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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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고 살리는 물
요4:10-15
앞에 보이는 화면을 보면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그림책이다. 음악감독 김문정씨가 1년에 한번은 꼭 읽으면서 자신을 돌아본다고해서 읽어봤다. 여기에는 애벌레들이 나온다. 애벌레들의 꿈은 하늘에 닫는 것이었다. 그래서 탑을 이루어 서로 먼저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애쓴다. 그 어떤 애벌레도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오르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는 애벌레도 있었다.
여기에 주인공 애벌레는 번데기를 보고 또 나비를 본다. 그리고 애벌레도 고치가 되고, 나비가 된다. 그리고 애벌레 기둥을 날개짓하며 바라본다. 앞서 살폈던 베데스다 연못에 물이 움직이면 서로 들어가려는 사람들과 애벌레 기둥은 흡사하다. 그리고 이유를 모르고 정신 없이 빨리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에 모습을 본다.
소금물을 마셔본적이 있는가. 목사님이 운동할 때, 한여름에 소금물을 마셔봤다. 소금물을 마시면 같은 물이지만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고 더 목마르게 된다. 사람들이 구하는 구원(좋은대학, 좋은 직장, 사업장 등등)이나 소원이 소금물과 같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완전해지리라 생각했지만 또 목마르다. 그래서 성취하면 끝날 것 같은데 더 많은 물을 마시려고 한다. 맛보면 맛볼수록 더 절실하게 마실물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영향을 준 신학자중에 리차드 호슬리가 있다. 성경을 제국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그의 시각이 긍정이든 부정적이든 이 내용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 시작이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의 자신에 이름을 위해 탑을 쌓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열이 정해진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가 갈린다. 권력을 쥐지 못한 사람은 도태된다. 그리고 세상은 메이저와 마이너를 나누고 일류와 이류 그리고 삼류로 또 나눈다. 제국의 탑이 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계층이 있었다. 그리고 같은 믿음의 사람이지만 니고데모와 이 수가성 여인은 달랐다.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우리는 5주째마다 물로 연결된 말씀을 살펴보고 있다. 첫 번째는 요한복음 순서상 3번째였지만, 38년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려는 이야기를 살펴보았고, 두 번째로는 정결법을 위해 씻는 물을 마시는 물로 바꾸는 가나 혼인잔치를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겉으로 나타나는 6가지 표적과 표시나지 않게 스며있는 성전과 물 이야기가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난다고 말했었다. 오늘이 아닌 다음에 물 이야기를 살필 때, 전체적인 그림을 그때 그려주려고 한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이야기가 끝나고 갈릴리 지역으로 이동하신다. 그때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신 것이다. 사실 의도적으로 지나신 것이다.
6절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6절에서 문법은 예수님의 행동이 집중되어 있는데,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앉으셨다고 말한다. 그냥 보면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너무 피곤하셔서 잠시 쉬어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도 6시면 정오12시이기 때문에 가장 더울 때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쉬어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행동에는 의미 없는 것이 없다.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지나셨고, 수가라는 마을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앉으셨다. 그 이유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7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대화를 나누실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요한복음에 7번의 표적이 있듯이, 예수님의 대화가 7번 나온다. 그리고 짧은 대화가 4번 나온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긴 대화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 대화를 단순한 담화로 넘겨버리면 안 된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사마리아 땅은 부정한 곳이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을 이류시민으로 여겼다. 그 이류 시민 안에 여인은 이류 성별이었다. 그 당시 여성의 성별은 남자보다 못했다. 그곳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시간에 물을 기르기 위해 온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요구하신다. 그러자 이 여인은 깜짝 놀라한다.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성적으로 순결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모두 간음한 사람이나 매춘부로 생각했다. 그러니 그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것은 부정하기에 대화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도 이방인으로 생각했기에 사마리아 사람과 사마리아 땅도 부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길이 멀어도 사마리아 지역을 둘러서 지났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신 것이다. 그리고 여인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그 당시에는 친척이 아닌 경우에 외간 여인과 대화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물 이야기를 하신다. 그런데 그냥 물이 아니라 생수를 달라고 하셨다. 이것이 이 여인과의 만남의 고리였다. 생수는 ‘살아 있는 물’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네가 내게 물을 구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여인의 반응은 예수님에게 그릇도 없고 기를 수 있는 도구도 없는데 이 깊은 우물에서 어떻게 물을 길어서 내게 줄 수 있는가였다.
유대인의 최고 지성인이었던 니고데모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다시 어머니 배가 들어가야 하는가를 질문하듯이, 이 여인도 예수님께 그릇도 없는데 어떻게 물을 주실 수 있냐고 질문하고 있다.
요한은 사건을 이해하는 시각이 다르다. 시를 읽을 때나 에세이를 읽을 때가 다르듯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시선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반적인 복음서는 땅에서 시작해서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영원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이 땅으로 내려오셨다. 그리고 다시 영원으로 올라가신다. 다시 말해서 영원이라는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지 않으면 예수님의 의도나 예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이나 지금 성경을 읽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마리아 여인 – 야곱의 샘
예수님 - 목마르지 않는 샘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시선이나 우리 관점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면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오해하게 된다. 그러면 생명의 진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출발점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다는 사실과 왜 오셨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 목마름을 채우시기 위함이다. 그것도 목마름의 근원을 제거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원래 예수님이 계셔야 할 곳은 영원한 하늘이었다. 예수님이 그곳에서 오셨다면 초코파이를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바로 이것이다. 이것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밖에서 먹는 물로 잠시 갈증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가 샘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목마를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마치 앞에서 정결을 위해 손을 씻는 물을 포도주로 바꿔 마시는 물로 역사하셨던 예수님이, 이제는 사람 자체를 샘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자 이 여인은 목마르지 않는 물을 예수님께 요청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한 가지를 요구하셨다.
16절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남의 편은 있어도 남편은 없었다. 남편이 없는데 데려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여인의 과거와 현재를 말씀하신다.
18절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것을 예수님이 어떻게 알고 계셨을까. 예수님이 어디에서 오신분인가를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러분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면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과거와 현재를 알고 계심이 이상하지 않다.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히 이 여인의 과거와 현재를 아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을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다. 왜 남자 입장에서 여자가 부정하여 남편을 갈아 치웠다고만 해석하느냐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남성 우월적인 시대였으니 남자에게 버림 받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정답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문맥을 보면 이 여인이 남편을 갈아치웠다는 말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지금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었고 29절을 보면 수가 동네 사람들이 이 여인의 행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물을 기를 때에도 뜨거운 정오에는 기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여인은 사람의 눈을 피해 온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여인이 남편을 갈아치운 것이다. 대단한 능력이 있든지, 굉장한 미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이 여인처럼 우리도 네 연약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여인처럼 우리도 우리 연약함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연약함이 발견된다. 내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을 떠나 있었나를 알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 것이 영원한 샘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심리학으로나 세상에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내 연약함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과 대인 관계가 안 되는데, 그런데 김창옥 선생님 같은 분 강의를 들으면서 나 자신을 알 수 있다. 심리학적 검사를 하면 정말 나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그런데 그것이 하늘의 시선이나 영원의 시선에서 바라본다고 말할 수 없다. 사마리아 여인을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지금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한 것이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예배 이야기를 하면서 나중에는 마을로 들어가서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하는 전도자가 된 것이다.
목사님은 야구선수로 모든 걸 다 걸었다. 그런데 인생의 처음으로 좌절을 경험했다. 그런 좌절 이후로 사람들과 말을 잘 안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말수가 많이 줄었다. 그런 내가 여러분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그것은 복음을 만나고 내 상처를 발견하고 치유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구원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을 피하고 싶었던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던지고 마을 사람에게로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였듯이 그 구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여러분, 복음은 단순한 만족이나 초코파이가 아니다. 초코파이는 내 육신의 만족이나 안녕을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을 맛보면 이 땅의 것은 시시하다. 목숨을 걸지 않는다. 그 생명이 내게 족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좋은 대학이 여러분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여러분의 뉴진스나 비티에스가 채워주지 못한다. 오히려 목마르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목마름을 경험한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목마름은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물과 피를 쏟으신다. 그리고 그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넘겨 주셨다. 그 생명이 영원한 샘이 되어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에게 이런 생명의 역사가 함께 하기를 축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