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의 생각법

사무엘하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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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의 생각법 / 성공과 성과만 중시되는 세상 고수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살리는 선한 지혜의 고수가 되어야 합니다.
막상 싸움을 걸자 그는 누구보다도 냉혈한 검객이 되었다. 한번 칼에 깊숙이 찔리면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지만 유혈이 낭자한 잔인한 승부, 이것은 정신력 싸움이다. 누구든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승자가 될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바둑입니다.
요즘 저는 설교준비를 할 때 책 한, 두권을 읽는 편인데,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읽은 책이 바로 이 책, 조훈현이 쓴 ‘고수의 생각법’입니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이번에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수가 되고 싶어합니다.
하다못해 글씨 쓰는 것, 집청소하는 것에도 고수가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분야별로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고수가 대접받는 시대입니다.
조훈현은 우리나라 바둑고수들중 전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세계 최초로 알파고와 바둑 대결을 한 이세돌이 유명하지만 그 전에 우리나라 바둑을 세계최고 반열에 올려놓은 사람이 바로 조훈현입니다.
그는 1953승이라는 세계 최다승, 160회 우승이라는 세계 최다 우승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책에 보면 그는 어릴적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최고의 고수였던 세고에 겐사쿠의 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9년 동안 그의 집에서 제자로 들어가 살았는데 희한하게 세고에가 가르쳐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바둑 기술들을 가르쳐주지 않았고, 그냥 밥 같이 먹고 어쩌다 한두번 바둑을 같이 두는 게 전부였다고 합니다.
대부분 바둑의 답은 혼자서 찾았지, 스승님이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훈현은 어떤 기술도 배우지 않았지만 스승인 세고에에게 많이 배웠고, 그 분을 엄청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배운 것은 바둑 기술이 아니라 바둑고수의 인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훈현은 좋은 인격의 사람에게서 좋은 바둑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어찌보면 오늘 말씀에도 두 종류의 고수가 등장합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고수의 자질을 깨닫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문]
오늘 말씀의 배경을 먼저 보겠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제압한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의 긴장관계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남쪽 유다지파 출신이다보니 북 이스라엘 지파들의 불만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곧바로 드러난 게 바로 사울왕의 지파였던 베냐민 지파 세바의 반란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제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세바의 반란이 일어나자 빠르게 진압하고자 했습니다.
늦추면 늦출수록 문제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진압작전을 압살롬의 지휘관이었던 아마사에게 맡깁니다.
반대편 장군을 포용하고, 자기 밑에 있는 요압을 견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아마사가 유다 지파의 민병대를 제 때 모집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요압의 동생 아비새에게 세바를 추격하라고 명령합니다.
원래 이런 일에는 항상 요압이 출동했는데 다윗은 요압이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죽였기에 그를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철저히 기회주의자입니다.
그는 이 기회를 틈타 자기 동생과 같이 출전하여 아마사를 몰래 죽여버렸고, 자신이 직접 세바를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바가 숨어든 곳이 아벨성입니다.
요압은 세바를 잡아야만 다윗왕에게 다시 자신의 지위를 요구할 수 있었기에 어떻게든 그를 잡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성 앞쪽에 토성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보면 성벽을 타고 올라가기 어려울 때 토성을 쌓아서 무차별 공격을 퍼부어 성문을 엽니다.
그는 어떻게든 세바만 잡으면 되기 때문에 성 안에 있는 무고한 사람들이 죽던말던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세바만 보이지 선량한 일반 희생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말해서 승리만 노리는 전쟁 기술자, 전쟁 고수인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의 모습은 세상 모습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성공과 성과를 위해서는 매우 혹독하고 잔인하기만 합니다.
엊그제 겨우 23살인 한 여성 근로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기업 빵공장에서 일하던 친구였는데 소스 배합기에서 야근 근무하다가 앞치마가 빨려들어가는 바람에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죽음입니까?
안전장치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2인 1조 근무였는데 그 옆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취한 조치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다음날 그 기계만 흰 천으로 가려놓고 평상시와 똑같이 기계를 돌렸습니다.
그 공장에서 죽은 한 젊은 여성 노동자는 곧바로 잊혀진 채 여전히 기계는 돌아가며 상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처럼 성공과 성과만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경시됩니다.
이런 회사 경영자는 돈버는 사업 기술자로서 오늘 말씀의 전쟁 기술자 요압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비정한 고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단 세상에만 이런 모습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도 이런 모습들이 교묘하게 숨어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과도한 성과욕심때문에 정작 사역의 목표인 사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회자 역시 목자가 아닌 목회 기술자가 되면 이런 현상들이 발생합니다.
목자는 양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자이지만, 목회 기술자는 자기 욕심을 위해 혹은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도구화 합니다.
마치 의사가 돈 벌 욕심만 있고, 정작 사람을 고치고, 살리는 데는 관심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이전에 섬기던 교회를 나오게 된 것도 생각해보면 제가 점점 기술자가 되어가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도 바로 이것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누구보다 좋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돌보는 목자가 되어야만 했는데 말씀 기술자들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근본적인 의도는 잊어버린 채 그 말씀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데에만 혈안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을 향한 자기 희생과 사랑, 포용, 긍휼은 없고, 백성들을 향한 정죄와 판단, 배제만 난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냉혹한 기술자들이 판치는 세상 속에 지혜로운 고수들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전쟁 기술자 요압이 여느 전쟁처럼 성벽을 무너뜨려 성을 초토화 시키려 할 때 한 무명의 슬기로운 여인이 소리를 외치며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입니다.
16절입니다.
그 성읍에서 슬기로운 여인 하나가 이렇게 외쳤다.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좀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장군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요압장군께 이리로 가까이 오시라고, 말씀을 좀 전하여 주십시오.”
아벨성 안에 어떤 남자들도 나서지 않는데 한 연약한 여인이 나선 것입니다.
그녀는 요압 장군을 불러 그를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몇가지 근거를 들어 왜 아벨성을 공격하느냐며 요압에게 따져 묻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옛날 속담에 물어볼 게 있으면 아벨에 가서 물어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이 성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들이 많이 살고 있었을 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성에 가서 물어보면 사람들이 무슨 문제든지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익하고 훌륭한 성을 무너뜨리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 묻습니다.
둘째, 이곳 사람들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 평화롭고 충성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평화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곳을 왜 공격하여 다 죽이려고 하는 지 묻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런 아벨성을 이스라엘의 어머니 같은 성읍이라고 부르며, 주님이 주신 유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압이 이 곳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은 하나님과 다윗왕께 반역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윗왕을 위해 세바를 잡으려는데 이게 오히려 왕께 반역하는 것이 된다고 말하니 요압은 매우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절입니다.
요압이 대답하였다. “나는 절대로 그러는 것이 아니오. 정말로 그렇지가 않소. 나는 삼키거나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오.”
얼마나 지혜롭고 용기있는 여인의 모습입니까?
당시 전쟁은 남자들이 하기 때문에 요압과 만나더라도 남자가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쥐죽은 듯이 가만있고, 힘없는 무명의 여인이 나서서 요압에게 따져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인의 모습을 보며 두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은 지혜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사회는 주로 힘있는 남성 위주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심각한 문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여성들 입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25장에 나온 아비가일이 대표적입니다.
남편 나발이 큰 부자인데 다윗의 요청을 무시하는 바람에 집안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그때 재빨리 지혜로운 행동으로 다윗의 마음을 풀어준 여성이 바로 아비가일입니다.
또한 사무엘하 14장에 드고아 출신의 한 지혜로운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요압의 부탁으로 다윗 왕앞에 나가 한 이야기를 통해 다윗을 설득합니다.
그 여인 때문에 다윗은 형 암논을 죽이고 도망친 압살롬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허락해주었습니다.
그녀들의 특징은 모두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흥미롭게도 잠언에서도 지혜를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의인화합니다.
그만큼 지혜란 힘을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압은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입니다.
힘과 기술에 있어서는 그는 누구보다도 고수입니다.
그러나 그 힘이란 지혜 앞에서는 하수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축구에서도 힘과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결국 축구지능의 높고 낮음이 훌륭한 선수를 판가름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잘 살아가는데에도 진짜 중요한 것은 힘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성경도 우리에게 힘있는 자가 되라고 말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지혜만 다루고 있는 잠언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물론 힘이 문제를 해결할 때도 있지만 힘과 힘의 대결은 반드시 희생자를 만듭니다.
그러나 지혜는 힘이 해결할 수 없는 일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벨성의 많은 남자들이 힘으로는 도저히 무자비한 요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여인의 지혜가 요압을 멈춰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런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지혜의 근본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잠언 9:10 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상황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 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 여인이 사용한 지혜가 자신이 잘먹고 잘사는 지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둘째,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을 살리는 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21절부터 입니다.
“그 일이 그런 것이 아니오. 사실은 에브라임 산간지방 출신인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는 사람이, 다윗 왕에게 반기를 들어서 반란을 일으켰소. 여러분이 그 사람만 내주면, 내가 이 성읍에서 물러가겠소.” 그 여인이 요압에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머리를 곧 성벽 너머로 장군께 던져 드리겠소.”그런 다음에 그 여인이 온 주민에게 돌아가서 슬기로운 말로 설득시키니,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잘라서 요압에게 던져주었다. 요압이 나팔을 부니, 모든 군인이 그 성읍에서 떠나, 저마다 자기 집으로 흩어져서 돌아갔다. 요압은 왕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이 무명의 여인은 지혜로운 말로 한 성읍 전체를 살렸습니다.
무자비한 살육의 현장이 될 뻔했는데 반란군 지도자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여기서 그녀는 두가지 위험을 무릅쓴 것입니다.
여인으로서 그 당시 최고의 장군이던 요압과 마주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것 뿐입니까?
그녀는 그 성에 있는 백성들을 모두 설득해야만 했습니다.
반란군 지도자 세바가 분명 그 성 안에 있었을텐데 어떻게 백성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아 우리가 알 순 없지만 분명 목숨을 건 설득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험악한 세상 속에도 생명을 살리는 무명의 지혜자들을 숨겨놓으셨습니다.
그 역할을 우리 그리스도인들, 교회들이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소금과 빛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소금이 무슨 역할을 합니까?
소금은 음식 속에 스며들어 음식의 맛을 냅니다.
그리고 소금은 음식 속에 스며들어 음식이 부패하는 것을 막아줍니다.
주님이 무명의 지혜로운 여인을 아벨성에 숨겨 놓으신 것처럼 주님은 이 세상 속에 무명의 우리를 숨겨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스며들어가 자신을 녹여 세상의 맛을 내는 역할을 해야합니다.
어둠 속에 빛을 비추고, 죽어가는 것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 분은 작은 시골마을 나사렛이란 동네에 숨겨진 소금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십자가는 온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지혜 그 자체였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지혜라고 부르지 않지만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이 이를 증거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멸망당할 뻔한 성에 무명의 지혜로운 여인을 숨겨두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죽어가는 세상가운데 지혜의 중재자로 숨겨두셨습니다.
우리는 성과와 성공에만 집착하는 세상의 기술자가 아닌 생명을 살리는 지혜의 고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길이며 최고의 고수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처음 말씀드린 조훈현이 일본 고수의 집에서 먹고 자며 배웠던 그 고수의 지혜를 우리는 날마다 말씀묵상 속에서 최고의 고수이신 주님과 함께 먹고 자며 배워야 합니다.
‘고수의 생각법’,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살리는 지혜’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다 그런 고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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