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을 걸어도 하나님 백성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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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을 걸어도 하나님 백성답게 /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주셔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역시 수많은 작품을 준비하면서 넘어지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다.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날아올랐다가 곤두박질쳐 망신을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인생에서 넘어지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일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아프다고 주저앉으면 그 무대는 그 인생은 거기서 끝난다. 수없이 일어섰기에 사람들이 ‘강수진’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듯이, 당신도 세상이 모두 아는 당신만의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다.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기를,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저번에 읽은 책이 바둑의 전설 조훈현의 책이었다면, 이번에 읽은 책은 이름이 나왔듯이 발레의 전설 강수진의 책, ‘한걸음을 걸어도 나답게’ 입니다.
그녀의 발사진이 워낙 유명해서 제 아내도 한동안 그 사진을 자주 sns에 올렸던게 기억이 납니다.
책을 읽어보니 강수진에게도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33살에 무용계 세계 최고의 상을 받은 다음에 전성기를 보내야 하는데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잘 나갈 때 다리 근육을 심하게 다쳐 일년 넘게 연습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발레리나는 1년 쉬면 다리 근육이 굳어버려서 다시 그것을 살리려면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혼자 힘으로 다시 해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삶의 무대가 있습니다.
그 무대에서 수없이 넘어지지만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넘어졌을 때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지 깨닫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론]
오늘 말씀 24장은 사무엘서 마지막장입니다.
보통 마지막 부분은 좋은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놀랍게도 다윗이 죄를 짓는 바람에 백성들이 7만명이나 죽는 끔찍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 이후 작게 작게 넘어진 적이 있지만 또다시 막판에 크게 넘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죄짓고 다시 안 짓습니까?
우리는 수없이 넘어지고, 어떤 때는 크게 넘어집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말할 수 없는 제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넘어진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런 순간들마다 주님은 넘어진 우리를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까요?
첫째, 주님은 우리의 죄악을 징계하십니다.
1절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백성을 치시려고 다윗을 부추기셨다. “너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여라.”
주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유기, 방치입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사랑하니까 자식이 잘못하면 화를 내고 매를 드시는 것이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백성들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 지 나와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분명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죄를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백성의 대표인 다윗의 죄를 핑계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고자 하셨습니다.
1절에서 보듯 다윗이 저지른 죄는 다름아닌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인구 조사가 왜 죄가 될까요?
원래 인구 조사 자체는 군인을 징집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 민수기도 백성 ‘민’, 셀 ‘수’해서 민수기이지 않습니까?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요?
인구 조사를 한 다윗의 숨은 동기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숨겨진 마음의 욕망을 보신 것입니다.
앞서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 세바의 반란도 모두 진압해서 통일 왕국의 기틀을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용사들이 다윗의 부하여서 전쟁마다 승리했기 때문에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다윗이 또다시 교만해져 넘어진 것입니다.
다윗은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에게 이스라엘 전체에서 전쟁에 나갈수 있는 남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인구조사를 통해 군사력, 즉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모습이 아닙니다.
다윗이 하는 전쟁은 단순히 정복전쟁이 아닌 하나님의 전쟁이기 때문에 군인의 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느냐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고 다른 나라 왕들처럼 자신의 힘을 자랑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더욱 다윗의 모습이 심각한 것은 요압과 같은 간신배조차도 다윗을 막으려했다는 데 있습니다.
3절을 보시면 요압조차도 다윗을 막아 섭니다.
요압이 보기에도 다윗이 안 좋은 동기로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럼 이 때라도 ‘야, 요압도 나를 막는데 뭔가 이유가 있겠구나. 하나님께 물어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다윗은 끝까지 고집을 부립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는 계획이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의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비록 다윗이 회개했지만 그의 죄를 핑계로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그 심판 과정도 매우 특이 합니다.
그냥 죄에 대해 징계를 내리시면 되는데 다윗에게 3가지 징계중 하나를 고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부모님이 매를 세 종류 가지고 와서 뭘로 맞을래 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나 이 징계 속에 주님의 또다른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주님은 넘어진 우리를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까요?
둘째,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13절입니다.
갓이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말하여 알렸다. “임금님의 나라에 일곱 해 동안 흉년이 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임금님께서 왕의 목숨을 노리고 쫓아다니는 원수들을 피하여 석달 동안 도망을 다니시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임금님의 나라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퍼지는 것이 좋겠습니까?
주님은 다윗에게 세가지 선택지를 주셨습니다.
7년의 흉년이냐, 아니면 원수에게 3달동안 도망다니는 것이냐, 아니면 3일동안 전염병이 퍼지는 것이냐 입니다.
기근, 전쟁, 전염병은 구약에 등장하는 최악의 재앙 3종 세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심판하시면 되지, 왜 이런 선택지를 주셨을까요?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 뒤에는 이유가 숨겨져 있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또다시 다윗의 동기를 확인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진심으로 회개를 했다면 다윗의 선택에도 그 진심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이런 선택지를 주신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제적 고통, 괴롭힘의 고통, 질병의 고통 이 세가지중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려 할까요?
우리는 가장 기간이 짧거나 강도가 약한 것을 고르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십시오.
부모님이 잘못한 자식한테 밖에 나가 너가 맞을 매를 직접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아주 작고, 가느다란 매를 가져왔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자식이 자기 잘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고, 오히려 매를 더 버는 일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크고 아픈 매를 가지고 온다면, 부모님은 오히려 마음이 약해질 것입니다.
여기서도 다윗이 머리써서 계산해보고 가장 약한 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과연 다윗은 무엇을 선택할까요?
14절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갓에게 대답하였다. “괴롭기가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자비가 많으신 분이니, 차라리 우리가 주님의 손에 벌을 받겠습니다. 사람의 손에 벌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람 손에 벌 받는 것이라면 두번째, 원수들에게 쫓겨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첫번째, 세번째 7년 흉년과 3일의 전염병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둘중 하나를 고르지 않습니다.
그의 대답은 그냥 사람의 손에 벌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입니다.
바로 주님이 자비가 많으시기 때문에 주님 손에 직접 징계를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남의 손보다 부모님 손에 긍휼이 많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7년 흉년이든, 3일 전염병이든 상관없다는 의미입니다.
분명 다윗은 인구조사를 할 때만해도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는 겸손한 자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게 원래 다윗의 본모습입니다.
성경에서 다윗이 위대한 왕이 된 것은 그가 전쟁에서 매번 이긴 왕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서 마지막장에 그가 전쟁에서 이겨 땅을 얼마나 넓혔는지 기록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죠.
하나님은 다윗의 그런 모습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가 위대한 이유는 죄를 지었을 때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윗의 이 점을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가난한 마음, 그 마음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이런 다윗의 낮고 가난한 마음에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15, 16절입니다.
그리하여 그 날 아침부터 정하여진 때까지,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전염병을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백성 가운데서 죽은 사람이 칠만 명이나 되었다. 천사가 예루살렘 쪽으로 손을 뻗쳐서 그 도성을 치는 순간에, 주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신 것을 뉘우치시고, 백성을 사정없이 죽이는 천사에게 “그만하면 됐다. 이제 너의 손을 거두어라”하고 명령하셨다.
다윗이 인구조사했던 전쟁가능한 백성의 수가 이스라엘 80만, 유다 50만입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재앙으로 인해 죽은 백성의 수가 7만입니다.
며칠만 하나님이 전염병으로 치시면 다윗왕국은 끝장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며 다윗은 자신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가난해진 다윗의 마음을 아셨기에 스스로 정하신 재앙의 기간이 3일 이었지만 그 중간에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징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징계 속에서 드러나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낮아지고 가난해진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낮아진 마음이 17절에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그는 놀랍게도 죽음의 천사를 보았고 주님께 백성 대신에 차라리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쳐 주시라고 고백합니다.
백성들을 숫자로 여기던 군주의 모습에서 이제 백성들을 양으로 보는 목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본모습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또한 그의 이러한 모습은 훗날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 예수님의 모형역할을 합니다.
다윗은 말만 했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의 죄악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은 넘어진 우리를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까요?
셋째, 주님은 그 은혜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18절입니다.
그 날 갓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였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으로 올라가셔서 거기에서 주님께 제단을 쌓으십시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백성들을 죽이던 천사들의 칼이 멈춘 곳입니다.
그 심판의 자리에서 주님은 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왜 일까요?
예배드릴 수 있는 다른 정해진 곳이 있는데도 왜 하필 이 곳일까요?
주님은 다윗이 넘어졌던 그 자리, 그를 일으켜 세워주신 그 자리를 기억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용서와 자비가 베풀어 진 곳,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아, 이스라엘아, 너희가 넘어졌던 곳이 바로 이곳이란다. 이곳에서 나는 너희를 은혜로 다시 일으켜 세워줬어. 잊지말고 기억하렴. 예배드릴 때마다 나의 은혜를 기억하렴.”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지게 됩니다.
다윗의 진심, 그의 본모습이 또다시 드러난 장면이 있습니다.
아라우나와 다윗의 대화입니다.
아라우나는 자신의 마당에서 왕이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제사드릴 도구들을 모두 그냥 무료로 왕에게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앗싸 가오리, 돈 굳었다’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그의 호의를 거절합니다.
자신이 직접 그 값을 모두 꼭 지불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반드시 본인이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구조사때에는 자신의 욕망에만 집중하던 그가 이제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지 집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다윗다운 모습입니다.
다윗은 한걸음을 걸어도 하나님 마음을 먼저 생각하던 그런 하나님 백성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제사는 번제와 화목제입니다.
번제는 제물의 전체를 불로 태워 드리는 헌신이 목적이고, 화목제는 화목, 즉 하나님과의 교제가 목적입니다.
다윗이 드린 헌신의 번제와 화목제로 인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처럼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넘어졌던 자리였으나 예배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로 넘어진 자리는 어디일까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으로 심판받아야 하는 재앙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자신의 몸을 찢어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것입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처럼 저주와 심판의 자리가 용서와 은혜, 예배의 자리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기억하며 예배를 드리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에는 진정한 회개와 헌신, 그리고 주님과의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무엘서를 마무리하며 다윗이 넘어진 죄의 장면을 다시 소개한 이유는 그 속에서 정말 다윗다운 위대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낮은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간 다윗,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다윗, 양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다윗, 예배를 기뻐하는 다윗이 진짜 하나님 마음을 닮은 다윗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다윗처럼 우리가 한 걸음을 걸어도 하나님 백성답게 걷기를 원하십니다.
그 모습이 바로 내 힘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삶입니다.
매일 넘어져도 또다시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용서받고 다시 일어서는 삶, 담대히 예배의 자리로 나와 주님의 은혜를 기뻐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얻은 성취나 성과보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더 기뻐하십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무대에서 자꾸 넘어져도 다시 주님 손 잡고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모든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