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고 위로하라

사무엘하 강해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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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은 교회가 사역에 실패했을 때 성도가 절망했을 때 슬퍼해야 함과 위로해야 함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사역이 무너질 때 슬퍼해야 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사역이 무너질 때 슬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군대를 이끌고 길보아 산에서 전투를 한 것은 일종의 하나님 나라의 사역입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원수 블레셋을 물리치는 일은 옛 언약 백성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이었습니다. 지난 번 본문을 설교할 때 들으신 것처럼 이 전쟁에서 사울은 패배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말렉 사람을 통해 들은 다윗은 애가를 지어 부릅니다. 그런데 이 애가, 슬픔의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는 것이 좀 부자연스럽습니다. 이전에 다윗은 사울이 심판 받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6장 10절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사울을 치시거나 아니면 전쟁터에서 망할 것이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그렇게 말해놓고 사울을 위한 슬픔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어색해보입니다. 다윗이 이중적인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이 애가는 다윗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 전체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 애가는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고 명령이 내려진 애가입니다. 그러니까 공적인 애가입니다. 19절에 보시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이스라엘의 영광이 죽임 당한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은 단순히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옛 언약시대 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은 사역을 감당했지만 그 사역이 무너지게 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영광이 죽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20절에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고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라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 노래가 단순히 애도의 노래라면 이런 내용이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이 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블레셋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까? 아마도 이미 다 알고 있을텐데 왜 이렇게 말했습니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 있는데, 그러니까 블레셋이 언약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언약 백성이 복음을 대적하는 세력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교회의 사역이 무너졌는데 이 일로 인해서 복음에 대적하는 세력들이 마치 교회에 대해서 승리한 것처럼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역이 무너지고 실패하는 것이 불신자들의 기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지금 이 애가, 슬픔의 노래를 부르는 주된 이유는 바로 교회의 사역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언약백성들이 불신자들에 대해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슬픈 일이라는 것을 유다 족속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역이 무너지고 패배한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알려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한 그 길보아 산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21절에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으면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않습니다. 밭이 없으면 농작물이 어떻게 자라겠습니까? 땅의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는 양식을 내는 것입니다. 땅이 양식을 내지 못한다는 것은 땅이 받을 수 있는 아주 악한 저주입니다. 그 땅에서 교회의 사역이 실패하고 무너졌다는 이유 자체만으로도 다윗은 이런 저주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 땅에서 사역에 실패했는데 그 땅에 농작물이 풍요롭게 자라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복음이 흥왕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졌는데 세상적인 부요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입니다. 21절 말미에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같이 되었다고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마 방패가 기름칠이 되지 않는 것처럼 녹이 슬었다는 의미입니다. 기름 부음은 직분을 받을 때 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기름칠이 되지 않아서 방패가 녹슨 것처럼 되었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울의 방패가 상징하는 것은 사울이 언약백성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방패를 들고 있어야 하는데 그 사울이 죽어서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니까 방패가 녹이 슬어서 그 기능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역이 무너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적용) 교회에게는 음부의 권세에 대한 최종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교회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이 죄인이고 부족하기 때문에 교회의 사역이 때론 흔들리고 사람이 보기에 실패라고 부를 정도에 이르기도 합니다. 다윗은 이것을 노래로 만들어서 백성들이 명심하도록 합니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도록 다시는 넘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일종의 피드백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피드백이 있습니까? 연말이 다가옵니다. 22년도에 더 기도하고 더 말씀보고 더 섬기기로 다짐했는데 다짐만큼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스스로를 돌이켜봐도 부끄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다윗이 부른 슬픔의 노래가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피드백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는 나의 사역이 교회의 사역이 흔들리지 않도록 영적으로 패배했던 나날들을 기억하며 지금부터라도 23년도를 준비하며 새롭게 다짐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지난 아픔의 시간들을 슬퍼하며 각성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길보아 산에서 나오는 풍요로운 농작물은 신자로서 감당해야 할 삶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이 우리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2- 사역이 무너질 때 위로해야 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교회의 사역이 무너질 때 위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러지고 넘어질 때 슬퍼할 뿐 아니라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실패했지만 그 실패한 과정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발버둥 쳤던 것조차 하나님께서는 허투루 보지 않으십니다.
22절에 보시면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전투에서 졌습니다. 그 사역이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위해 했던 그 고군분투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언약 백성을 지키고 복음에 대적하는 세력들을 저지하기 위해 쐈던 화살과 휘둘렀던 칼은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23절에는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서로를 사랑스럽게 여겨서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을 함께 살펴보면서 느꼈지만 사울과 요나단이 사이가 서로 그렇게 좋지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좋아하는 요나단이 탐탁지 않았고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전쟁에서 소극적으로 임했을 때 요나단은 적극적으로 나섰고 사울이 부당한 금식을 선포했을 때 요나단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둘은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사울은 요나단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둘은 서로 사랑했다고 말하기엔 사이가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둘이 사이가 좋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간에 사역자 간에 의견이 달랐습니다.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한 전쟁터에서 희생한 이들이 서로 사랑했다고 한마음 한뜻이었다고 그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사람이 독수리처럼 빠르고 사자보다 강했다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은유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용맹한 전사였다는 표현입니다. 사울은 전 생애로 따지면 용맹한 순간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용맹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독수리처럼 빠르고 사자처럼 강했더라면 길보아 전투에서 패배했겠습니까? 그래도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용맹한 전사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왜 이렇게 사울과 요나단의 관계가 좋았다고 이야기 하고 그들의 용맹함을 기념하며 노래를 지었습니까? 이것은 사역에 실패한 교회를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의 이 애가가 성경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 다윗이 지은 애가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사역에 실패한 언약백성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에 실패하고 복음의 전진을 주춤거리게 한 나약한 백성들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누구의 입술을 통해 위로하십니까? 사울 다음으로 왕이 될 다윗을 통해서, 메시아의 계보를 세울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하나님 나라 건설사역을 감당하자고 힘 한 번 내보자고 그렇게 교회를 위로하고 계십니다.
(적용) 하나님이 다윗의 입술을 통해 실패한 구약교회를 위로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살아갈 때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한 편 실패한 우리를 다시 위로하고자 하십니다. 다윗이 이 노래를 유다 족속들에게 널리 알린 것을 기억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로함과 동시에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위로로 서로를 위로하기 원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가운데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했던 우리들을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물론 다시 실패하지 말자는 굳은 결심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졌지만 잘 싸웠다. 수고 많았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위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위로를 통해서 교회가 더 힘을 얻고 세상 가운데 승리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유다족속이 이 노래를 부르며 듣고 위로 받았던 것처럼 우리는 위로를 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위로를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위로 받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위로를 받을 줄 알아야겠습니까?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서 위로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참된 위로는 말씀과 기도에서 나오는 줄로 믿습니다. 지치고 나약한 우리에게 말씀이 능력을 불어넣어줍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부르짖으며 울 때 다시금 우리 마음에 활력이 생기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날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로 우리가 다시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위로를 통해 다시금 우리가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힘과 동기를 얻게 됩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실패합니다 좌절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실패를 그냥 지나치지 말고 우리의 실패를 슬퍼하며 다시는 이렇게 실패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우리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실패할 때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을 기억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또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우리되길 기도합니다. 이 슬픔과 위로를 통해서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우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이바지하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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