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본질(롬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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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 모든 종교에 제사 의식은 있었음. 비교종교학. 집례자, 재물, 희생 공통점. 성경의 예배란 무엇인가? 구약의 제사와 신약 예배 개념을 모두 집합하면 “하나님을 수단화 할수없다. 하나님 자체가 목적” 모든 종교는 지향점이 자기 자신과 현세의 축복.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는 목적은 관계 회복.
출애굽기 가나안 사건. 모세가 나도 안갈 것. 가나안의 풍요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목적. 하나님이 수단 되지 않고 목적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의 본질. 다윗 주님의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왕궁에 있는 것보다 좋다. 구원의 기쁨을 거두어가지 마소서.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도 목적이 되지 않았음.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한 목적 되는 삶.
계시가 완성되는 신약에서 사도바울은 오늘 로마서에서 예배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정리하고 있음. 첫 번째로 예배의 동기가 무엇인가? 두 단어.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1~11장까지 전체를 받는 말. 내용은 하나님의 모든 긍휼과 은혜. 룻기를 통한 하나님의 열심과 긍휼의 마음을 보았음.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권면. [앞에서 말함] [곁에서 말함].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의 모든 예배와 헌신과 순종의 동기가 되어야 함.
헌신하고 순종하면 축복이 있다는 말 사용. 자식이 잘되고 복을 받는다. 그러나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음. 축복이 현세에 물질과 자녀, 건강의 축복이라 생각하면 아주 위험한 사고. 성가대원, 구역장, 교사, 식당에서 봉사하는데 순수한 동기로 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여기서 멈추면 시험에 든다. 봉사하는데 장사, 병, 인정 못 받으면 시험. 축복이 있지만 축복만을 봉사의 동기로 사용하면 안된다. 또 다른 잘못된 것 두려움으로 예배하고 봉사하는 것. 1)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봉사와 예배의 동기가 약해짐 2) 심판이 두려워서 하는 예배와 헌신은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3) 두려움에서 비롯된 예배는 환난이나 역경을 견디지 못한다. 율법주의에 빠짐.
모든 예배와 헌신과 봉사의 동기는 하나님의 자비!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용서하시고 성령을 부으셔서 죄를 이길 힘을 주시고 넘어가지 못하는 죄를 부활시켜 완벽하게 하실 것에 대한 무한한 감격. 하나님의 헤세드에 대한 전인격적 반응. 예배드릴 때 사랑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동기. 목사로 부름을 받았을 때도 신내림 받는 것처럼 하는게 아니다. 인격적으로 끌려가는 것. 봉사도 마찬가지. 예배도 마찬가지 모든 하나님 앞에 헌신과 나옴의 동기는 사랑. 그래서 자비하심으로 나도 너희에게 권한다고 사도바울이 말함.
예배의 내용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몸을 드리는 것. 산 제물이 역설. 죽어야만 기능을 하는 것이 재물. 산이라는 말을 붙여서 의미를 강조. 살아서 너희의 몸을 죽이라! 몸은 헬라어 소마. 영어로 BODY. 몸뚱아리 자체. 성경은 몸을 아름다운 창조물, 영광을 돌리는 도구. 몸을 통해 에덴을 경작하고 세상을 섬기라고 주신 것. 타락으로 몸으로 온갖 죄를 짓는 불의의 도구로 전락. 온갖 욕망으로 몸이 더러워 짐. 몸을 만드신 목적을 뒤바꾸는 동성애 상태. 하나님께서 이 몸을 다시 쓰기 원함. 성령께서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심. 성령의 전이 되었다. 의의 병기로 드리라. 죄의 도구에서 의의 도구로 바뀐 것이 우리 몸. 새로운 몸 담론.
당시 그리스-로마 철학의 영향을 받은 로마 교인들은 충격적인 말. 스토아 철학은 몸을 영혼의 감옥으로 봄. 영혼이 자유롭기 위해서 몸에서 벗어나야 함. 몸은 악한 것. 하나님이 인간의 몸에 들어온다는 사상을 상상 못함. 몸을 떠나 영혼이 창조된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이데아. 소크라테스 독배도 이 배경. 동양도 마찬가지. 금욕과 몸을 제어하는 것을 통해서 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 싯다르타 깨달음 위해 엄청난 고행. 몸의 한계를 벗어나야 정신이 자유롭게 된다고 생각. 동서양을 막론하고 몸은 부정적.
그러나 기독교는 몸에 대해서 하나님의 창조물,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 성령의 전, 의의 도구로 사용해야 할 대상으로 몸에 대해 집중하고 있음. 100년전까지만 해도 심리와 마음이 철학의 대상. 오늘날은 모든 관심이 몸을 거점으로 한 몸 산업 발달. 헬스, 뷰티, 성형... 이 몸을 가지고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살아서 몸을 죽이는 것이 바울은 예배의 승부처가 몸에 있다고 봄. 승부처가 무엇인가? 절대로 뺏기지 않아야 하는 곳. 다시 역전을 일으킬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가 승부처. 영적 예배의 전략적 요충지를 어디로 보나? 몸! 예배도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몸으로 드리는 예배. 거듭난 사람에게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처소가 되었으니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훨씬 중요하다. 성령이 씻어서 깨끗하게 된 마음, 이후에 예배가 열납되고 안되고의 승부처는 몸에 있다.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함. 예배의 핵심은 몸에 있는 것.
오늘날 몸의 예배는 무엇인가? 예배당 장소에 나와서 드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시공간에 앉아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예배하는 것이 중요. 화면으로 드릴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많다. 하나님은 디지털 신호안에 있으면서 생각으로만 드리는 예배를 원하지 않는다. 창조된 시공간 안에서 몸으로 와서 만나서 예배를 드리고 교재하고 지어져 가기 원함.
몸 예배는 구체적인 섬김과 실천으로 이어지는 예배여야 함. 마음과 생각, 입술로만 예배드리면 안된다. 내면적이거나, 추상적인 예배, 신비로운 체험만 추구하는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게 못함. 우리의 예배의 마지막은 몸으로 수행하는 예배.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결단하고 사는 것. 그래서 예배의 마지막은 항상 결단으로 끝나야 한다.
지적(신앙고백) 중심의 전통적 예배와 체험을 중시하는 예배. 지적 충족을 주는 예배는 뜨겁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을 만든다. 청년들의 체험과 감정 중심의 예배는 감각과 체험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 거룩하고 뜨겁고 눈물이 있지만 예배가 끝나는 순간 다시 돌아간다. 감성주의의 문제이다. 신앙고백 중심 예배나 감성적 예배 모두 한계가 있다. 이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무엇인가? 머리로 깨닫고 마음으로 느낀 다음에 완성은 결단! 살자! 월요일부터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
결단 없는 예배, 삶이 따르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예배. 헛된 예배, 쭉정이 예배이다. 마지막에는 몸이 가야 한다. 몸이 밀고 나가는 곳까지가 영적 예배이다. 밀고 나가다가 거기서 당하는 수치와 조롱이 있다. 더 이상 나가지 못하는 나의 한계가 있다. 그 슬픔과 회개가 예배 가운데서 터지고 그때 선포된 말씀 “고난당할 때 기뻐하라 천국이 너희 것이다” 사죄의 말씀이 덧입혀지고 기쁨이 생겨야 함. 지난 한 주 삶이 따르지 않는 사람은 예배가 공허하다. 지적동의, 감성적 합일로 끝나면 반복될수록 중독되고 감동이 사라지고 영적 매너리즘에 빠짐. 극복은 하나 밖에 없다. 몸을 드리라! 실천! 몸부림치는 사람이 한계 속에서 회개,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성취하면서 영혼이 확신으로 바뀌는 것.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합당한) 예배니라 예배는 종교의식으로의 예배와 삶으로 드리는 예배. 1시간 드리는 예배(의식). 두 가지가 통합된 예배가 진정한 예배, 영적 예배이다. 이것이 분리된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는다. 이사야 시대 수 많은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이 가증스러워 하였음. 가인과 아벨. 가인의 재물만 안받으신게 아니라 가인의 삶도 안 받으심. 무서운 말.
우리 예배의식 안에는 삶이 농축되어야 한다. 찬양에 우리 삶이 얹혀야 함. 헌금 봉헌에는 한 주간 물질을 어떻게 관리하고 살았는가에 대한 모든 삶이 얹혀야 한다. 악한데 쓰지 않고 기뻐하는 방향으로 사용했는가? 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회개와 그럼에도 예수의 피에 의해 이미 나의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기뻐하며 다시 실수하지 않겠다고 결단할 때 하나님이 헌금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삶 전체를 받으심. 그게 분리되면 가인의 예배, 가증스러운 예배가 되는 것.
우리의 예배는 어떠한가? 오늘 예배는 너무 감각과 편리, 수동적으로 이루어짐. 교회쇼핑으로 물건 구입하는 것처럼 고르다가 예배드렸다고 착각. 오늘 말씀을 듣고 나가보라. 한 발자국 나가면 거기가 하나님이 임재하는 지성소로 변화 될 것. 마귀의 견고한 진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것. 그리고 한계를 만나면 오라! 새벽에도 수요일에도 주일마다 와서 다시 공급받고 새 힘을 얻고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 사이에 구역모임이 시작. 구역 속에 있을 때 나의 시험과 한계를 지탱해 줄 이웃이 되어 줄 것. 이런 교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