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사랑한 그 제자 5] 이루 말할 수 없는 십자가에 들린 사랑 (요19:17-30,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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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10월 12일 수요일
소제목 : 예수가 사랑한 그 제자 5
제목 : 이루 말할 수 없는 십자가에 들린 사랑
본문 : 요한복음 19장 17-30절, 요한복음 3장 14절 *신181, 신146
결단찬양 : 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도입_꿈
저는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은 아닌데, 한 번 꿈을 꾸면 그 꿈이 뇌리에 크게 기억에 남는 편입니다. 예를 들면, 꿈 속에서 저승사자를 마주한 꿈이라던가, 또는 책장 위에서 꼬마귀신을 마주한 기억이 저에게는 너무 크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감사한 것은 그 두 꿈에서 늘 십자가가 옆에 있던가, 성경책이 제 옆에 있었다는 사실에 아이러니하게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꿈 꾸지 아니한 채 보내다, 최근에 정말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엘이가 100일 좀 안되었을 때 꾸었던 꿈 같습니다. 제 꿈은 기승전결은 거의 없고 전결 또는 결만 존재했는데,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왜,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배경은 아엘이의 장례식장이었고 주변의 색상은 온통 검정색이었습니다. 꿈 속에서의 조광원은 흐느끼듯 울며 주저 앉아 있었고, 잠에서 깬 조광원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잠에서 깬 채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충격에 쉽게 잠들지 못했고, 그 길로 그대로 새벽설교를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오기 전 자고 있는 아엘이를 보니, 누가 업어가도 모를만치 푹 잠에 빠져 자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고, 또 너무나 안심이었고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게 잠든 아엘이를 뒤로한 채 새벽설교를 가기 위해 나가면서, 또 예배당으로 나아오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려 죽으셨을 때, 하나님도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고 또 슬프셨을까?’를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본문 19장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결코 넘길 수 없는, 그리고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끝까지 지켜 나아가야 하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왜 요한이 기록한 십자가 사건인가?
십자가 사건은 요한복음만 다루는 것도 아니고,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마태복음 27장 32절에서 44절까지, 또 마가복음 15장 21절부터 32절까지, 그리고 누가복음 23장 26절에서 44절까지, 사복음서 모두가 다룰 만큼 정말 중요한 사건이고 반드시 기록되어져야 했으며, 전파되어져야 했던 사건입니다.
특히 이 사건을 누가복음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예수 양 옆에 달렸던 두 사람, 즉 강도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들과 또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가를 누가복음이 더 자세히 기록합니다. 그런데 왜 요한복음의 십자가 사건을 본문을 택했는가를 말씀드리며 시작하고자 합니다.
‘예수가 사랑한 그 제자’ 시리즈는 사실 오늘의 본문을 전하고자 시작한 시리즈였습니다. 시작은 요한복음 3장 14절로부터 입니다. 요한은 스스로를 ‘예수가 사랑하는 그 제자’라 표현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향한 그의 시각이 어떠했는가를 3장 14절로부터 보게 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다른 복음서는 이 십자가 사건을 ‘저주를 받은 사건’으로 강조하며,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심과 십자가 위에서 하신 그 말씀은 요한복음 보다는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됨을 위한, 심판의 사건으로 묘사가 됩니다. 물론 틀린 말 하나 없고 십자가 사건이 하나됨도 아니고 심판도 아니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무겁고 또 우울하고 슬픈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함께 나눌 이 요한복음은 조금 다릅니다. 무겁고 슬프고 우울한 분위기라기 보단, 가볍지는 않지만 밝고 내심 진지한 분위기를 담아 냅니다.
거기의 핵심이 저는 ‘들려야 하리니’라는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이 단어는 ‘올리운다.’ ‘영광을 받으신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내포하고 있는 의미로는 ‘높아짐’ 그리고 ‘존귀케 됨’에 있습니다. 요한이 바라본 십자가 사건은 심판보다는 영광이고 높아짐이고 존귀케 되는 것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사건 :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다 사해주심
이제 그 영광스러운, 높아지고 존귀케 되는 이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향해 어떤 메세지를 선포하고 있습니까? 결과적으로는 죄인된 우리를 대신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허락하신 사건입니다.
본문 19장을 통해 이 사건을 조금 더 세밀하게 보고자 합니다. 제자들의 부인과 배신으로 예수님께서는 혼자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한 번 상상해보세요.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
우리가 피곤할 때 손톱 주변으로 죽은 피부가 찢어져 올라오는 현상을 우리 성도님들께서는 한 번쯤은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또한 경험해보셨는지도 모르겠는데, 그 올라온 죽은 피부를 잘못 뜯게 되면 살아 있는 피부까지 뜯게 됩니다. 피가 나고 무엇보다 아픕니다.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아주 작은 상처에도 우리는 쓰라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쓰라리다는 표현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채찍과 폭력으로 지칠만큼 지친 그 육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조금만 움직여도 그 가시에 살이 찔려 고통과 피가 떨어지는 그 육신. 걸친 것 하나 없이 많은 이들 앞에 수치와 부끄럼 속에 놓여진 그 육신. 그 육신을 가지고, 거기에 자신이 메달릴, 자신보다 더 큰 십자가를 몸에 달고, 평지도 아닌 언덕을 올라야 했던 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는 ‘쓰라리셨겠네.’라고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그 고통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에 들려 올려지셨습니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십자가 형은 유대형벌에 있어 최악의 형벌로,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행해지는 형벌이었습니다. 즉, 이 땅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최악의 형벌을, 본문에서 빌라도가 말하듯, ‘내가 쓸 것을 썼다. 그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었다.’ 표현되었던, 그 유대의 왕이 유대의 최악의 형벌을 담당하셨지만, 이는 곧 유대 율법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며, 성취이자 완성하셨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을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무엇보다 그분의 죽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안전하다. 만약 십자가가 우리 종교의 중심이 아니라면 우리의 종교는 예수님의 종교가 아니다.⌟
이처럼 십자가 그 사건이 주는 그 은혜가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너무나 크고 놀랍다는 것을 여러 방면에서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 사건을 우리는 “복음”이라 말하고, 이를 우리는 “good news”라 말합니다.
우리에겐 good news! 하나님에겐?
그러나 복음은 정말 좋은 소식이지만, 이 과정이 과연 모두에게 있어 good news라 표현될 수 있는가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꿈을 통해서도 너무 힘들었고, 마음이 참 어려웠습니다. 현실에서 벌어진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너져 내림을 경험했습니다. 그만큼 아엘이가 저에게 소중한 존재이고 또 부모로써 자녀를 향한 애정이 특별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하나뿐인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었는데, 그 아들이 최악의 형벌이라 말하는 십자가형에 처해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셨기에 good news’라 말할 수 있겠지만, 정작 하나님 입장에서도 이 사실이 good news였겠냐는 것입니다.
만약 아엘이가 동일한 상황이었다고 한다면, 다른 이들에게는 좋은 소식일지 몰라도, 저한테만큼은 좋은 소식일 수 없습니다. 최악 중의 최악의 소식일 것입니다. 막을 수 있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막고싶었을 소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가지고 우리는 good news라 말합니다.
그래서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들린, 영광스럽게 표현해왔던 이 사건이 정작 하나님 입장에서도 good news일 수 있을까? Good news였다면, 어떻게 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장차 오실 것이라는 구절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신 이유는, 마태복음 20장 28절을 보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우리의 대속물로 오심이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과 17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이 구절을 통해, 복음이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 시각에서도 good news가 맞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은 사실인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세상을 독생자보다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에게 있어 예수님은 하나뿐인 독생자로 분명 소중했을 것이고, 애정도 각별했을 것이며 특별했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예수님보다 더 사랑한 것은 바로 우리, 저와 여러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였으며, 예수님께 초점이 잡혀있었더라면, 결코 복음이 good news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보다 우리가 먼저였고, 우리를 향한 구원에 초점이 있었기에 이 십자가에 들린 영광스러운 사실이, 하나님에게도 good news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good news, 만 배로 누리기
그래서 참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죄송했습니다.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들려 우리의 죄 사함 받기까지 하신 그 하나님의 결정과 이 일을 허락하심에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우린 온전히 돌려드리지 못하여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십자가에 들리기 전 마지막까지 두려워하시고 힘들어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분명 하나님은 보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그보다 더 사랑하시기에 이 십자가 사건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결단에 우리는 무딘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정말,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날의 우리 모습을 뒤돌아 보았을 때, 우리는 십자가의 그 사랑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복음을 무딘 신앙으로, 또 당연한 것으로 받아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무딘 신앙으로 흘려 보내기보다 우리게 허락하신 이 good news를 두 배, 세 배, 만 배로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1. Good news, 만 배로 누리기 : 정체성 바로 세우기, 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라
먼저 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바로 알길 소망합니다. 그저 부모의 배로 나온 자녀가 아닌, 정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는 자녀가 우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2. Good news, 만 배로 누리기 : 내가 받은 사랑, 하나님께 표현하기
그리고 내가 받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사랑합니다~’ 외치면 그만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는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까?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 날마다 기도하는 삶, 수시로 우리의 입술을 통해 주를 찬양하는 삶 등 정말 많은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가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무엇입니까? 다음주부터 드려진 가을 특별새벽부흥회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물론 새벽을 깨운다는 것이 힘들 것이고, 매일의 잠을 이기고 나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비하면 이 새벽을 깨우는 것은 턱 없이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바라옵기로는 다음주 그 새벽을 깨워 함께 동판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3. Good news, 만 배로 누리기 : 그 사랑, 이웃에게 흘러가도록 실천하라
하나님과 나만의 알콩달콩한 사랑으로 끝나면 하나는 알고 열은 모르는 모습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 또한 사랑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변에 믿지 않는 우리의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을 위해 복음, good news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월 23일 주일,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전교인 가을마당’이 준비되어져 갑니다. 이 날, 정말 많은 새가족들이 함께 해서 모두가 함께 하는 축제이자,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이 모두에게 흘러가는 시간되길 소망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 사건 속에는, 정말 우리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건을 나를 향한 사랑이 아닌, 사건으로 받아들여 지나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는 그 사랑을 지나치지 마시고, 또 놓치지 마시고 쟁취하시고 누리시고 또 표현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1) 십자가 사건 속 사랑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되게 하소서
2)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되게 하소서
3) 다음주 특새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붙좇으며, 사랑에 뒤덮여지는 시간 되게 하소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