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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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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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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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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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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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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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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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0UNLIKELY
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0.16UNLIKELY
Conscientiousness
0.13UNLIKELY
Extraversion
0.44UNLIKELY
Agreeableness
0.6LIKELY
Emotional Range
0.19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Language
Social Tendencies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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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사마리아는 사마리아 사람이 사는 곳이고,
갈릴리는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니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는 누가 살까요?
“경계인’이라고
어느 한 집단이나 무리에 끼거나 적응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사마리아에 사는 것도 아니고
갈릴리에 사는 것도 아니고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사는 사람들이죠.
여기에 누가 사는가 봤더니,
12절에
나병환자 10명이 살고 있습니다.
나병이라는 것은,
한센병이라기보다는,
심각한 피부병인데, 피부가 벗겨지거나, 붓거나, 진물이 나거나, 움푹 들어가거나 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나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어디에도 끼지를 못하는 것이죠.
이 나병은 전염성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를 않고,
성경에서도 진영 밖에서 치료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치료가 다 되면 들어오라고 되어 있으니까,
이 사람들은 경계선에서,
사마리아에도 끼지 못하고,
갈릴리에서도 끼치 못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 되는 것이죠.
*자해라는 10대의 SOS 시그널 이라는 칼럼을 보니까,
요즘 청소년들은,
신체적 자해가 아니라,
가짜 SNS 계정을 만들어,
자기 본 계정에 욕설 댓글을 달거나 해서, 자기 자신을 자해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10대 1만명을 대상으로, 무려 10%가 지난 1년 동안 디지털 자해를 했다고 밝혀냈습니다.
이건 뭐에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
그러니까, 진심어린 사랑과 따뜻한 관심을 갈구하지만,
실제로는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이렇게 욕설 댓글을 달면,
주변에 친구들이
나를 응원해주거나
걱정해주거나, 위로해주는 것이 좋아서 한다는 것이죠.
실제로 인터넷이 발달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집에만 있게 되었고,
집에서도 소통이 가능하니까,
집에서도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집에서는 자기 혼자 있는 것이니까,
사실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고, 혼자 사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야말로
차갑고, 냉랭하고, 소외감 느끼게 하는 것이죠.
*나병의 특징은 ‘무감각’인데,
고통을 주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인데,
청소년들이,
감정적 무감각에 들어가서,
고통스러워도, 고통을 모르고,
혼자 지내도 외로운 줄 모르고,
그저, 유투브나, 게임이나, 쾌락적 감각이 주는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는 것이,
비슷합니다.
외로우면서도 외로움을 느낄 줄 모르고,
고통스러우면서도, 그 어디에서도 치료를 받을 수 없으니,
청소년들은 방황을 하게 되는 것이고,
겉으로는 방황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이나 SNS에서, 자기 자신을 부각시기커나 학대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좋아요와 관심을 갈구하는 것이죠.
*이렇게 외로울 수 밖에 없는 경계인,
나병환자 10명이
예수님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 선생님이여,
큰 소리로 불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경계인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마리아인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니고,
이 사람들은 나병에 걸린 나병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인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들은,
치료되기를 간절히 바랬으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큰 소리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저 분이라면 나를 고쳐주실 수 있어.
라는 기대를 가지고 불렀던 것이죠.
여러분, 우리 문제도 예수님 안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 같은,
우리 인생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생각보다 고집이 세고, 교만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를 줄 모르고,
어떤 문제든지 내 능력으로 해결하려는 자만심이 큽니다.
그런데, 오늘 10명의 나병환자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이 안 되요.
해결할 수 없는 끔찍한 문제인 것입니다.
어느 누가, 나병을 고칠 수 있겠어요?
의학과 의술로도 치료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절망 중에 절망을 걸어가고 있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그분이 오시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우리 인생의 문제가 항상 좋고 감사한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어디에도 낄 수 없는,
관계의 문제,
해결할 수 없는 피부병 같은 문제들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승화된다면,
그것은 복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14절에 예수님은 그들을 보십니다.
그리고 명령을 하시고,
그 명령대로 나병환자들이 순종했더니,
그들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4절에서
깨끗함을 받은지라는,
‘수동태’로 되어 있는데,
무슨 말이냐면, 주어가 없어요.
근데 누군가에 의해 깨끗함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이니까,
이걸 신학적으로 ‘신적 수동태’라고 부르니까,
이건 누가 한 거에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이 고치셨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다 !
그러니 이 사람들이 얼마나 기쁘고 좋았겠어요?
그래서 이들은, 기쁜마음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고향으로 모두 달려가지 않았겠어요?
내가 보고 싶은 부모,
아이들,
아내를 보고 싶어서, 얼마나 급하게 달려갔겠습니까?
이게 정상이에요.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만 비정상적인 행동을 합니다.
15절인데요.
그 중에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돌아오다’라는 단어는 누가가 좋아하는 단어인데요.
돌아왔어요.
큰 소리를 지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로 돌아왔어요.
이거 비정상입니다.
왜 돌아와요?
지금, 보고 싶은 가족들, 보고 싶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야 정상인데,
빨리 제사장에게 자기 몸이 깨끗해진 것을 보이고, 정상 생활을 해야 정상인데,
이 사람은,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있네요?
*여러분, 이런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면 안 되요.
고침 받았으면, 그만이지,
뭐하러 다시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 인사를 드립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굉장히 비정상적이에요.
얼마나 많이 갔겠습니까?
근데 다시 돌아와요.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찬양을 해요.
뭐하러 찬양을 합니까?
우연히 나은 것일 수도 있는데,
그리고 예수님께 왔는데
이스라엘에서는 보통 왕이나, 제사 드리는 제단에서나 무릎을 꿇었지,
아무에게나 무릎을 꿇지 않았는데,
예수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 인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에요?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경계선 중에서도, 경계선에 사는 사람이었는 것이죠.
*이 사람은 냉랭하고 차가운 환경에서
경계선 중에서도 경계선에 산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무릎 꿇고 감사 인사하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19절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여러분, 우리는
냉랭한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해하는 친구들의 특징은,
부모님과의 따뜻하고 소통적인 관계가 적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관심이 필요한데
관심을 못 받으니까,
인터넷 상에서, 악성 댓글을 달며, 사람들의 관심을 요구하는 것이죠.
이런 사회 속에 사는 여러분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사는 경계인과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인도해가시는 것이죠.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르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경계인 같은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말씀이 치유의 역사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사역
11 그리고 그것이 되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그리고 그가 다니시면서(미완료),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가운데를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 :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
사마리아와 갈릴리 가운데를 다니시는 가운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 장소를 다니셨다 (미완료).
12 그리고 그가 들어가신다, 어떤 마을로, 나병환자들 10이 만났다(아판타오, 만나다/마주치다).
멀리서 서서,
*그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10명이었다.
*예수님은 어떤 마을로 들어가셨다.
*10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다.
*예수님은 일반적으로 ‘혐오’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구약 율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셨다.
13 그들이 그들이 소리를 들어올렸다, 그들이 말하기를, 예수 선생님이여, 당신은 엘레레오(긍휼히 여기다 / 명령)하소서!
우리를.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 선생님이여, 당신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의 목소리는 매우 컸다.
목소리의 크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의 간절함?
신뢰?
긍휼히 여겨달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에서 ‘긍휼’은 무슨 의미인가?
자비는 긍휼히 여기는 행위를 유발하고, 죄인에 대한 용서로 확대되며,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궁핍한 자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정서적인 반응이다.
자비는 도움을 받는 사람의 가치와 상관없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손을 내미는 사랑이다.
헤세드 : 개인이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일관된 행동에 의한 “한결같은 사랑”, “헌신”, “충실”
구약 246번
강력한 관계적 측면
신실한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 일반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행동
14 그리고 그가 보셨고, 그가 말하셨다, 그들에게.
너희는 가서, 너희는 에피데이크뉘미(보이다, 나타내다 / 명령)하라!
너희 스스로를, 그 제사장들에게, 그리고 그것이 일어났다, 그들이 가는 중에, 그들이 카싸리조(깨끗하게 하다, 정결하게 하다 / 수동태)되었다.
*시점을 이야기한다.
“그들이 가는 중에”
*제사장들에게 너희를 보이라!
*그들이 가는 중에 깨끗해졌다.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예수님은 그들을 보셨다.
치유되었다거나 치유해주겠다는 말씀이 없다.
일방적으로 가라고 하신다.
가라고 하신 장소는 제사장들이다.
제사장들은 ‘치료 여부를 확인하는 사람’이다.
나중에 예수님은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의 구원 여부를 확인해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진정한 제사장이시다.
가자마자 치료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가는 중”에 깨끗하게 되었다.
깨끗하게 된 것은 ‘수동태’이다.
주어가 없는 ‘신적 수동태’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해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셨다.
15 하나, 그러나 그들로부터, 그가 보았다, 그가 이아오마이(낫다, 고치다, 나음을 얻다 / 수동태)되어진 것을.
그가 되돌아갔다, 큰 소리로 영광을 돌리면서(독사조, 찬양하다/영광을 돌리다), 그 하나님께.
*그가 되돌아갔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어떻게 영광을 돌렸을까?
*그는 고침을 얻었다.
그의 능력이 아니라.
신적 수동태다.
고침을 얻었다.
하나님이 고치셨다.
*그는 보았다, 자신이 고침을 얻었다는 것을.
16 그리고 그가 엎드렸다, 얼굴을, 그의 발들 옆에, 그가 그에게 유카리스테오(감사하다, 축사하다)하면서, 그리고 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서 예수님께 감사하였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의 깨끗함을 보였다.
그는 제사장에게 보여야 할 것을 예수님에게 보였다.
그는 감사하였다.
*뒤에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는 경계선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계선 안에서도 경계선에 사는 사람이었다.
유대인들 9명은 결국 사마리아 사람과 떨어지게 되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였다, 또한, 그가 말하기를, 그 10명의 남자들이 카싸리조(수동태)되어지지 아니하였는가?, 그러나 아홉(9)은 어디로?
*예수님은 진지하게 묻는다.
9은 어디로 갔는가?
9명은 기존의 세계로 돌아갔다.
1명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
18 되돌아오는 자들을 찾지 못하는가?(휴리스코 / 찾다, 만나다 / 수동태), 하나님께 영광을 바치러, 이 이방인 외에는.
*예수님은 탄식하는 듯하다.
정말 되돌아오는 자들을 찾을 수 없는가?
예수님은 되돌아오는 자들을 찾지 못하셨다.
예수님은 되돌아오는 자들을 기다리셨다.
그러나 9명은 돌아오지 않았고, 1명만 돌아왔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되돌아오는 자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의 백성은 혈통을 초월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감사하는 사람이다.
19 그리고 그가 말하시기를, 일어나서 너는 가라(명령), 너의 믿음(피스티스 / 충성, 신앙,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소조 / 완료).
*너는 가라? 어디로?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는 근거인가?
*사마리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묵상
예수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제사장인 것처럼 행동하신다.
제사장들에게 찾아간 이들보다, 예수를 찾아온 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자다.
예수님은 그를 보낸다.
12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17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주석
악성 피부병은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부정’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완전히 고립되어 살았습니다.
집에서, 배우자, 자녀, 부모의 사랑의 손길로부터, 신앙 공동체에서 쫓겨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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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만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나아만도 이방인이고, 문둥병자이다.
나아만도 고침을 받은 후에 엘리사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감사하였다.
구원의 혜택을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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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은 일종의 ‘건강 검사자’의 역할을 하였다.
(레 14:2).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그랬더니 그들은 깨끗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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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자신이 죽게 될 예루살렘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셨다.
그는 거룩한 성에서 자신의 고난을 완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는 도중에 나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9명은 사회적 구원을 위해 나아갔고, 1명은 영적 구원을 위해 나아갔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이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신 것에 대한 세 번째 언급이다.
(눅 9:51; 13:22)
갈릴리는 사마리아의 북쪽에 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가셨다면, ‘동서 방향’을 생각할 수 있다.
이스르엘 골짜기를 따라 동서로 여행하고 있었다는 의미일 수 있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강조 때문에, 사마리아 지명이 먼저 등장했을 수 있다.
사마리아인은 치유에 대한 반응으로 4가지 행동을 하였다.
1)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누가복음에서 좋아하는 주제인 찬양이다.
2) 큰 목소리로.
누가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이다.
3)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
4) 그리고 예수님께 감사하였다.
이 이야기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 교회의 역사와 사마리아인은 복음을 받았지만, 공식 유대교는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구원에 이르는 참 믿음’은 죄 사함(5:20),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18:24-25), 영생을 상속받는 것(5:20),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18:18-30)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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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의 문둥병자들은 배척당했다.
그들은 오늘날 에이즈에 걸린 많은 사람들처럼 버림받은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성밖에서 나병환자 수용소에서 생활해야 했으며(민 5:2-3), 거리를 걸릴 때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외쳐야 했다(레13:45-46).
“경계지역”
경계지역은 유대인 거주 구역도 아니고, 사마리아인 거주 구역도 아니다.
경계지역은 그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곳에서 만난 10명의 나병환자들이다.
이 사건은 갈릴리 남부와 사마리아 북부 국경 부근에서 발생했습니다.
나병환자 10명.
그들의 공통된 고통이 그들을 하나로 묶었다.
나병환자들의 희망은, ‘자기 스스로의 가치’가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좌절했고, 그들은 새로운 희망을 갈구하였다.
한 나병환자는, 예수께 돌아와,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대리자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누가의 기독론은 예수님을 ‘성전의 역할’로 제시한다는 데에 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강력하고 자비로운 임재가 실현되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찬양 받으시고 계시다.
구원이란?
예수님이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강력하게 임재한다는 사실과,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참 성전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 것.
‘감사’는 치료받기 위한 조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감사는 구원받은 자의 당연한 태도이기도 하다.
“가장 고통 당하는 자”들 사이에서는 “민족적 반감”조차도 사라져 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나병환자들은 서로 함께 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사마리아 선교’를 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투 호라이즌 신약 주석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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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사람들도 배타적이다.
예수님은 사마라이안의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고, 사마리아인 제자를 부르지도 않았다.
사마라이안은 그를 칭찬하지도 않았다.
이 사마리아인이 독특하다.
사역 초기에 예수님은, 나병에 걸린 사람을 기쁘게 받아 만지심으로 고쳐주셨고, 제사장에게 인증을 받게 보내셨다(5:12-15).
사마리아인 나병환자는, “이중 추방자”이다.
예수님은 감사하지 않은 9명의 치유를 취소하지 않으셨다.
치유 되기 전에는 함께 였지만, 치유된 후에는 오래된 민족적 편견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남유다와 사마리아가 하나가 되는 그림은, ‘종말’의 그림이다.
누가복음 13:29 (NKRV)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돌아오다”(휘포스트레포)는 누가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보통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제단 앞이나 왕의 발 앞에 경건한 마음으로 엎드렸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교육 받았지만, 사마리아인에게는 그러한 기대를 걸 수 없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축복기도는 바리새인이나 유대 지도자에게 결코 사용되지 않고 죄인, 이방인, 부정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만 사용되었다.
의식, 제사, 행위가 아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여, 몸과 영이 온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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