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uild, 낮아짐(요3: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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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10월 16일 주일 청년부
소제목 : 다시 세우다
제목 : Rebuild, 낮아짐
본문 : 요한복음 3장 31-36절 *신147
결단찬양 : 낮은 곳으로
[도입]
인간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고, 인간의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늘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저도 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이 끝이 없었고, 또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그 야망이 늘 넘쳤습니다. 지금은 그 욕심과 욕망을 정말 많이 눌러가며, 하나님 앞에서 씨름 또 씨름 하는 중입니다.
물론 그 욕심과 욕망이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틈을 보이면 훅 치고 올라오고, 또 빈틈이 보일때면 생각을 지배해버립니다. 그래서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고, 또 다스려 낮아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목회자로써의 부르심을 받아 그 사명을 감당할 때, 세운 몇 가지 철칙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내가 원하는 욕심나는 곳이 아닌, 정말 목회자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나아가기’ 그리고 또 하나는 최근에도 말씀을 드렸던, ‘떠날 때 조광원은 잊혀지고 예수만 남는 사역하자’는 것입니다.
이 철칙들이 한순간 딱 ‘이렇게 해야겠다’ 해서 만들어진 것들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도 나름의 사역 연차가 길어져가며 보완하기도 하고 또 새로 새워가기도 한 것들입니다. 다만 방금 말씀드린 저 두 가지는 정말 사역을 시작하는 초창기서부터 세웠던 저만의 하나님과의 철칙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철칙을 세운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욕심과 욕망이 많기에 ‘이 세상에서 정말 뛰어난 사역자가 되어 이름을 날리겠다’ 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는 것과 또 이루고자 하는 것 사이에서 꽤나 긴 시간을 고민했고, 또 갈등 가운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너무 연약하기에 점점 욕심과 욕망이 커져가며, 다음 스텝은 어떻게 해야 할가를 세우고, 더 나아가 그 다음 스텝은 어떻게 해야 그 다음 스텝을 또 수월하게 밟아 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역자로써 다음 스텝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그 안에 중심이 ‘나’ 였기에, 이 스텝은 멈춰 세우는 것이 더 유익하다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그렇게 세운 것이 방금 말씀드린 저만의 부교역자로써 또 목회자로써 할 수 있는 철칙이었습니다. 물론 이 철칙을 세운 것과 이 철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후회할 때가 없다면 거짓이고, 사실 너무 많습니다. 굳이 안해도 될 서원을 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끄심이 참 아이러니하다 느낍니다.
이러나 저러나 우리가 낮아진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끊임없는 욕심과 욕망으로 낮아진다는 것이 어려울 뿐더러 때론 시도조차 안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이 낮아지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의 주제가 ‘낮아짐’ 이기도 하지만, 우리 청년 공동체가 이 낮아짐 안에 높아짐이 존재하며, 낮아짐 안에 우리의 본질이 다시금 세워져 가는 시간이 되길 소망하는 바램을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물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 우리가 나눌 이 낮아짐은 크리스천으로써의 낮아짐이지, 결코 직장내에서 직급의 낮아짐이나, 내 사회 생활에서의 영향력의 낮아짐이 아님을 이해하시며, 오늘의 이 낮아짐 이야기를 풀어나가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중에 27문을 보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낮아짐은 무엇입니까? 사실 이 질문의 답을 안다면, 우리는 오늘 설교를 듣지 않아도 아는 답을 가지고 실천해 나가면 됩니다.
총 6가지의 답변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출생’ 자체가 낮아짐 이었다는 것이지요. 왜 출생이 낮아지심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신격을 지니셨습니다. 이미 우리와 존재자체가 다르십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하셨고,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셨습니다.
그런 분께서 인간의 몸을 입어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신으로만 살아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이 땅 가운데 인격을 지닌체 오셨다는 것이지요.
저는 ‘쟤는 뭔 생각을 할까? 세상이 정말 위험천만한 곳인데.’라는 생각을 곤충들을 보며 종종 하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인간의 모습으로 온 것이 제가 곤충을 보며 하는 생각과 그나마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 출생하신 것이 정말 큰 낮아짐 중 하나라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비천한 신분’으로 나신 것입니다. 신격을 지닌 분이라 그 어느 누구보다 높고 위대하신 지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신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결코 부유한 집안도 아니었고, 오히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물질적으로 충분한 삶이 아니었고, 또 잘 구비된 침실이나 분만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이의 탄생 현장을 보며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정말 최악의 환경에서 그는 오셨습니다. 바이러스 감염에 있어 정말 노출이 큰 신생아를 깨끗한 곳에서 출산한 것이 아닌 동물의 오물과 찌꺼기 등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곳에서, 세균이 정말 많을 것 같은 그 곳에서 나신 것 자체가 정말 최악의 환경 가운데 오셨음을 보게 됩니다.
또 그가 성장해가며 풍요로운 삶을 즐긴 것도 아닙니다. 공생애 3년의 기간 전에는 목수로서 자랐습니다. 어린 나이서부터 말입니다. 그는 결코 일을 쉬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일해야 했고, 또 그 일함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니 ‘비천한 신분’으로 나신 것 또한 낮아지심 중 하나의 모습임을 보게 합니다.
세 번째는 ‘율법 아래 복종’ 하셨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5절을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며 율법 아래에 나게 계획하셨고 또 허락하셨습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하셔 일을 감행하셨습니까? 그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 즉 대신 값을 치뤄 자유케 하시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확실히 얻게끔 하고자 하심입니다.
율법으로서의 최종 완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유대인들의 극악 무도한 최악의 형벌, 십자가 형에 예수님께서 달리신 것입니다. 분명 빌라도도 예수님을 보며 ‘그는 유대인의 자칭 왕이 아닌,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으며, 예수님이 정말 유대인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확실한데, 그 유대인의 왕이 유대인의 최악의 형벌인 십자가 형에 달리심으로, 율법에서의 완성 또한 이루셨습니다. 그는 그렇게 율법 아래에서도 낮아지셨습니다.
네 번째는 금생에 ‘비참함’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높임받아 마땅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핍박과 비난과 조롱과 협박을 받았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길 수 있으나, 사실 짧은 시간 아니겠습니까? 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위협과 어려움이 닥쳐 왔습니까? 만약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었더라면,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다섯 번째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낮아짐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낮아지심의 소위 끝판왕이라 말할 수 있다 봅니다. 율법으로서의 완성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완성이기도 합니다. 이 죽음이 왜 낮아짐입니까? 이 죽음이 누구를 위한 죽음입니까? 바로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귀한 딸내미, 귀한 아들내미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죄인이고 우리 스스로는 결코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는 미약한 존재이며, 늘 범죄와 동행하시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사실이자, 또 예수님 입장에서는 인간 따위를 위해 행하신 죽음이기에 얼마나 큰 결심의 낮아지심이 됩니까.
마지막 여섯 번째는 죽음 아래 장사됨, 즉 ‘3일간 무덤 속’에 계셨습니다. 사실 이게 왜 낮아짐일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결말이 장사되는 것은 마땅한 과정이기에, 이는 왜 낮아짐일까 충분히 생각해볼만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높아짐]
여섯 번째의 문제는 우리가 왜 낮아짐이 높아짐인가,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충분히 이해할만한 이유가 됩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죽었던 나사로도, 베드로를 통해 다비다가 살아났고, 바울을 통해 유두고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이들이 함께 살아납니다.
하지만 이들을 향해서 ‘나사로가 부활했다.’라 말하지 않고, ‘다비다가, 유두고가 부활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부활이 아닌 소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과 소생은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소생은 다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활은 다시 죽음을 맞이하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8문은 ‘높아지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면서 이에 답은 무엇인가 보니,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그분이 사흘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성부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라 답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핍박과 고난과 비참함 속에서 율법 아래 죽으심은 비록 낮아지심이었지만, 그 결과는 끝내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심판하시는 그 모습으로 높아지셨다는 것입니다.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 함께 공존한 것이지요.
[낮아짐 곧 높아짐, 약함 곧 강함]
저는 이 낮아짐은 곧 승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합니다. 낮아짐의 높아짐, 약함 속 강함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과 10절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 바울은 가진 것이 참 많은 사람이었지만, 예수를 만나면서 모든 것 내려놓고 또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약해지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처한 약해짐은 곧 무엇입니까? 강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사도 바울이 처음 실천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낮아지심을 통해 높아짐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약함이 곧 강함됨은 이미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처럼 살아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들의 모습을 보며 ‘멋있다.’ 라 말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에 그 멋지다 고백한 삶이 심겨지고 드러나냐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로는 우리 삶을 통해 낮아짐이 드러나길 소망합니다. 또 약해지길 소망합니다. 이는 곧 높아짐이나 강함이 됨을 알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길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라]
그런데 이는 우리의 힘으로 잘 되지 않습니다. 너무 어려운 일 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욕심과 욕망이 많아서, 말씀을 들어도, 말씀을 보아도 뒤돌아서면 듣고 보았던 것들을 떠나 보내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 아니겠습니까?
우리 오늘 본문 34절부터 36절 함께 읽어 봅시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여러분. 우리의 힘으로 결코 해낼 수 없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너무 귀한 방법을 선물해주시고 알려주시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것. 우리가 결코 해낼 수 없으니 누구를 보내주셨습니까? 만물을 다 손에 쥐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을 지닌 자로 보내주셔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아낸 지체가 있기에 함부로 정의내리는 것이 옳지 않을 수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낮아짐의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런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아짐의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습이 쉽게 나올 수 있는 모습이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방법을 알려주셨는데,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의지하는 것. 이 또한 낮아짐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것.
이 공동체는 그런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나의 의를 드러내기보다는 하나님만이 드러나는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돋보이기 보다는 하나님이 돋보이는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세상은 호구라 말하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그 삶을 저와 함께 살아내는 귀한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1) 겸손과 낮은 자의 모습으로 훈련되어져 가는 자 되게 하소서
2)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만 드높이는 공동체 되게 하소서
3) 특별새벽부흥회 가운데 은혜가 더하여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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