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19 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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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도전 432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 440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찬송 400 험한 시험 물 속에서 / 433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본문 마 14:22-32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오병이어 사건 직후에 일어난 일이다. 주님께서 소외되고 병든 자들, 귀신들린 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만나셨고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모인 무리들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하늘의 양식을 배부르게 먹었고, 이후로 주님은 제자들을 갑자기 재촉하셔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하신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주님께로 몰려든 군중들은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확신하고 온 자들은 없었을 것이다. 이들 중 어떤 무리는 예수님의 신비로운 권능 때문에 자신의 육체적 질병과 마음의 질병을 고침받고자 찾아왔을 것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당대 큰 화제가 되었던 유명인사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으로 찾아왔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혹 이단적인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은 아닌지 감시하는 마음으로 찾아왔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얄팍한 신앙으로 예수님을 자신들의 정치적 상황을 해결해 주실만한 분으로 여겼다.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으로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건저주실 세속적인 지도자로 여겼던 것이다.
먹을 것이라고는 도무지 구할 수 없던 척박한 곳에서 아주 작은 양으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신 사건을 무리들은 경험하였다. 아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던 그들은 자신들을 풍족하게 먹이신 분이야말로 진정 이 나라를 독립시키실 세속적 지도자감으로 확신하게 되었고,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정치적 왕으로 세우고자 부추겼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믿음이 확실하게 세워지지 않은 제자들 역시 무리들의 선동 속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치 곧이어 만나게 될 ‘풍랑 속의 흔들리는 작은 배' 마냥 그들의 믿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님은 무리들을 흩으시고 제자들을 빨리 그 자리를 뜨게 하신 것이다.
여러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가? 병든 자를 고쳐주시기 위하여?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많은 이들을 풍족히 먹이시기 위하여? 물론 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주된 목적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막10: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 가운데 성육신 하신 그 본질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이다. 물질의 풍요, 일용할 양식, 질병의 치유 다 중요한 것이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문제, 본질적인 문제 때문에 주님은 이 땅에 오셨다.
하지만 많은 군중들은 복음에 집중하지 못하고 단지 눈 앞의 일들에만 주목하고 있다. 질병이 나은 일, 귀신이 떠나간 일, 일용할 양식을 얻은 일 모두 중요한 사건이다. 하지만 눈 앞의 현상에만 주목하다보니 더 앞에 있는 것을 못보고 있다. 눈 앞에 것들에만 집중하다보니 그들의 눈 앞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눈 앞의 것들에만 급급해 있는 어리석은 군중들로부터 제자들을 구별하여, 눈 앞의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미 군중들의 선동에 마음이 동요되기 시작한 제자들은, 마치 그들이 몰고 있는 작은 배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크게 요동하는 그 작은 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풍랑을 맞았다. 그들은 적어도 몇 시간 동안 풍랑과 싸우며 배를 안전한 곳까지 움직이려 했지만 점점 더 배는 풍랑의 중심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몇시간이나 험한 파도와 싸운 덕에 몹시나 기진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새벽 3-6시쯤 되었을때 저 멀리서 희미한 것이 바다위로 스물스물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놀랐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거센 파도가 당장이라도 제자들이 탄 배를 집어삼킬 것처럼 몰아쳐 오는데 그 파도들을 밟으며 걸어오는 누군가가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 유령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존재로부터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라는 음성을 듣는다.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지만 아직 눈 앞의 파도가 해결된 상황이 아니었다. 여전히 배는 요동쳤고 거센 풍랑이 배를 쪼갤 것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여전히 지극히 연약한 인간이 충분히 두려워할만한 상황이었고, 공포를 느낄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는 이유는 분명하다. 눈 앞에서 위협적으로 일고 있는 그 모든 풍랑을 발로 밟고 계신 분께서 이제 그들과 함께 하시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며 만물을 그분의 기쁘신 뜻 가운데 움직이시는 천지의 주재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 수 있는가?
제자들을 집어삼킬것 같은 풍랑이 일어나고 있다. 끝없는 절망과 괴로움 속에서 아무 소용없는 노젓기 밖에는 이 풍랑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분께서는 이 모든 풍랑을 발로 밟고 계시다. 시 89:9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이 말씀처럼 모든 풍랑들을 다스리시고 그 파도가 일어날 때 잔잔토록 발로 밟고 계시는 전능하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로 그러하다. 마태복음의 기록연대는 주후 65-70년 사이에 기록되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유대교는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였고, 로마 역시도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 제자들을 박해하였다. 특히 우리가 잘 알다시피 네로 황제 시절 전대미문의 박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초대교회가 풍랑을 맞았다.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고, 로마제국 역시 황제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반역법으로 잡아 모조리 사형시키고 있다. 마치 교회는 거대한 바다 한 가운데에서 파도에 따라 이리 저리 휩쓸리며 요동하는 작은 배와 같았다.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가 풍랑 가운데 뒤집힐 것 같았던 것처럼, 당장이라도 교회는 세상의 풍랑 속에 수장될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모든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 모든 권세들을 발로 밟고 계시는 주님을 보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평강을 누릴 수 있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마찬가지로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힘겨운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분들이 계신가? 신앙을 이유로 여러 환난과 박해 가운데 계시는 분이 있는가? 도저히 견뎌내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분이 있는가? 당장이라도 눈 앞에 일어나는 풍랑들이 날 집어 삼킬 것만 같은 위기속에서 어찌 손을 써야 할지 알지 못하는 무기력함과 무능력 가운데 좌절하고 계시는 분이 있는가? 지금 여러분의 눈을 들어서 맞은 편에서 다가오고 계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길 축원한다. 우리의 생각보다 크고 광대하신 주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괴롭게 만드는 그 모든 풍랑들을 발로 밟고 계시다. 눈 앞의 풍랑이 실로 거대하고 위협적이지만 그럴지라도 그 파도는 주님의 발 아래에 있다. 주님께서 그 모든 풍랑을 다스리고 계시다. 그러니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을 신뢰하라. 우리가 고난 가운데 놓였을 때 우리를 너무나도 긍휼히 여기셔서 물 위를 걸으셔서라도 빨리 찾아오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오직 주님을 간절히 붙드는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어지는 본문 28절을 보라. 베드로는 묻는다. ‘주님이십니까? 주님이시죠? 내 주님 맞으시지요? 주님 곁으로 가길 원합니다. 나로 하여금 주님이 서 계신 물 위로 올라서게 하여 주십시요’ 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거친 풍랑들을 밟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든 풍랑을 밟고 서 계신 주님 곁으로 가길 원했다. 그가 주님처럼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뭔가 주님처럼 초자연적인 능력을 나에게도 달라는 요청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자신들을 괴롭게 만드는 이 거센 파도의 위협을 주님께서 발로 밟고 계신 것처럼, 나도 나를 괴롭게 만드는 이 고난을 밟고 일어서게 해 달라는 간구였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로 그러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능하신 왕이시다. 온 천하에 그분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인생 속에 몰아쳐 오는 모든 문제들도, 그 문제들이 얼마나 거대하든, 얼마나 강력하든, 얼마나 위협적이든, 얼마나 교묘하든, 결국 주님의 발 아래에 있을 뿐임을 믿으시길 바란다. 따라서 우리 인생 가운데 마주하게 되는 모든 문제들은 결국 주님께로 나아갈 때 해결될 수 있다. 베드로는 분명 주께서 모든 괴롭게 만드는 고난의 문제들을 꾸짖고 잠재우실만한 권능이 있으심을 확신했다. 그래서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베드로의 믿음이 있기를 축복한다. ‘주님, 나를 명하사 나를 괴롭게 만드는, 나를 울게 만드는, 나를 근심하게 만드는, 나를 힘겹게 만드는, 나를 아프게 만드는 모든 문제들을 밟고 일어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어려움과 고난들을 밟고 승리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이루신 그 승리에 나로 동참하게 하시사 모든 영광을 주님께 올려드리게 하소서’ 할렐루야!
여러분, 삶의 여러 문제들을 가지고 오셨는가? 괴로운 상황과 눈물나고 깊은 한숨 쉴만한 상황들을 가지고 주님 앞에 오셨는가? 우리 주님께 다 아뢰시기를 바란다. 쏟아놓으시길 바란다. 주님만이 모든 문제들을 능히 해결하신다. 주님만이 모든 어려움들을 능히 감당할만한 힘을 주신다. 주님만이 모든 얽히고 섥힌 문제들을 풀어주신다. 주님만이 사방이 막힌 곳에서 피할 길을 내신다. 주님께 답이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삶의 문제들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자. 전능하신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님께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위협들, 문제들을 발로 밟고 일어서게 하신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여 그렇게 한발 한발 믿음으로 내딛다가 얼마 못가서 넘어지는 경우들이 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가 그렇지 않은가? 마 14:29 를 보라.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그는 예수님을 신뢰하였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향하여 배 밖으로 발을 내밀기 시작한다. 어쩌면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물 위를 걸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라.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 곁으로 나아가길 간구하며, 주님의 응답에 힘입어 믿음의 첫발을 내딛으려 할 바로 그 때 바다는 어떤 상태였는가? 29절 중반부를 보면 ‘물 위로 걸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 물은 복수로 사용되었다. 즉 베드로가 배 밖으로 발을 내밀어 파도를 딛고 일어서려고 하던 그 때에도 여전히 바람은 매우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고, 그들이 타고 있던 배는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요동치고 있었으며, 거센 풍랑으로 인하여 사방에 물이 튀고, 배 안으로 물이 들어오고, 몇몇 제자들은 배 밖으로 물을 퍼내는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매우 위협적인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의 두 눈이 눈 앞의 거센 파도에 주목하지 않고 손 내밀면 닿을 거리에 있는 주님께만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이었는가. 그의 믿음은 곧 능력이 되어 주님처럼 모든 풍랑을 밟고 주님께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지 않았는가. 하지만 우리와 다를 바 없던 베드로 역시 주님께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점차 풍랑을 향하기 시작한다. 매섭게 부는 바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확실할 때에 지금의 풍랑과 바람은 밥이었다. 그것이 베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무섭게 일고 있는 풍랑이 주님보다 강해보일 때, 그것이 주님보다 크게 보일 때 그의 발이 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경험하는 고난, 괴로움, 핍박들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줄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약해질 때, 주님보다 지금의 고난이 더 커 보일 때, 주님보다 지금의 괴로움이 더 크게 느껴질 때, 주님보다 지금의 풍랑이 더 강해보일 때, 우리는 더이상 견고하지 않다는 것이다. 넘어질 수 밖에 없다.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문 속의 베드로처럼.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상황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어려운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의 손이 언제나 우리를 잡을 수 있는 거리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31절을 함께 읽어보자.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본문의 말씀이 진정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사실은 무엇인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빠져가는 베드로를 향해 손을 뻗으신다. 성경은 ‘즉시’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주님은 손을 뻗어 그를 잡으시기를 그가 완전히 머리까지 잠긴 이후에 뻗지 않으셨다. 그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바닷물을 먹을만큼 먹고 그의 생명이 꺼져갈 때 쯤 그 손을 잡지 않으셨다. 성경은 ‘즉시’ 라고 말한다. 그의 발이 더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갈 그 때, 더 깊은 난관들이 찾아올 그 때, 더 큰 문제들로 인하여 너무나도 괴로운 마음에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탄식할 때, 주님께서 즉시 손을 뻗어 베드로를 잡으셨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가 부모의 손을 붙잡고 넓은 공원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아이는 맞은 편의 엄마를 바라보며 한걸음씩 내딛기 시작한다. 아이의 두 눈은 자신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엄마의 품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걸음씩 아장 아장 걷는다. 아이는 걸음이 서툴러서 이것 저것 신경쓸 것이 많아 주변을 돌아보지 못해서 이 순간 자기 혼자 걷는 중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늘상 아이의 뒤에는 노심초사 아빠가 함께 있었다. 혹시라도 발을 헛딛을런지 몰라서 넘어지려할 때 바로 잡아줄 수 있는 거리에서 아이를 지켜보고 있는 아빠의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곁에도 변함없이 주님은 함께 하신다. 늘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가 더욱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믿음의 한발 한발을 내딛기를 바라신다. 물론 우리의 믿음은 늘 연약하여 그렇게 믿음의 한 걸음씩 걷다가도 또 시험에 들어서 넘어지려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변함없이 우리의 자비하신 주님은 우리를 잡아주셔서 넘어지지 않게 하실 것이고, 혹 넘어졌다 할지라도 다시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실 것이다. 그러니 늘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자. 그분은 즉각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실 정도로 늘 우리 곁에 계시다.
말씀을 맺는다. 늘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 노심초사 우리를 지켜보시며, 또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모든 문제와 고난과 역경들을 딛고 일어서길 바라시는 주님이 계시다. 모든 위협들과 고난과 풍랑들이 우리를 집어삼킬듯이 밀려오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인생 속 문제들의 모든 답이 주님 안에 있음을 기억하며, 모든 문제들도 다스리시는 주님, 승리하시는 주님, 붙드시는 주님께 더욱 나아가시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하자.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참으로 연약하여 자꾸만 주님을 보지 못하고 풍랑을 바라봅니다. 동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염려와 걱정거리들만 주목합니다. 능력의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당장 눈 앞의 거대한 풍랑에 두려워집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능하신 주님, 승리하시는 주님, 붙드시는 주님을 확신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굳건히 잡아 주옵소서. 실족하고 넘어지는 우리의 팔을 붙들어 주옵소서.
433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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