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0UNLIKELY
Disgust
0UNLIKELY
Fear
0UNLIKELY
Joy
0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0UNLIKELY
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UNLIKELY
Conscientiousness
0UNLIKELY
Extraversion
0UNLIKELY
Agreeableness
0UNLIKELY
Emotional Range
0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 .5
.5 - .6
.6 - .7
.7 - .8
.8 - .9
> .9
찬송 : 363 내가 깊은 곳에서
본문 : 시 10:1-18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손이 안 미친 곳이 없을 정도로 매 순간마다 붙드시고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더욱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래전 티비 드라마를 통해서 종종 보게 되던 장면일 것이다.
놀이 공원 같이 드넓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그 가운데에서 한 어린 아이가 혼자 울고 있다.
많은 인파 속에서 좋아하는 인형을 따라가다가 부모 손을 놓친 것이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부모의 흔적도 보이지 않고, 부모 손을 놓친 곳에 어디인지 생각해서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도 그곳에는 부모가 보이지 않는다.
두렵다.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울음이 터진다.
주변의 낯선 환경도 두렵지만 그 무엇보다 지금 이 힘겨운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부모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무섭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겪을 때가 있더라.
그것이 무엇인가?
인생 가운데 어려움이 찾아왔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풍랑들이 밀려온다.
너무나 버티기 어려운 고난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 때 나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그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상실감이다.
너무 외롭고 괴로워서 기댈 곳이 필요한데 주변에 기댈만한 존재가 없는 것이다.
너무 아파서 의지할 대상을 찾는데 그 의지할만한 대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이런 상실감을 이야기 하고 있다.
1절을 보라.
시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지금 시인은 환난을 겪고 있다.
시인이 당하고 있는 환난은 어떤 것이었는가?
악한 자들이 들고 일어나 시인을 괴롭히고 있다.
이 환난도 문제지만 시인에게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지금 이처럼 괴로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렇게 고통당하고 있는데, 내가 지금 이정도로 괴로운 상황 가운데 놓였는데 하나님은 마치 숨어계신 것만 같다.
즉각 나타나 도우시지 않고, 즉각 저 원수들을 물리쳐 주시지 않고, 이 상황 속에서 나를 그냥 버려두신 것만 같다.
내가 의지하고 내가 기댈만한 하나님께서 지금 내 주변에서 도저히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낯선 곳에서 부모를 찾아 헤매이는 어린 아이마냥 너무나도 외롭고 괴롭고 슬프고 답답한 상황 가운데 놓인 것만 같은 것이다.
이처럼 괴롭고 외로운 상황 속에서 슬퍼 울던 시인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돌아본다.
그가 본 세상은 악이 온통 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절부터 시인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악인이 판치는 세상을 고발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니, 악인들은 교만해서 가련한 사람을 핍박한다.
악한 것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린다.
그들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다.
으슥한 곳에 숨어서 무죄한 자를 죽인다.
이들 때문에 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은 쓰러지고 만다.
악인들이 이렇게 자기들 마음대로 악한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4절에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저들이 이처럼 악한 행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만하고도 완악한 태도는 더 나아가서 자신들을 감찰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은 어디에 있냐고 되묻기까지 한다.
너무나도 뻔뻔하게, 너무나도 악한 말을 늘어놓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여전히 숨어계신 것만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보면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악인들의 주장이 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악을 좇아 살아가는 자들이 더 번성하는 것 같고, 온갖 편법과 부정부패를 즐기는 자들이 더욱 성공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5절을 보라.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악인들의 길은 견고해 보인다.
그들이 하는 일을 잘 되고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 높아서 악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자신들은 결코 망할 일이 없고 환난을 당할 일도 없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 땅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11절을 보라.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시인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의인들의 결국이 달라진 것이 없어보이지만 그럴지라도 시인은 하나님이 부재한 것 같이 보이는 이 세상을 매섭게 고발하고 있다.
악인들이 판을 치는 이 불법과 불의의 세상을 고발하고 있다.
시인은 누구에게 고발하고 있는가? 오늘 본문의 시편은 단지 혼자서 떠드는 것이 아니다.
그냥 현실이 괴로워서 하는 푸념이 아니다.
지금 시인은 온 세상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고발하고 있다.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세상에 하나님 더 이상 침묵하지 마시고, 하나님 더이상 지켜보지만 마시고 개입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12절에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손을 들고 즉각 개입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왜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한다고 말하는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이다.
13절에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감찰한다는 의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행위와 삶과 심령과 마음 등을 살피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을 문법적으로 보면 부정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로' 라는 단어에 감찰하다 라는 단어의 미완료형이 사용이 되어서 영원한 부정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악인들은 우리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악행에 대하여 지금도 감찰하지 않으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감찰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이다.
악인들이 아주 뻔뻔하게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는 분이라고 떠들고 다닌다.
악인들은 우리 하나님께서 인간역사에 개입하지 못하는 무능한 신으로 업신여긴다.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한다.
하나님은 판단할 수 없는 분이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분이라고 조롱하고 있다.
그렇지 않는가? 오늘날에도 수많은 악인들이 들고 일어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우주의 재판관을 의식했더라면 그렇게 버젓이 악을 행할 수 있을까? 그들이 조금이라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경외했더라면 그렇게 떳떳하게 악을 행할 수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악인들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인은 이런 악인들을 그냥 두지 말고 속히 개입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마치 하나님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이 때에도, 하나님이 저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때에도, 하나님이 숨어계시는 것 같은 이 순간에도 시인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4절을 보라.
다른 성경번역본으로 읽어드리겠다.
“주께서는 학대하는 자의 학대와 학대받는 자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손수 갚아 주려 하시니 가련한 사람이 주께 의지합니다.
주께서는 일찍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창조만 하시고 알아서 니들끼리 니들 힘으로 잘 살아봐라 하며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다.
마치 시계 태엽공이 자기가 만든 시계 태엽을 돌리고 그 시계가 알아서 잘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구경하는 것처럼, 멀리서 그냥 세상 돌아가는 것을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러한 잘못된 주장을 가리켜 이신론이라 한다.
인간 역사 가운데 개입하지 않는 분. 악인들은 하나님을 이와 같이 여긴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임하지 않기에 하나님은 없다고 외친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하나님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 분이라고 주장하며 더 많은 악행을 저지른다.
그러나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다.
14절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삶을 보시고 개입하시는 분이시다.
이 땅의 가장 약한 고아도 돌보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참새 한마리도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며, 온 우주의 가장 공의로우신 재판관이 되신다.
시인은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기에 수많은 악인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숨어계신 것 같고, 지금 내 상황 가운데 부재하신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변함없이 그 하나님께 지금 기도하고 있다.
시 10:15-18 까지를 다른 성경 번역본으로 읽어드리겠다.
“악하고 못된 자의 팔을 꺾어 주십시오.
그 악함을 샅샅이 살펴 벌하여 주십시오.
주님은 영원무궁토록 왕이십니다.
이방 나라들은 주님의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불쌍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십니다.
고아와 억눌린 사람을 변호하여 주시고, 다시는 이 땅에 억압하는 자가 없게 하십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도 때로 하나님이 정말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마치 내가 처한 상황과 형편 속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이 상황 가운데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본문 1절에서도 시인은 “어찌하여" 라는 말을 두번이나 사용하면서 ‘하나님 도대체 왜 침묵하십니까?
하나님 이 부당한 현실 가운데 어째서 가만히 계십니까?’ 라고 부르짖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다.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고, 내가 가장 괴로운 상황에도 늘 나와 동행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독생하신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시37:39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나니 하나님은 환난의 날에 우리의 요새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또한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영광을 두고 우리를 건지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늘 아버지이시지 않는가? 그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시인은 도무지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무지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지금의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우리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오늘도 이 불의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도무지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는 세상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그분을 향하여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하늘 아버지는 환난 날에 우리의 요새가 되시며, 우리를 수많은 위협과 괴로움 가운데 능히 건지시는 분이시다.
악인들의 팔을 꺾으시고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들의 소리를 들으사 높여주실 것이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도 기도로 나아가시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함께 기도하자.
특별히 본문의 시인과 같은 힘겨운 상황 가운데 놓인 분들, 말씀을 붙들고 이 시간 함께 기도하자.
영원한 왕 되시는 주님, 이 악한 세상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을 조롱하며 멸시하는 악한 자들의 팔을 꺾어 주옵소서.
오직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만 바라며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크신 팔로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시사, 나를 괴롭게 만들고 힘겹게 만드는 모든 악한 상황들로부터 구원하여 주옵소서.
< .5
.5 - .6
.6 - .7
.7 - .8
.8 - .9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