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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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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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종
로마서 1장 1-7절
우리가 읽은 로마서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세상을 바꾼 책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로마서를 ‘성경 중의 성경, 복음서의 핵심, 바울의 복음서’라고 비유하면서 로마서는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지난 2천년 동안 교회의 역사를 볼 때, 여러 위대한 인물들이 로마서의 영향을 받았고, 그간 생겨난 거의 모든 이단들도 로마서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중 영향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바로 어거스틴입니다. 그는 학식이 많은 철학자였고 절은 시절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원을 거닐 때 어린아이의 음성을 듣습니다. “책을 들어라” 그래서 성경책을 펼쳤더니, 로마서 13장 13절이 나왔다고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어거스틴은 곧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을 단행한 루터 역시, 로마서 1장 17절을 읽다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선행과 고행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고 구원받아 살 길은 오직 믿음밖에 없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로마서는 이처럼 위대한 인물들이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는 어떤 책이고, 왜 우리에게 이토록 중요한 책일까요?
사도바울은 총 13편의 서신을 기록하였는데, 로마서를 제외한 나머지 서신들은 자신이 세운 교회에 편지이거나 디모데처럼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즉 편지 수신자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해답을 주기 위해 쓴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서는 심각한 파벌 싸움이 있던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교인들이 서로 자신의 은사가 우월하다면서 싸웠는데, 바울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가장 좋은 은사가 사랑이라는 것과, 사랑 없는 은사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 내에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히자 그들의 주장처럼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이처럼 목회 특정 목적을 위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썼기 때문에, 편지에서 복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기 전 해당 지역을 방문했을 때 복음을 이미 설명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경우는 다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할 때까지 로마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로마에서는 이미 자생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해들은 로마인들이 로마로 돌아가 교회를 세워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으로 학자들이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아직 사도들에 의해 양육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은 그 교회에 어떤 문제나 분쟁이 있어서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구원과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구원과 복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정ㅇ확히 알기 원한다면, 로마서를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는 구원과 복음을 가장 체계적이고 신학적이고 신앙적으로 서술한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장에서 11장까지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를 믿을 것인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칭의와 성화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12장에서 16장까지는 ‘그럼 어떻게 믿을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윤리적인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삶의 현장에서도 실제로 거룩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서는 구체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철저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아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고 여긴다면, 반드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결론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는 은혜의 책이기도 하지만, 십자가의 책이고 의무인 책이 로마서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떠한 존재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바울은 로마서 편지 서두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소개하고 하면서,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우선 바울은 자기 자신을 소개하면서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까? 종이라면 자유가 없는 사람의 이미지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종”이라는 단어를 표기할 수 있는 희랍어 단어가 몇 가지가 있는데, 바울사도는 그 중에서도 자기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고 주인에게 철저하게 예속되었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둘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둘로스인 나 바울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종이라고 하면 주인에게 억압당하고 무시당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종의 이미지를 그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의미로만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을 보면 종이라는 단어의 의미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21장을 보면 모세의 율법 가운데 이런 법규가 있었습니다. 어떤 종이 주인을 위해서 6년을 일하고 제 7년이 되면 안식년에 주인은 이 종에게 자유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종이 주인에게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제가 지나간 6년 동안 살다가 주인님하고 무척 정이 들었습니다. 저는 주인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따라서 저는 앞으로 나가서 자유하지 않고 한평생 주인님을 모시겠습니다.”라고 하면 이 주인은 종을 데리고 와서 귀에다가 송곳으로 구멍을 뚫습니다. 멋으로 뚫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영원한 종에 대한 표시입니다. 이 표시를 갖게 되면 그날부터 주인은 그 종을 더 이상 종으로서 취급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아들과 똑같이 대우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런 경우에 우리는 종에 대해서 이런 개념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종’, ‘자유의 종’ 즉, 종은 종인데 자유한 종입니다. 주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의 자유를 오히려 주인에게 반납하고 스스로 자원해서 종이 된 사람이며, 그가 종이 된 동기는 사랑이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 자유를 반납하고 기꺼이 그 주인의 심부름을 하며 한평생 그 주인을 위해서 살기로 결단한 종! 아마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런 의미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종의 개념은 당시 로마의 문화 속에서 나타납니다. 로마에 있어서 종이라는 것은 아주 천대를 받고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고 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종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때때로 로마사회 속에서도 매우 달라질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주 지체 높은 귀족의 종이 되었을 때, 아니 로마의 종 가운데서 어떤 자유인보다도 어깨를 높이며 프라이드를 가진 종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의 황실에서 심부름을 하는 황제의 종들입니다. “나는 가이사의 종”이다. 이것은 굉장히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어쩌면 그런 개념들을 인식하면서 오늘 이 본문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로마의 황제의 종이 문제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바울은...’ 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 시작한 이후 바울에게서 새로운 신분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 예수 그리스도의 둘로스 바울은!’ 오늘 이 바울이 가졌던 동일한 고백을 사랑하는 이웃들 앞에 여러분은 고백하실 수가 있습니까? “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배요한은”. 이 고백은 내가 있는 곳마다 나의 의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마다 주님만 드러내겠습니다. 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이러한 고백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소개하기를 “바울”이라고 불렀습니다. 헬라어로 바울은 ‘파울로스’입니다. 바울의 본래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사울! 사울의 헬라어는 ‘사울로스’입니다. 여러분, 사울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 왕입니다. 이 사울의 출신지파는 베냐민 지파이고, 그 이름의 뜻은 ‘요구하다’입니다. 요구는 채워지면 또 다른 요구를 낳기 때문에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 역시, 왕위에 앉았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권력의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망한 왕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기에 사울 왕은 선정을 펴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비참하게 죽었으니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사울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바울 역시 그랬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의 순교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사울이 등장합니다. 그는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은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13장에서 1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그 이름을 바울 “파울로스”로 바꾸어 사용하였습니다.
헬라어 파울로스의 뜻은 “작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요구하다’에서 ‘작다’로 바꾸어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사용한 것입니까? 내가 주님 앞에 서고 보니 내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헬라어 ‘파울로스’라는 단어는 동사 ‘파우오’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뜻은 ‘포기하다’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울이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삶을 철저하게 포기하고 주님만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하기를, 빌립보서 3장 5-8절에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베냐민 지파이고, 히브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지만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살아오면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살아왔는데, 이제 주님을 만나니 자신을 위한 삶은 다 필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왜 그런 삶을 산 것입니까? 주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주시고, 주님만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주님만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어 이 땅에서 참된 가치의 삶을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으십니까?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자신을 위한 삶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 살고자 스스로 작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바울이다’라는 말은, “그리스도 앞에서 작은 존재입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러한 고백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작은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을 ‘사도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도’는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라는 이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보내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사도란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래 이 단어의 유래는 황제나 왕으로부터 특수한 임무를 띠고 파견된 자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매우 중요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 왕이 친히 어떤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탁하고 그를 축복하며 떠나보냄을 받은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사도입니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면, “대사”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의 사도직이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바울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른 제자들처럼 살았던 제자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그 주님을 친히 만났다. 다메섹도상에서 나는 그 주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주님이 내게 친히 그 임무를 주었노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종종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이 문제가 되는 부분에서 자기변명을 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내가 사도가 아니더냐 내가 그 주님을 친히 보지 못하였더냐’(고전 9:1) 말합니다. 바울은 왕 중의 왕이신 그분을 직접 보고, 그 경험속에서 자기를 보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위하여, 나를 이 놀라운 사명을 위해서 불러주신 그분이 또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의 의미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자신을 사도로 인식합니까? 좁은 의미로서는 예수님의 12제자 같은 분이 사도이겠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지금 그분 앞에 왔습니다. 주님 앞에 나왔을 때 나를 받아 주시고 나를 용납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새롭게 하시고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다시 세상으로 나를 보내셨음을 기억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을 둘로스, 파울로스, 아포스톨레스로 로마의 성도들에게 소개하였습니다. 순서적으로 볼 때, 주님 앞에서 둘로스가 되는 사람, 주님 앞에서 작은 사람, 즉 주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노예가 되고 스스로 작은 사람이 되어 주님의 택하심을 받는다고 한다면, 사실 우리 모두는 가망이 없는 인생들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인생을 살펴보면 하나님께로부터 택정함을 입은 것이 가장 먼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먼저 택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디 바울만 그렇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특별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부르셔서, 온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약하고 어리석고 보잘 것 없는 우리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셨고, 주님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자신을 불러 주신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난 뒤, 그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 복음은....” 바로 복음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 기쁜 소식”입니다. 이 복음이 무엇입니까? 2절의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 약속해 오셨던 당신의 아들, 그분이 곧 복음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합니까?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복음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까?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분만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분, 우리를 영원한 길로 나아가게 하시는 분, 죽음을 깨뜨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아무리 천하를 움직이는 권력을 쥐고 있어도, 명예가 아무리 태산처럼 높아도, 그것들은 나를 살리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가치도 죽음 앞에선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주님의 사랑을 인식한 뒤, 자신은 “복음을 위한 삶”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복음과 생명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고백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날아오는 돌멩이에서 죽을 위기에서 세계 곳곳을 누비며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입니까? 이런 열정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자신과 같은 죄인을 택정해 주신 그 은혜와 깨달음, 그러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솟구치며 복음의 열정이 꽃 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삶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 역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 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들의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 어떻게 달라져야 합니까?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으로 자신을 소개하였지만, 4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우리 주 그리스도”라고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6절에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절에서도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 편지를 받는 로마 사람들에게로 확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이것은 편지를 받고 있는 로마의 성도들, 특별히 이 책을 읽고 있는 신약의 모든 성도들에게 바울은 마찬가지로 둘로스가 되고 파울로스가 되고 아포스톨레스 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2천년 전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로마 교인들에게 하셨던 말씀일 뿐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자신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보다 애당초 뛰어난 도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우리는 죄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먼저 택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안다면, 우리 역시 주님 앞에서 종으로, 작은 자로, 보냄을 받은 사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의 사랑의 은혜 앞에서 복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택함을 받은 많은 인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왕은 하나님께로부터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가 되지 못하고 자신을 키우려 했습니다. 그 결과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 역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지만, 주님 앞에서 파울로스가 되지 못하고,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려다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역시 불러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고백한다면, 오늘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의 사랑 앞에 우리 자신을 드리고, 주님 앞에서 더 낮아지고 낮아지는 파울로스가 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둘로스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복음을 위해 사는 ‘아포스톨레스’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누구인지를 바르게 인식 할 때,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매 순간마다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수 많은 사람 중에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심에 감사합니다. 아버지, 사실 우리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부르셔서, 온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나의 삶 가운데 찾아 오셨고, 주님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고백한다면, 오늘 우리도 주님처럼 더 낮아지게 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둘로스, 종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복음을 위해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매 순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복기도>
지금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하심이, 주님의 사랑 앞에 자신을 드리고, 주님 앞에서 더 낮아지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머리위에 가정과 직장과 삶의 모든 영역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