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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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은 1:1-18
서론에는 세상의 곤경과 하나님의 곘(말씀)인 유일무이한 아들이 오시는 것이 포함된다.
1-5절 말씀을 소개
6-8절 말씀을 증언
9-14절 말씀의 현현
15-18절 말씀의 유일무이하심
요한복음 1:1–8 NKRV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주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본문 : 요한복음 1장 1절~8절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1장 1절부터 18절 까지를 요한복음의 처음을 알리는 서문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저는 그 가운데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선택하여 사랑받는 제자 요한이 스승이요 주님인 예수 메시아의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다 이해를 돕고 기억을 쉽게 하기 위해서
‌- 1-2절을 태초에 존재한 말씀과 하나님
‌- 3-4절을 말씀으로 인한 창조
‌- 5-8절까지를 참 빛이신 예수의 성육신과 세례 요한 이라는 구분 아래
‌ - 5절을 참 빛과 사람들의 반응
- 6-8절을 증거자 세례 요한이라는 구분을 제시하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또한 저는 오늘 본문에서 제시되는 ‘빛’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받는 실제의 ‘빛’과 연결하여서 여러분에게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기록할 때보다 아주 멀리 있던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시작하는 느낌을 전달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도입부는 복음서의 저자들 마다 아주 독특한 내용을 제시합니다. 마태의 경우는 다윗과 아브라함의 족보를 통해서 예수를 왕으로서의 메시아로 소개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라는 정체성을 소개하면서 시작을 하죠. 또한 누가의 경우는 자신이 복음서를 왜 쓰게 되었는지를 소개하면서 시작을 한다면 요한은 바로 태초부터 존재한 말씀과 하나님의 관계성으로 시작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시공간을 초월한 것 같은 인류 역사의 시작보다 더 앞서 ‘선재하셨다’라는 의미를 사용하는 것이죠. 이런 부분이 오늘날 신자에게는 창세기를 알고 있고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큰 감동이나 벅찬 뜨거움을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예를 들어, 우리가 역사를 잘 알고 있더라도 최근에 개봉했던 이순신 장군의 ‘한산’이라는 영화를 보면 뭔가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오늘 요한복음의 서론을 전하면서 그런 벅차오름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찬송가 79장의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에서 가져왔습니다. 후렴부는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를 반복하면 바로 그런 벅차오르는 마음을 잘 표현한 가사로 가득차 있습니다.
‌ 요한복음의 글을 보면 처음 시작부터 매우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1절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심이시니라’라고 하나의 문장처럼 읽습니다. 그러나 원문은 더 간결하게 기록되고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말이죠.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이런 식으로 7절 전까지 마치 팩트만을 ‘툭툭’ 던지듯 기록하고 있고 요한복음 전체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방식입니다.
‌ 영화 서두에 간혹 빠르게 글이 나왔다 사라졌다 하면서 시작부터 몰입하게 만드는 극적인 장치가 관객들을 더 집중하게 합니다. 그런데 보는 사람은 금방 지나가기 때문에 놓칠 수 있는 것이죠. 헬라어는 가장 강조하는 말을 제일 앞에 기록하는데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이런 단어는 두 가지의 생각을 들게 하는데 앞으로 하려는 내용이 태초와 연결이 되었다는 암시와 / 갑자기 독자의 생각을 아주 멀리 끌고 간다는 것이죠.
다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다 큰 자녀들과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이렇게 말하면 벌써 자녀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 태어나기 전이라면 나와 상관이 없는 이야기 아닌가?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초에’는 오히려 신자들에게 창세기의 창조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도 /막상은 그보다 더 앞선 시점을 의미하기 때문에 요한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죠. 태초에 라는 말로 우리의 생각을 창조로 끌고 가지만 막상 ‘창조’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데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의 이야기를 잠시 덮고 머리를 식힐 겸 우주와 과학에 대해서 짧게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 태양에서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데 8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서 첫째는 ‘거리가 멀다’라는 것이구요. 두 번째 ‘빛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세삼 떠오르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질문을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가 순간 멀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태양이 빛을 발산하는 것을 멈춘다면 우리는 바로 알 수 있습니까? 아니면 8분 후에 알 수 있습니까? 앞선 과학적 사실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8분 뒤에 알 수 있고 또한 지구도 종말을 맞을 겁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태양의 과거의 빛에 영향을 받습니까. 지금의 빛에 영향을 받습니까? 당연히 태양의 8분전 과거의 빛에 영향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을 보탠다면 8분 전에 빛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여전히 생명을 보존하고 살고 있다라고 말하면 과학이 마치 은혜의 표현처럼 들리면서 왠지 모를 태양에 대한 고마움이라든지 순식간에 현재, 과거 또는 미래라는 개념을 질문과 답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 요한도 지금 ‘태초에’로 시작한 그러면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이런 의미를 글을 읽고 있는 현재의 독자 (오늘 저와 여러분은 아닙니다.) 에게 아주 깊은 이해를 제공하는 놀라운 방법으로 시작하는 것이죠. 마치 이렇게 말입니다. ‘저 멀리에 태양이 있다. 그리고 그 태양은 빛을 현재 출발 시켰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빛을 받고 있다. 앞으로 계속해서 빛을 받을 것이다.’ 라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보다 더 먼 이야기를 과학적인 장치를 통해서 두 어번 더 말할 것입니다. 기대해주셔도 좋습니다. 자 이제 우리의 생각은 과거나 현재, 미래 또는 존재한다는 약간의 개념을 가진 채로 요한복음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2절 태초에 존재한 말씀과 하나님
‌말씀드린 것처럼 1절은 세 개의 절이 연결된 간결한 문장으로 시작을 하는데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다’는 것이죠 여기에 포함된 단어 중에 독특한 것이 ‘태초에’라는 것과 헬라어로 ‘엔’이라는 단어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미완료 형태의 계속되는 과정을 뜻하는 단어가 3절 모두에 각각 들어가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1절의 의미 뒤에는 창조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계속 존재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이렇게 하면 우리의 생각의 거리는 ‘창세기의 창조’를 쉽게 떠올리지만 그보다 훨씬 더 앞선 시점이라는 것이죠. ‌그런 시점에 바로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란 내용입니다. 이제 이 말씀이라는 의미는 저와 여러분이 소상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도움이 될 만한 성경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그 의미를 되새겨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4-6 NKRV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골로새서 1:15-18 NKRV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이 두 본분은 저와 여러분의 생각을 그리고 어렴풋 알던 이 땅에서의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정체성을 신약의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가 잘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표현 ‘그리스도’는 예수를 말씀 곧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로 연결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표현이니 함께 해 볼까요? ‘예수님은 말씀 곧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로 연결한다’ 학자들은 ‘로고스’라는 개념을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지만 이는 학자들의 몫이고 저와 여러분은 성경 곧 구약에서 소개하는 메시아, 바로 구약의 개념으로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저는 태양에서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 8분의 시간이 걸린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빛이 과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질문이지만 아마도 여기에 답을 하려면 상당한 공부를 하셨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초창기 시절에 빛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생각하고 한 실험 하나를 소개하면 아마도 여러분은 빵 터질 것입니다. /‌ 빛을 가릴 수 있는 박스와 시간을 재려고 초시계를 들고 한 사람은 저쪽 산에 한 사람은 이쪽 산에서 빛을 가리고 있던 가리개를 열어서 이쪽에서 눈으로 확인한 시간을 재는 것이죠. 그 결과를 아직도 우리는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눈 깜작할 새’입니다. ‌우리 모두는 참 바보 같은 실험이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너무 빨랐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가 없는 실험이였죠. 그럼에도 이런 실험이 발전해 결국 빛이 거리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구약에는 선지자들의 예언 곧 약속들이 작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인자’, 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 나단의 예언 곧 다윗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또한 이사야, 에스겔, 예레미야 등 많은 성경 부분 부분에 기록된 것이죠. 그러니까 이러한 구약의 개념으로 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 곧 영생함을 받는데 아주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요한은 ‘태초에’ 라고 시작하면서 ‘존재하고 있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특히 구약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여기에 창조주와 세상이 연결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1; 시33:6 “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 뿐만 아니라 유지하고 통치하십니다.(시 147:15 “15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과 소통하십니다. (신8:3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고 범죄함으로 타락한 자들을 구원하며(사55:11) 심판하십니다. (렘5:14)
‌특히 ‘존재’하시는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과 존재적으로 구분되지만 같은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을 드러내는 존재 곧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자’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4절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골로새서 1장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따라서 예수의 말과 사역은 곧 하나님의 말과 사역이고 예수에 대한 반응은 곧 하나님에 대한 반응과 같은 것입니다.
‌ 앞으로도 요한은 8장에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고 3장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계시하고(1:14,18 14:9) 구원과 심판을 포함한 구약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3:16; 19:30: 10:30) 기록합니다. 특히 본문 2절에서 이런 내용을 부연하듯 성부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드러날 전반부의 표적 그리고 후반부의 수난 이 모든 것은 여기에 근거한 권위를 부여 받는 것임을 서두에서 밝히는 것입니다.
‌‌
이제 요한은 바로 태초에서 창조로 옮겨집니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하실 겁니다. 태초와 창조는 얼마의 시간이 있었을까? 몇 단어를 사용해서 요한은 태초에서 창조로 넘어오고 이제 그 창조가 그를 통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사역의 시작이 곧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심으로 통로로서 함께 했다는 선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약간 어지럽습니다. 높이 올라갔던 놀이기구가 마치 끈이 없는 것처럼 수직으로 뚝 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태초에서 창조로 그리고 그 창조는 앞으로 소개할 예수를 통해서 창조되었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몇 가지로 정의해 보면 첫째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다는 것입니다. 이 주인이라는 표현은 곧 ‘왕’이라는 개념을 아는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눈깜짝 할 새’처럼 느끼는 것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오가는 이해를 안다면 보다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요한은 말씀이 우리에게 연결되는 것 곧 우리가 피조물임을 말할 때 ‘지은 것이 하나도’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저 태양의 빛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드러내는 ‘모든 것’ 때문에 중요합니다. 태양의 빛이 우리에게는 생명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태초에’ , ‘창조’, 그리고 ‘말씀’ 이 모든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저와 여러분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피조하셨다는 사실로 연결되며 이제 가장 중요한 예수로 연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당연하지 않습니까? ‌창조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구속의 새 창조 또한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이미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이 이순신의 영화에 무슨 반응을 하겠습니까? 유일하게 반응하는 것은 위대한 승리를 경험한 우리나라 사람과 참패를 당한 일본 사람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12절에 하나님의 자녀됨 그리고 영생으로 말하고 예수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창조 목적은 사람을 포함한 피조물과 하나님의 온전한 관계 누림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의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태양의 빛이 다른 행성에도 비췹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빛이 가지고 있는 ‘생명’ 때문이죠.
‌ 태초에서, 창조로 그리고 창조의 피조 세계에서 이제 4절 하반절에 ‘사람들’로 좁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러한 사실에 반응하는 대상 곧 구원 과정의 핵심 대상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생명의 관계 그리고 생명이 예수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말씀은 창세기 1장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을 만드시고 생명을 만들었듯 새 창조의 과정에서도 생명인 예수가 죄와 어둠의 영역에서 죽어 있는 자들에게 빛을(생명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어느 과학자가 말 합니다. ‘보잘 것 없는 태양계를 빛나게 해주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지구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태초도 중요하고 창조도 중요하지만 말씀으로 연결된 피조세계 곧 사람들에게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생명 없는, 죽은 자들에게 생명으로 연결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존재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시편8) 그럼에도 하나님의 걸작품으로서 놀라운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죄로 인한 타락은 이제 새 창조를 통해서만 완전한 회복 곧 생명 있는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 그렇다면 그 절정은 무엇입니까? 바로 5절 빛이 ‘어둠에 비치’는 성육신입니다. 다시 아주 먼 곳을 바라보던 망원경은 이제 줌-인 하면서 빛이 어둠에 비친 예수이 성육신을 거쳐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공적 사역으로 더 좁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의아한 것은 빛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글자로 본다면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미하는 바 상징이 필요한 것이죠. 요한은 그러한 표현을 빌어 서로 상반 되는 2개의 모습을 계속해서 대조 시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빛과 어둠이고 이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과 그것을 거절하는 세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어둠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예수 사역의 시작부터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장차 예수의 사역에 많은 부정적인 반응을 암시하고 그 결과는 십자가라고 하는 최종 결과를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을 등장시킵니다. 여러분 이제 제가 마지막으로 과학적인 사실 하나를 더 알려드려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앞서 정신없이 태초와 창조를 넘나드는 시공간의 시점들을 살폈고 그 결정체이신 예수님을 살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연 이 모든 것을 깨닫고 있는가를 자문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시 멈춰서야 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 태양의 빛이 도착하는데 8분이 걸린다면 지금 빛은 8분 전의 태양을 아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빛이 조금 더 멀리서 온다면 예를 들어, 1년 전의 빛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맞습니다. 당연히 1년 전의 모습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달리는 속도를 30킬로미터 하듯 빛의 1년 거리를 1광년 이라고 합니다. 조금 더 넓게 잡아서 40억 광년의 빛을 받는다면 우리는 언제의 상태를 아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이해는 되지 않더라도 수학적으로 40억년 전의 상태를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빛을 받을까요. 지구에서 좀 먼 우주로 보내진 거대한 망원경이 있는데 이 망원경은 일종의 카메라 입니다. 바로 그 카메라가 저 먼 우주의 빛을 받아서 찍었다는 것이죠.
‌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엄청난 시간을 넘어서 전해졌고 이렇게 읽혀지고 있으며 이제 한 사람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태초에서 이야기가 시작했는데 최종적으로 세례 요한까지 좁혀 졌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경이라는 카메라에 잡힌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라고 표현합니다. 마치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할 때처럼 말입니다.(3:34; 5:36) 구원 과정의 설계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일도 예수님의 사역처럼 있다는 것입니다. 왜 중요합니까? 바로 세례 요한의 증언이 그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바로 최종 증언인 성경을 붙잡고 믿음의 근거를 삼습니다. 성경은 바로 증언으로 가득 차 있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증언하는 세례 요한으로 시작함으로서 참된 보증을 받고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5장33절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 증인을 누가 보증합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보증이니 이것이야 말로 참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빛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증언이란 단어를 세 번 사용해 확실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빛이 아니라는 것을 반복하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의 증언 곧 빛에 대한 증언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인 요한복음 20장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과 연결 되는 것입니다. ‌마치 책장의 제일 앞장과 마지막이 서로 딱 맞아 들어가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서론의 시작 부분을 살피면서 천문대에 올라 거대한 망원경을 눈에 대고 수많은 별들로 가득 찬 하늘을 바라보는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정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천문대 망원경은 우리의 시선을 이끌어 보이지 않는 우주로 이끌어 줍니다. 요한 역시 서문을 통해 당시의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쩌면 밥이 되고 살이 되는 것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믿는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더 알기 위해 우리의 시각을 넓히는 훈련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자주 예수에 대해 알기 원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예수께서 우리 삶에 기적과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경우를 더 많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각은 좁혀져 있고 우리의 기도는 각자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 저와 여러분의 저자 요한이 그려놓은 그림을 바라보며 우리 모든 촉각과 감각을 세워 집중할 시간입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높은 산에 올라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보니 손톱만한 세상에서 아웅다웅 살면서 왜 그렇게 싸우고 힘들고 울면서 보냈는지 모르겠네’하는 말입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시점이 바뀌니 누구라도 그런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뛰어넘어 피조의 세계를 보고 피조의 세계에서 다시 창조의 세계로 그리고 창조의 세계에서 다시 ‘태초의’ 세계를 경험한 저와 여러분들은 어찌해야 할까요?
‌ 우리는 자신을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신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사무엘의 고백처럼 삼무엘상 3장10-11절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말씀을 듣는 것은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편1편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 결과는 그저 높은 산에서 봤던 잠시의 감동에 그치지 않고 빛으로 임한 주님은 우리 속에서 생명으로 발아하여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오랜 시간 소망을 두고 기도하시는 성도가 계십니까? 참된 위로를 얻지 못해 눈물로 보내는 성도들이 계십니까?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먹고 마시며 사는 것에 매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요한은 예수를 온전히 아는 것에 믿게 하려고 했으며 결국은 생명을 얻게 하려고 했음을 굳게 믿고 말씀을 붙잡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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