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맡겨라

성령의 열매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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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길 때 분노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 1)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믿고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 3)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해라

Notes
Transcript

1. 서론

이번 주가 단풍이 가장 절정일 것 같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강남 일대에 폭우가 쏟아져 난리였던 것이 엇 그제 같은데 이제 본격적인 가을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사실상 가을은 엄철 짧아서 금방 추워지고 서리발 날리면서 겨울 동장군이 서둘러서 오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가을 날씨가 쌀쌀하니까 모두들 감기 조심하시고, 특별히 건강에 더 유의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이 10월 마지막 주는 아니고 다음 주 한 주가 더 남아 있지만 사실상 성령의 9가지 열매에 대한 설교는 오늘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즉 오늘이 성령의 아홉 번째 열매인 절제의 열매에 대한 마지막 설교입니다. 그동안 열매 맺는 교회가 되자라는 표어를 가지고 2022년도 힘차게 달려 나왔습니다. 아직 코로나가 종결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올 한해 열매를 맺고 그렇게 변화된 모습을 가져 보자라는 마음으로 사실 일년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전반기 때에는 그다지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그래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코로나가 진정이 되는 것 같아서 조금씩 회복이 되면서 힘을 낼 수 가 있었지만 6월 7월 되면서 다시 재 유행 되어서 오히려 감염된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다시 한 번 주춤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증상이 심각하지 않고, 또한 코로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도 많이 유연해 지고 하다 보니까 예전과 같이 혼란스럽지 않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제 날짜로 보니까 확진자 숫자가 2만 6천 9백 명가량 된 것 같은데 사실 저도 오늘 설교 준비하면서 오래간만에 확진자 숫자를 찾아 봤지 이제는 확진자 숫자 자체도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물러난 것 같습니다. 사실 2만6천이라는 숫자가 작년에 비하면 그것도 엄청 큰 숫자인데 말입니다. 아무튼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하나하나씩 살펴보았고, 그리고 이번 달에는 마지막 아홉 번째 열매인 절제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절제에 대해서 그동안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으로는 세상에서 말하는 셀프 컨추럴의 의미가 아니라 그 주체를 나에서 하나님, 특별히 성령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인간은 불완전하고, 타락된 존재로서 시도는 좋아도 결국 그 결과가 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완전하고 타락된 존재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2-3살 먹은 어린 아이에게 운전대를 맡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운전대를 맡긴다는 것은 결국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나의 자아가 내 자신을 제어하려고 한다고 해서 제대로 제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완전하시고, 우리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며, 우리의 앞길을 아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운전대를 맡기는 것입니다. 즉 self control이 아니라 Holy Spirit control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제대로 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절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우리 자신이 아닌 성령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겼을 때에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가 되는지, 그리고 그 맡김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바라기는 이 말씀을 통하여서 이 마지막 시대에 절제의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선하신 길로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정, 그리고 교회와 사회를 인도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본론

1)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보실 첫 번째 말씀은 바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우리의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의 본문를 보시면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8절을 보시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부분이 쉽지가 않지요.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실제로 나에게 나쁘게 대하는 사람에게 결국 나도 언성이 높아지고, 주먹이 나가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복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당장은 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자주 하는 말이 있지도 나중에 보자, 두고 보자, 이를 박박 갈고 나중에 기회가 잡혔을 떼에 그것을 보복하려고 합니다. 오죽 그런 상황이 많았으면 두고 보자는 놈치고 무서운 놈 없다더라라는 말도 나옵니다. 사실 그것이 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구절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원리인데 그것은 바로 눈에는 눈, 귀에는 귀, 입에는 입이라는 말입니다. 즉 내가 받았으면 받은 대로 갚아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가장 공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레위기 24장 20절의 말씀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20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즉 1-1은 제로, 즉 주었으면 그대로 받으면 되는 것이고, 받았으면 그대로 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모든 분쟁이 끝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 드린 데로 감정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정확하게 1-1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한 대를 때렸다고 해서 한 대를 맞았습니다. 정확하게 같은 속도에 같은 주먹으로 그대로 맞았다고 해도 사람 마다 느끼는 감정이 또한 다르기 때문에 내가 때릴 때에 상대방이 느꼈던 감정보다 이것이 더 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손을 흔들면서 길을 가다가 상대방을 쳤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의 잣대를 들고 와서 너가 이만큼 쳤으니까 나도 그 만큼 여야 한다고 그러면서 칩니다. 그러면 하는 말이 있지요. 야 나는 실수로 그런 거지마 여는 고의로 그런 거 아니냐, 결국 그렇게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데미지도 같은 속도에 같은 무게의 주먹으로 때렸어도 상대방은 건장한 장정이고 이 쪽은 말 못하는 어린 아기라고 한다면 그 입는 데미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결국 그것으로 공정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런 불공정하고 불완전한 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일까요? 사실 법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 아닐 불완전한 우리에게 수준에 맞추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같은 율법이지만 거기에 다른 것을 첨가합니다. 마태복음 5장 38-42절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즉 우리 주님께서는 구약의 율법을 완성시키시어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악을 대할 때에 오히려 선으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는 하여 분노를 억제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순간적인 감정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감정을 조절하는 절제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소원합니다.

2)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믿고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

두 번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그렇게 감정을 조절하여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 동기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믿고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조절하여 분쟁에 빠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믿는 것이 전제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다윗 왕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을 빼앗기고 다윗은 따르는 병사들과 함께 도망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에 사울의 집안 사람인 시므이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나와서 온갖 저주를 퍼 붓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아비새 장군이 나로 건너가서 그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고 청합니다. 그때 다윗이 한 말이 있는데 사무엘하 16:10-12의 말씀인데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저는 이 다윗의 말이 우리가 절제에 대해서 볼 수 있는 가장 바른 자세의 모델이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이 땅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시지 그냥 상징적으로 계시기만 하는, 이 땅에 아무런 개입을 안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도 보면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라고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내가 뭔가를 어떻게 해 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감정적으로 하다 보면 결국 더 깊고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가 나올 수 없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물에 빠지게 되면 사람은 깊은 공포감으로 이성을 상실합니다. 그래서 더 힘껏 허우적거리고 그렇게 빠져 죽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들어가서 구조하려고 해도 사실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칫 잘못하면 둘 다 빠져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구조를 잘 하는 사람은 그런 경우 옆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힘이 빠져 있을 때에 그때 구조를 하는데 그것도 뒤로 돌아가서 잡고 구조를 한다고 합니다. 결국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온전히 구조하는 사람에게 맡겼을 때에 비로서 살 수가 있는 것인데 본인이 살겠다고 허우적거리고 구조하는 사람 머리를 잡고 그러면 오히려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하면 할수록 더욱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 바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선 악 간에 판단하시어서 가장 좋은 길로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러한 믿음이 있어야지만 사실 맡길 수 있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요인은 믿음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시고, 그 하나님께 맡기심으로 여러분들의 감정을 절제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3)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해라

마지막 세 번째로 어떻게 보면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인데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보시면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20절인데 한번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와 비슷한 한국 속담이 있습니다. 혹시 생각나는 게 있나요? 한국 속담에 그런 말이 있지요. 미운 놈 떡하나 더 준다. 비슷하네요. 그런데 그 원 뜻은 조금 다릅니다. 사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은 미운 사람일수록 잘해 주고 감정을 쌓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그로 인해서 원만한 인간 관계를 쌓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그 목적에 있어서는 일치하는데 그것은 바로 상대방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본문이 잠언 25:21-22인데 “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22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풍습중에는 회개하는 사람들이 숯불을 담은 냄비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것이 있는데 적어도 잠언의 말씀은 그러한 배경을 담고 있고, 바울은 바로 잠언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냥 원만한 인간 관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 위해서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제대로 실천한 사람이 바로 장발장에 나오는 신부입니다. 장발장은 이 신부의 성당에서 은쟁반과 촛대를 훔쳤습니다. 그리고 경찰에 잡혔고 다시 감옥에 가게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부는 장발장의 악에 대해서 선으로 갚았습니다. 장발장이 훔친 것이 아니라 신부가 준 것이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부의 선행이 결국 장발장을 진심으로 회개하게 하였고 장발장도 자신을 끝까지 쫓아 다니는 자베르까지도 구해 주는 선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장발장의 이야기에서는 그 신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잠언의 말씀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그 신부에게 갚아 주셨다고 봅니다. 결국 이 부분에 있어서도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른 것이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리고 나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이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의 차이점이 있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자신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로마 병정들에게 선으로 대하고, 그로 인해 오히려 로마 병정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그러했고 그것으로 인해서 놀라운 부흥을 하였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부흥하고 나서 점점 사람들이 편해지다 보니까 근본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자꾸만 자기 자신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결국 수렁으로 자신을 빠트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꾸만 나 자신이 뛰어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 자신을 한번 잘 점검해 보십시오. 무의식중에 여러분들 말 속에 혹시라도 여러분들 자신을 내세우는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 않나 말입니다. 하나님을 내세워야 하는데 자꾸만 나가 나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믿고 맡김을 통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시는 원수를 선대하여 그 원수까지도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결론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에 대한 설교를 다 마쳤는데 지난 2월부터 10월까지 9개월간 설교를 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러한 모든 열매들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되는 것이 이것이 세상적 덕목으로서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 즉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고, 그냥 올해 한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여러분들의 전인생을 걸쳐서 많은 열매를 맺어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주님께서 열매를 요구하실 텐데 그때에 무거워서 들지도 못할 만큼 많은 열매를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그러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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