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랑을 하는가?(요21:15-25)
Notes
Transcript
일시 : 2022년 10월 30일 주일 청년부
제목 : 어떤 사랑을 하는가?
본문 : 요한복음 21장 15-25절 *신185
결단찬양 :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도입]
하나님이 왜 우릴 사랑할까? 그리고 그 사랑은 어느 정도의 사랑인가? 고민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성도들마다 또 목회자들 조차도 강점이라 생각하는, 또 선호하는 파트가 있을 것인데, 제가 유독 강점은 아니고 선호하는 파트가 있다면, ‘고난’ 또 ‘십자가’ 그리고 ‘사랑’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그 사랑’에 대한 묵상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어떤 일을 겪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귀결되는 모습을 종종 보이곤 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특별새벽부흥회로 하나님 앞에 모여 나아왔습니다. 참으로 큰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새벽을 깨워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했습니다. 수 많은 성도들이 함께 예배를 만들어감에 기뻤습니다.
그 안에서 여러모로 힘든 일도 참 많았습니다. 특새 첫 날부터 조아엘이 고열로 이상징후가 생겼고, 동네 소아과와 서울대병원 응급실을 오고 가며 다사다난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물론 제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불안했고 불편했습니다. 답답했고 막막했습니다.
그러다 지난 주 토요일 끝내 아엘이는 입원을 했고, 울다 지쳐 잠드는 이 친구의 모습과 또 수액과 눈물로 인하여 퉁퉁 불어버린 모습을 보며 화가 나다 못해 저 또한 진이 다 빠진채 특새를 마무리 하게 되었습니다.
주일이 결코 즐겁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무거웠고, 온갖 신경이 병원에 있는 아엘이에게 가 있었습니다. 참 하나님 앞에 죄송한 한 주 였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자의 마음밭이, 또 예배를 드리는 자의 마음밭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에 참 죄송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참 감사했습니다. 나의 자녀가 아파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아빠여서 참 마음 아팠는데,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려 죽으실 때 천지만물을 지으신 위대한 능력 위에 세워진 하나님 입장에서는 할 수 있어도 할 수 없었음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우리가 무엇이길래 이런 선택을 하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그 이유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이유로 이 놀라운 사랑을 받는 것에 참으로 감사했고, 그 사랑은 결코 우리가 흉내낼 수 없는 사랑임을 매순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물어보고자 함은, ‘정작 우리는 그 사랑에 무딘 반응을 보이지 않는가?’ 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 크고 놀랍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정작 우리의 반응은 무디고 때로는 반응 조차 없는 삶 아닙니까?
이 사랑이 우리의 삶에 너무 익숙하고, 또 단어조차 너무 익숙한 단어겠지만, 우리의 삶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왜 ‘사랑’이 그토록 중요한가 나눠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표현 1) 게바가 아닌 시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향한 ‘사랑하느냐’에 대한 질문과 또 그에 대한 베드로의 답, 그리고 이에 대한 예수님의 피드백이 담긴 내용입니다.
15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우리는 흔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 초점을 두지만, 여기서는 정말 하나님의 기가막힌 배려와 사랑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베드로의 원래 이름이 무엇입니까? 바로 ‘시몬’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받은 이름이 무엇입니까? ‘반석’이라는 의미로써의 ‘게바’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베드로가 정령 반석의 삶을 살아냈습니까? 결코 반석이라 칭하기 부끄러운 삶이 그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러 올라갔을 때에도 잠을 이기지 못해 한탄을 자아내기도 했고, 또 예수님을 모른다 부인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은 결코 단단한 반석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그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을 것이고, 또 예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곤욕이었을지 모릅니다. 또 베드로라는 이름이 부끄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그가 게바라 불리우기 전 이름인 ‘시몬’이라 부르시며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배려하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랑표현 첫 번째, 게바가 아닌 시몬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제자를 배려하시는 그 예수님의 사랑은 이 날로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날 우리를 향해서도 이어져갑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똑바로 살아낸 날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화가 치밀어 올라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하며,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불의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사람이라 차마 말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우리는 살아냈습니다.
그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 비춰졌을 때, ‘옳도다’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은 분명 아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자리에 모이게 하셨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배려이자 하나님의 사랑이겠습니까.
베드로는 시몬으로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만나 게바가 되었고, 그의 삶이 결코 게바라 말할 수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배려와 또 변치않는 사랑에 끝내 그는 진정 게바의 삶을 살아내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안에도 주어져 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금은 연약함만 가득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자의 모습이지만, 날마다 우리를 쳐서 하나님 앞에 또 다른 게바로서 세워져 가는 우리 청년 공동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사랑표현 2) 공동체 속으로]
그렇게 배려로 시몬을 부르신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냥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라 말씀하시며 ‘너와 함께 한 이들 중 너가 가장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매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질문 아닙니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그런 수준의 질문 아닙니까? 그렇다면, 정말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질문하셨을까요?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베드로는 반석으로서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 부끄러웠을 것이고, 자존감도 많이 떨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난 3년간의 행보가 무의미했었다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이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 의미 없다 느꼈을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치명적인 사건 하나로 교회를 멀리 하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관계 문제로, 목회자와 성도 사이의 문제로, 세상과 교회의 문제 등 정말 다양하고 많은 이유들로 교회를 떠납니다. 어쩌면 그들은 교회를 떠날 이유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교회를 참 많이 떠납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그런 자가 되지 않길 소망하고 아니 축원합니다. 혹여나 떠날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시금 재정비하고 또 결단으로 다시 나아가는 시간 되길 소망합니다.
베드로는 정말 많이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너진 그의 모습을 보며 게바가 아닌 시몬이라 부르시며 배려를, 그리고 그가 어떤 공동체에 속해져 있는 사람인가를 다시금 알도록 하시기 위해 그를 향해, ‘네가 이 사람들보다’ 라 말씀하시며, ‘베드로야, 너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란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표현 두 번째는, 우리를 공동체 속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려는 여러분들을 향해 저의 붙잡음은 그리 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만한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인간의 위로와 격려는 그저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는 위로이자 격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루만지는 위로와 격려는 상상 그 이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 위로와 격려는 다시 이 공동체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공동체를 떠나 다시 어부의 길을 걸었던 그를 향해 ‘베드로가 진정 속해야 하는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가를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 입니까? 친목입니까? 예수로 세워지는 공동체 입니까? 우리의 공동체는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날 것이며, 예수만이 남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이어진 청년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표현 3) 목자가 되어 내 양을 먹이라]
그런 사랑을 배푸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묻습니다. 무려 세 번을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세 번 대답합니다.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세 번의 질문을 받을 때, 베드로는 ‘근심’하게 되는데, 저는 이 근심이 심히 공감이 됩니다. 그거 아십니까?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면 없던 잘못도 있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말입니다.
주로 아내가 ‘잘못한 거 없어?’ 라고 물었을 때, ‘없는데?’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럼 다시 묻습니다. ‘진짜 잘못한 거 없어?’ 그럼 저는 다시 대답합니다. ‘진짜 없는데?’ 아내가 재차 묻습니다. ‘잘 생각해봐. 진짜 잘못한 거 없는지.’ 그럼 저는 생각합니다. 지난 날들의 모든 과정을 그 어느 때보다 빨리 복기합니다.
처음 대답은 별 생각없이 대답했지만, 반복되는 질문은 저를 근심하게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떤 근심에 빠졌을련지 이해가 됩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줏대있게 대답합니다.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 동일한 대답을 하십니다. 보통 ‘사랑한다’ 말을 들으면, 여러분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그래, 나도 사랑해.’ 라 대답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또 상식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세 번 다 일반적이지 않고 또 상식적이지 않는 대답을 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진정 예수님의 사랑이 담긴 표현이라면 오히려 일반적이고 상식적이지 않아 다행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표현 세 번째가 됩니다. 더이상 어린 양이 아닌 목자가 되어 내 양을 먹이게 하셨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에 나도 사랑한다 대답이 왔다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시 여겼던 일들을 우리 또한 함께 감당하자 말씀하신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지금껏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써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는 너희가 ‘목자’가 되어 어린 양을 먹이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매우 크고 놀라운 사랑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시몬이 다시 게바가 되도록, 또 공동체에 다시 거하도록, 또 어린 양이 아닌 목자가 될 수 있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런 사랑이 오늘 날 우리를 게바로, 이 공동체로 또 목자로 이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 사랑을 맛보아 사역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 지금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면, 어쩌면 내려놓고 다시 신앙의 재정비를 하는 것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사랑없이 행하기에는 수명이 너무 짧습니다.
어린 양을 먹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목자로 준비되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주님의 사랑을 받아 먹은 자여야 합니다. 사랑 없이는 내게 맡겨진 양들을 사랑해줄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조건적일 것이고 제한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베드로의 사랑아닌가?]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누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지만, 우리는 베드로의 사랑을 행하지 않는가 점검해봐야 합니다. 20절과 21절 함께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베드로는 요한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그 제자, 즉 요한이야 말로 예수님을 팔 자가 누구냐 물었던 자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그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 없었던 자 아닙니까? 저 자는 어찌 됩니까? 저 자도 어린 양을 먹일 자 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베드로야. 요한이 무엇을 하든 그것이 너에게 무슨 상관이겠냐. 그저 너는 나를 따르면 된단다.’ 라 대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런 대답을 하셨겠습니까?
베드로의 마음밭을 봅시다. 그의 마음밭은 여전히 자존감이 낮아져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가 택한 방법은 ‘비교’ 였습니다. ‘그래도 제가 저 친구보다 낫죠? 그렇죠 주님?’
그런 베드로의 연약함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며, 베드로의 마음의 중심이 오직 주님께 있기를 강권하셨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점검하며 이 공동체 안에서 정말 즐겁게 신앙의 성장을 맛보길 소망합니다. 베드로의 사랑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주어져 함께 걸어가길 소망합니다.
사랑이 없는 이 시대 가운데, 우리만 사랑하며 실천하는 것이 호구의 사랑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가 받은 그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받기만 하는 것이 더 염치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우릴 욕해도, 세상이 우릴 비난하고 손가락질 해도 그들이 말하는 진리가, 그들이 주장하는 정답이 결코 완전할 수도, 또 완벽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외침은 실속없는 외침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외침에 유혹되거나 미혹될 것이 아닌, 정말 하나님의 사랑에 뒤덮여져 그 사랑으로, 우리게 주신 이 말씀으로 걸어 나아가 실천하는 자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제목]
1) 예수의 사랑으로 장차 게바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2) 예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청년 공동체 되게 하소서
3) 청년부를 위해 헌신하고 섬기는 자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먼저 충만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