결정하셨다.
언약관계를 통해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언약관계를 통해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언약적 방식이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볼은 언약은 한 가지가 아니라, 그 “종류”와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절대언약” vs “가장적 또는 조건적 언약”으로 구별한다.
후자를 “행위 또는 자연언약”과 “은혜 언약”으로 나눈다.
행위언약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완벽한 순종의 조건 위에서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인간과 맺은 언약이다.
은혜언약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건 위에서 영원한 생명을 인간에게 약속하는 언약이다.
은혜언약과 행위언약은 실체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하지만 그 언약이 누구와 맺어졌는가에 대한 고려에서 서로 구별된다. 전자는 순수함의 상태에서 아담과 맺은 언약, 그리고 후자는 타락 이후에 인간과 맺은 언약이다.
타락 전 언약 vs 타락 후 언약 이라는 “이중 구도”
“머리와 지체들”
“뿌리와 가지들” : 뿌리가 병들면 가지도 함께 병든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함께 범죄 했다.
17세기 언약신학자들은 행위언약의 율법주의적 성격을 비판했다.
그러나 볼에 따르면, 행위 언약이 율법주의가 아니라 본질적인 성격상 ‘은혜로운 언약’임을 보여준다.
행위언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의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서 자신을 먼저 “낮추셨다”는 사실은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으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낮추심”을 통하여 언약의 방식으로 그의 백성들과 관계하기로 선택하셨다.
타락의 여부와 상관없이 ‘유한한 인간들’ 편에서는 ‘초월적 하나님’과 교통을 시작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하나님 편에서 자발적인 낮추심이 없었다면 낙원에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는 불가능하였다.
2. 볼의 언약사상에서 인간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행위 언약의 은혜로운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하나님의 많은 선물들과 축복들이 피좀루인 인간에게 이미 넘치도록 주어졌다.
볼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값없는 은혜와 사랑” 위에서 언약을 세우셨고, 은혜의 공의의 방식으로 보상을 허용하시기 때문에 행위언약은 근본적으로 은혜로운 것이다.
깨어진 행위언약 안에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언약 관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언약관계를 깨뜨리고 타락하자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는데, 이 언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및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주는 것에 있다.
볼에 관점에서 은혜언약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를 제공하는 언약이다.
볼도 은혜언약이 조건적인 언약이라고 주장한다.
조건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수반되거나 그것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조건들’ 또는 ‘도구적 원인들’로서의 조건이라는 의미라면 볼은 인간이 은혜언약 안에서도 이행해야 할 의무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편에서 요구되는 규정들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도록 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죄악들을 회개하고, 자비의 약속들을 믿고 그것들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처방규칙에 따라 하나님께 사랑, 경외, 공경, 예배, 그리고 순종을 드리는 것이다.
볼에 따르면 회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신실한 순종이 은혜언약에서 요구되는 인간의 조건이다.
회개는 “죄의 인정”을 의미한다.
하지만 회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불행한 상태와 은혜의 필요성을 깨닫도록 ‘인도할 뿐’이지 인간의 죄책에 대한 ‘면제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
그 대신 볼은 ‘오직 믿음이 인간의 칭의와 구원의 원인’이 된다고 가르친다.
회개(Repentance)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고, 우리의 질병을 느끼고, 은혜에 배고프고 목마르게 된다. 하지만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뻗치는 손은 오직 믿음이다. 이것 없이 회개는 단지 어둠과 절망일 뿐이다. 회개는 믿음의 조건(condition)이고 어떤 사람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자격(qualification)이다. 하지만 오직 믿음만이 우리 편에서 요구되는 칭의와 구원의 원인(cause)이다.…… 믿음은 칭의를 위한 필수적이고 살아있는 도(necessary and livelyinstrument)이다.
믿음 없는 회개는 타락한 인간에게 어떤 구원의 소망도 가져오지 않는다.
4중 인과론이란 원인들을 작용인(作用因, efficient cause), 형상인(形相因, formal cause), 질료인(質料因, material cause), 목적인(目的因, final cause) 등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원인론 체계를 말한다. 신학에서는 여기에 두 가지 정도의 중요한 원인들을 더해 총 6중 원인 가운데서 모든 신학적 주제를 설명하곤 했다(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원인들을 사용하지만 대체적으로 6중 원인 정도로 압축해 볼 수 있다). 4중 원인 외에 추가되는 원인들로는 도구적 원인(道具的, instrumental cause)과 공로적 원인(功勞的, meritorious cause)을 들 수 있다.
칭의의 유효적 원인(혹은 작용인)
유효적 원인이란 어떤 특정한 결과를 낳기 위해 가장 필수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필수불가결한 원인으로서, 모든 현상의 궁극적인 1차 원인을 뜻한다. 칭의 사건의 법적 판결은 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칭의의 유효적 원인은 하나님이다(이에 대해서는 4회: “법적 선언으로서의 칭의”를 보라). 그러므로 칭의의 유효적 원인을 절대로 인간에게 돌릴 수 없다. 현대의 인간중심적 칭의론들은(그것이 펠라기우스주의적이든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적이든 상관없이) 칭의의 유효적 원인을 왜곡시켜, 칭의의 유효적 원인과 인간의 역할을 서로 치환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
칭의의 형상적 원인
형상적 원인이란 한 사물이나 실체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본질을 의미한다. 이를 칭의 사건에 적용시켜보면, 칭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칭의의 “본질”이 필요한데 이 본질을 “복음”(Gospel)으로 이해한다. 이는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생각이기도 한데 칼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구원의 형상적 원인은 “복음의 선포인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에게 흘러넘치는 것”이다.2) 칭의의 형상적 원인은 복음이기 때문에 칭의의 형상적 원인 역시 인간에게 돌릴 수 없다.
칭의의 질료적 원인
질료적 원인이란 목적하는 형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뜻한다. 이를 칭의 사건에 적용해 보면 칭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칭의의 “재료”가 필요한데 이 재료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義, righteousness)로 본다. 칼빈은 다음과 설명한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과 함께 [칭의의] 질료적 [원인]이다.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의를 획득하셨다.”3) 칭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죄인에게 전가됨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칭의의 질료는 그리스도와 그의 의뿐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질료적 원인도 인간에게 돌릴 수 없다.
칭의의 공로적 원인
공로적 원인이란, 목적하는 형상을 이룬 공로가 어디로부터 혹은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파악해 그 대상에게 공로를 돌리는 것을 뜻한다. 칭의의 공로적 원인은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돌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당하신 순종(“수동적 순종”이라고도 하는데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의 공로에 힘입어야만 죄인은 의롭다 칭함을 받기 때문에 칭의의 공로는 오로지 그리스도에게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우리 구원의 모든 부분 부분들이 우리 밖에[extra nos] 위치하고 있음을 우리가 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여전히 행위들을 신뢰하고 자랑하고 있는가?”4) 그러므로 칭의의 공로적 원인을 인간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이 점은 여타 현대 인간중심주의적 칭의론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참된 진리이다.
칭의의 목적 원인
목적 원인이란 사물이나 운동이 일어나는 궁극적인 목적을 뜻한다. 칭의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칭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스스로가 영광을 받으신다. 칼빈은 여러 곳에 걸쳐 칭의의 목적 원인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영광”5)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것”6) 혹은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것”7)으로 일관되게 설명하였다. 칭의의 목적 원인 또한 인간에게 돌릴 수 없다.
칭의의 도구적 원인
도구적 원인이란 사물이나 운동이 가진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도구(instrument)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만약 칭의 사건의 유효적 원인이 하나님이라면, 형상적 원인이 복음이라면, 질료적 원인은 그리스도의 의며, 공로적 원인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있다면, 목적 원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면, 사실 칭의 사건에서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칭의 사건의 원인을 분석할 때 이와 더불어 하나 더 중요한 원인을 추가하는데 바로 칭의의 “도구적 원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그룹들(예를 들면 반율법주의나 하이퍼 칼빈주의 등)은 칭의의 도구적 원인 자체를 거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칭의의 도구적 원인을 늘 “인간”에게 돌려왔기 때문이다. 특히 칭의의 도구적 원인은 인간의 “믿음”으로 구체적으로 적시되어왔다(믿음과 칭의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회인 7회에 “믿음과 칭의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더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본 연재를 마무리 지을 것이다). 칭의의 영역 가운데서 인간의 믿음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도구적 원인”이라는 틀 가운데서 논의해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인간의 믿음을 칭의의 유효적, 형상적, 질료적, 공로적, 목적 원인으로 돌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칼빈은 믿음을 “단지 의를 받는 수단”으로 묘사했다.8) 그러므로 “이신칭의”(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란 용어 안에 포함되어 있는 “믿음으로써”라는 뜻은 인간의 믿음이 칭의의 유효적, 형상적, 질료적, 공로적, 목적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도구적 원인”으로서 작용한다는 뜻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3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더 이상그 ‘행위’ 언약에 근거해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주님은 ‘두 번째 언약’ 곧 흔히 ‘은혜 언약’으로 불리는 언약을 맺기를 기뻐하셨다.
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제공하신다. 하나님은 이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요구하시고, 영생을 얻도록 정해진 모든 자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사 그들로 하여금 자원하여 믿을 수 있도록 약속하셨다.
아브라함과 더불어 은혜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은 사람 편의 공로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는데 이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이미 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언약은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복과 상급’이 되어 주시기로 하여, 자원하여 낮아지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따라서 인가늘 창조하셨다. 이는 인간을 처음부터 언약의 파트너로 창조하신 것을 말한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은 겉모양보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관련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왕과 봉신’의 관계이다.
성경의 창조 이미지는 하나님이 왕으로 즉위하는 이미지이다. (시 29:1-4, 7-11)
시편 29:1–4 (NKRV)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행위언약
아담에게 온전하고 영구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하여 생명이 약속되었다.
이 언약의 보증은 생명나무였다.
한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사망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엄히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인류와 관계된 처음 언약에서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로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이 언약에서 약속된 것은 ‘생명’이었고, 조건은 ‘완전한 인격적 순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첫 언약은 본질상 은혜언약이었다. 피조물이 이미 완전한 순종의 의무가 있는데 그 순종에 대해서 값없이 상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로서 아담은 하나님을 따라 생각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사역들을 해석할 수 있었고 전 피조물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말할 수 있었다.
또 그는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었다. 자신과 그가 관찰한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께 예배했다.
왕으로서 그는 바른 지식과 거룩한 헌신을 따라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렸다. 그는 바른 지식과 거룩한 헌신을 따라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렸다.
*은혜언약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죄와 비참에 빠져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
은혜언약은 둘째 아담, 택함 받은 자들의 대표인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절대적인 순종을 하셨다. 아담은 실패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완벽하게 순종하였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의 순종이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의 순종으로 간주된다.
은혜언약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리스도와 맺으신 언약이다. 그렇지만 행위언약이 파괴된 이후에 인류에게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은 행위언약보다 먼저 세워진 것이다.
아담이 행위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행위언약이 폐지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여 그 요구조건을 다 이룰 수 없는 것을 아셨다.
믿음은 구원 얻는 수단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인간의 행위로서의 믿음이 아니다.
우리의 행위로 하늘에 올라갈 필요도 없고, 음부에 내려갈 필요도 없다. (롬 10:9)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행위가 아니라 복음 그 자체에 대한 전적 신뢰이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인자 :
권위를 행사함 :
언약과 구속사 (언약의 통일성과 다양성_개혁주의 언약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언약사상 연구)
아담 언약 :
행위 언약의 특징은 ‘중보자’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언약을 깨뜨리면 즉시 사망이 선고되고, 낙원에서 추방되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한 후 사망을 선고하고 추방하시기 전에 먼저 구속에 관한 약속을 주셨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와 맺으신 은혜언약에 근거한 것이다.
창 3:15에는 중보자인 ‘여자의 씨’가 등장한다.
노아 언약 :
창 9:1, 이는 창세기, 1:28에서 아담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 축복의 말씀을 주신 ‘근거’는 전혀 다르다. 아담에게는 행위 언약으로 땅을 주셨지만, 노아에게는 은혜언약에 근거하여 땅을 주셨다. 은혜언약에 기초하여 땅을 주셨기 때문에 만물이 완성될 때까지 땅은 다시는 멸망당하지 않는다(창 9:11).
이 언약의 징표로 무지개를 두셨다.
하나님은 구속사역의 일환으로 교회의 원수들을 홍수로 심판하셨다.
여자의 후손을 반대하는 극렬한 죄악의 광란을 일으키는 뱀의 후손에 대한 심판이다.
노아 언약의 특징
주권적이다. 신적 약속은 무조건적이다.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확고하게 세워진 언약이다.
보편적이다. 사람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홍수 심판을 받았다.
영속적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연과 지구와 세상 끝 날까지 결속시키셨다.
아브라함 언약
아브라함과 맺으신 그 언약에는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부르심과 모든 족속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다.
이 은혜언약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창 15:5)
하나님껫는 이 언약을 확증하기 위해 ‘할례’를 받게 하셨다. 할례는 은혜 언약의 ‘보증’으로 주신 첫 번째 제도였다.
아브라함 언약의 특징은 ‘약속들’이다.
큰 민족에 대한 약속 : 이방인들을 포함한 정치적/경제적/도덕적 경계를 가진 큰 민족을 의미한다.
자손에 대한 약속
땅에 대한 약속
아브라함 언약 역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하신 은혜 언약이다.
모든 약속이 실현되어야 할 책임을 ‘자신’이 떠안으신 것이다.
모세 언약
모세 언약은 죄인인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모세언약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순종하여 축복의 상태에 들어가도록 하는 언약이 아니다.
아브라함 언약과 그리스도의 강림 사이의 시기에, 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독립된 단위이다.
모세 언약 아래에서도 아브라함의 언약이 살아 있었다. (출 4:25)
율법 언약은 언약 백성을 ‘국가’로 만드는 데에 진보를 나타내었다. 이때까지 하나님은 ‘가족’과 관계를 맺어오셨다. 그러나 이제 국가와 언약을 세우신다.
율법 언약은 인간을 ‘겸손’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깨닫게 하는데 이전 언약보다 진보적이다.
모세 언약은 이전 언약보다더 발전된 은혜언약이고, 그리스도에게로 더 가까이 가게 하는 언약이다.
반면,
모세 언약은 이스라엘 위에 대표적인 왕을 영원히 세우신다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모세와 맺은 언약은 구속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주신 도덕법이라고 했다.
이 언약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유익을 위해 주신 언약이요, 동시에 세상 끝 날까지 모든 시대에 걸친 하나님의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초등교사’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 언약은 행위언약이지만 첫 사람 아담과 맺은 그 행위언약과는 다르다.
아담에게 주어진 행위언약은 어기면 반드시 죽음이 선고되는 언약이었다.
그러나 모세 언약은 율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알게 하고,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깨우쳐 주기 위한 언약이다.
(아마도, 제사 제도의 의미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윗 언약
다윗 언약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에서 최고의 완성적인 면을 나타내었다.
다윗 왕권은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왕권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다윗과 맺은 은혜언약은 하나님의 왕국이 오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조를 세우시고 그의 후손 가운데 영원한 왕을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다(삼하 7:19).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셨다(삼하 7:14-16).
이스라엘에서 왕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의 중재자였다. (삼하 5:3, 왕하 23:1-3)
다윗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
다윗을 통하여 온 땅이 정복되었다.
다윗을 통하여 모세 언약에서 주신 예배를 완성하시고 예배 제도를 추가하셨다.
다윗은 성전에 합당한 모든 설계도를 받았다. (대상 28:19)
이런 의미에서 다윗은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주신 언약을 계승하고 또 완성하였다.
그리스도는 유다 왕들의 직계 후손은 아니었지만, 법적으로는 그들에게 속한 후손이었다.
모계로는 다윗의 아들 나단의 후손 마리아에게서 났고, 법적으로는 솔로몬의 후손으로 나셨다. 이는 마리아가 요셉의 법적인 아내로 정해진 때에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기억하사’ 유다 왕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등불을 끄지 않으셨다. (왕상 15:4)
아브라함 언약에 연관된 세 가지 약속 모두 다윗 시대에 성취되었다.
땅에 대한 약속이 다윗 시대에 성취되었다.
후손에 대한 약속은 다윗 밑에서 형성된 국가적인 실체로 발전했다.
이방 사람에 대한 축복의 약속은 다윗에게 종속된 국가들에게 성취되었다.
다윗과 맺은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언약이라기보다는 ‘다윗 왕족’과 맺은 언약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일방적인 은혜’로 주신 언약이다.
선지자들에게 약속된 새 언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핵심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는 새 창조의 또다른 모티브가 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평화의 영원한 언약은 그들과 함께 성막에 거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수반한다(겔 37:36).
새 언약의 특징 역시, 언약이 ‘신 중심적’ 특성이고, 다른 하나는 ‘언약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새롭다’는 것은 옛 언약의 불완전함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약 관계는 ‘영구적’이고 파기가 불가능하다.
새 언약의 새로움은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있다. 죄를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기억하지 않으신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 언약과그 성취의 구도로 짜여 있다.
1장과 28장에서 ‘임마누엘’,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언약적 내용”으로 마무리를 한다.
특히 ‘모든 족속에게로 가라’는 명령은 아브라함 언약의 틀과 매우 흡사하다.
혐오에서 공감과 환대에로
강력한 봉쇄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심각한 경제적 위기가 초래되었고,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단절, 무기력감 등으로 인해 웅루과 좌절까지 복잡적으로 경험하는 심리적 위기를 겪고 있다.
감염자에 대한 공간적 격리뿐만 아니라, 감염자와 그 가족에 대한 비난 또한 문제를 표출하였다.
혐오감은 상한 음식물을 먹거나 병원균을 만지지 못하도록 우리의 신체와 생명을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혐오는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로서 자기 안의 불안을 잠재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혐의가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서 타인을 향한 비난과 뒤섞일 때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바이러스는 미세하고 하찮게 보이지만 먹이사슬을 통한 영양소 재순환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바이러스는 생명에 필수적이고, 그 가운데 1% 정도만 병원성이 있어서 숙주에 해롭다.
(인간의 몸을 파괴하는 21가지 바이러스 유형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일억 가지 바이러스 유형들의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대다수 바이러스는 사실 우리의 존재 자체에 꼭 필요하다. 인간에게 유익한 바이러스는 놀라울 만큼 많다.)
‘공감’은 타인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을 인지적으로 파악하고 그들의 사고와 기분에 적절한 감정으로 대응하는 능력이다.
공감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에 서 보고, 다른 사람의 느낌과 시각을 이해하며, 그렇게 이해한 내용을 활용하여 행동지침으로 삼는 기술이다.
질병은 치료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며, 환자는 고통받는 사람을 뜻할 뿐이다.
역병으로 인해 환자에게 제공되어야 할 기본적인 서비스조차 중단되었을 때, 기독교인들은 환자들에게 물과 음식을 제공하고, 그들을 돌보는 사랑과 헌신을 실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