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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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큰 비의 소리
성경 : 왕상 18:41-46
제가 요즘 외로움을 느낀다. 곁에 누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홀로서 있음을 느낀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전에는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언제부턴가 나무가 되어 주거나 의자가 되어 주는 위치에 있더라. 그러니까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점점 없어진다.
저도 답답한 일이 생기고 어려운 일이 생긴다. 그때 제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은 기도밖에 없더라. 요즘 제가 경험하는 기도는 숨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서 마음에 생긴 구멍을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우상의 죄로 눌려 있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고, 오히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힘이 있는 시대였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서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게 하셨다. 그 예언 이후에 엘리야는 숨어 버렸고 이스라엘 전체가 메마르기 시작했다. 아합과 사람들은 물을 찾아 이곳저곳을 다녀야했다. 그럼에도 물을 얻지 못했다. 그 정도가 되면 하나님을 찾을 법도 한 대 그 잘못을 엘리야에게 찾았다.
하나님은 바알의 본산지인 시돈으로 보냈다. 그곳에서도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바알의 본산지 조차도 가뭄으로 망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으려던 여인과 아들을 살린다. 한 움큼의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다. 이 일을 통해 비를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다. 이제 이스라엘로 돌아온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바알 선지자를 갈멜산으로 불러 달라고 요청하며, 대결을 한다. 그리고 엘리야의 제단에만 불이 떨어지면서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났다. 그리고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로 데려가서 심판하였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 아합왕이었다.
큰 비의 소리
41절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이 순간 아합은 엘리야가 두려웠을 것이다. 불이 떨어지는 것도 보았고 바알 선지자들이 죽는 것도 지켜보았다.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인지 아합은 엘리야의 말을 잘 듣는다. 조금 전만 해도 엘리야를 죽이려 하던 모습은 없고 순한 양이 되어 버렸다. 엘리야가 올라가라하면 올라가고, 엘리야가 내려가라하면 내려간다. 기새가등등하던 아합이 하나님의 권능 앞에 왕의 자리조차도 얼마나 초라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달라져도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비슷해 보인다. 그러니까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인 것이다. 세상은 달라져도 사람은 죄인이다. 요즘은 삶의 주체자가 자신이기 때문에 누군가에 다스림을 반대한다.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독립적 존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자신에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유인이 되고자 했다. 다 틀린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하다. 모두가 자유를 외치고, 스스로 주인이 되었기에 더 혼란스럽다. 질서가 없고 혼돈의 카오스속에 있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살고 싶어서 사람들은 위대한 누군가가 변화시켜줄 것이라 기대하지만,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이기에 실망하는 것이다. 세상을 조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기 전에 하는 것이 있다. 조율이다. 그 중심은 오보에다. ‘라’음으로 알고 있는데, 표준음이 440Hz다. 오보에가 라음을 불면 그것에 맞추어서 소리를 정리하는 것이다. 모든 악기가 본인이 기준이 되려하면 그 연주는 망친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 민족을 위해서,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조율해 주시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엘리야는 이제 440Hz를 불려고 한다. 갈멜산 꼭대기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때 기도하러 가면서 아합에게 먹고 마시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큰 비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라는 말은 이제 비가 내리면 이스라엘 땅도 윤택해지기 때문이다. 이미 엘리야는 18: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합 앞에서 비를 내리신다는 말씀을 들었다. 이스라엘 12제단이 수축되고 불이 내리면서 바알 선지자들이 정리된 이 시점이 비를 내리시는 시기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성경에 ‘큰 비 소리’에 ‘큰’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거대하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45절을 보시면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할 때, ‘큰’은 우리가 생각하는 큰이 맞다. 그런데 1절에 나오는 큰은 굉음에 가까운 여러 소리를 말한다.
혹시 야구장이나 축구장을 가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경기장을 가면 가득찬 관중이 소리를 내면 굉장하다. 특히 반칙에 의해 위험한 상황이 되어서 ‘오’하면, 그 여러 소리가 하나로 모이면 운동장 전체가 울려 버린다. 이런 뜻을 가진 말이다.
어떤 음악 평론가가 90년대 노래와 현대 노래에 다른 점을 말하면서 ‘비’라는 가사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파트 시대로 바뀌면서 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젊은 세대일수록 이런 감성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가사에 비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정말 일리있는 해석인 것 같았다.
지금 이스라엘은 비의 소리가 잊혀진 상황이었다. 3년 동안 비 구경을 못했다. 그런데 이제 땅에 떨어지는 여러 빗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음 주부터 기도회가 시작된다. 우리가 조율하려고 했던 것 멈추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한다. 우리 민족을 바라보며 정치에 희망을 찾지 말고 하나님의 조율을 구하자. 이 민족을 살라시는 분도 우리 가정을 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은혜의 소리를 들은 적이 언제인가. 은혜의 비를 맞아본 기억이 언제인가.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는 그 시간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시고 부어주실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기를 원한다.
오늘 우리는 총 6절을 읽었다. 그런데 이 6절 안에 ‘올라가서’라는 말이 7번 나온다. 이 올라가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드려진 번제나 성전으로 나아갈 때 많이 쓰이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주신 기도의 시간에 우리 모두가 다 올라가자. 내 주위에 가정일로, 개인적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권면하자. 우리가 함께 기도의 자리로 올라가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은혜의 비를 함께 누리자고 말이다.
2. 간절한 기도
42절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사실 엘리야는 기도하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비를 내리신다는 소리를 듣고서도 기도하고 있다. 그것도 그냥 기도하는 것도 아니라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겸허히 구하고 있다. 그리고 43절 말씀을 보시면,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엘리야는 기도하고 사환에게 바다쪽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찾도록 했다. 44절을 보면 찾는 것이 구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도 7번이라는 말은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다.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을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확인하며 기도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멈추지 않고 기도해야 할 이유를 찾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세상의 기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기도는 내 중심에 기도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 바람이나 뜻을 우리는 기도조차도 하나님의 뜻 앞에 종속된다. 그러니 세상의 기도와 다른 것이다.
조금전에 엘리야는 하나님이 비를 내릴 것을 알면서도 기도했다고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면 우리는 왜 기도하는 것일까.
제가 처음 기도응답이라는 것을 경험했던 일이 교회 음향 시스템이었다. 그 당시 목사님께서 음향 장비 캐비넷에 열쇠를 채워 두시고 다른 사람들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찬양팀은 개척시절부터 사용해온 낡았고 채널이 없어서 형들과 누나들이 너무 힘들어했다. 그래서 기도했는데, 기도중에 성도님 한분이 감동을 받아서 음향 시스템을 사라고 헌금을 하셨다. 돈을 많이 주셔서 음향 시스템뿐만 아니라 키보드도 구입했다. 모두가 좋아했다. 그때 제 마음은 어떠했을까.
우리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이 있다. 비를 맞는 사람이 되지 말고 비를 내리는 사람이 되라고 말이다. 물론 비를 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비유로 하는 말이다.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삶을 책임 지시고 채우신다는 믿음이 없다. 그저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주어졌거나 조금 더 믿음이 있으면 감사하며 누릴 뿐이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일하심을 눈으로 보고 경험하게 된다. 엘리야와 아합을 보면 알 수 있다. 아합은 비를 맞는 자였다. 불이 떨어지고, 비가 내려도 그가 향한 곳은 결국 이세벨이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불을 내리신분도, 비를 내리신분도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비를 맞는 사람이 아니라 비를 내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찬양이 달라지고, 우리 감사와 간증이 달라지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 은보 공동체 안에 하나님이 하셨다는 진짜 간증이 끊이지 않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1만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조지 뮬러의 간증을 부러워한다. 그러면서 응답받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찾고 싶어한다. 질문 시작부터 틀렸다. 그러면 0점이다. 하나님은 그 자녀의 기도를 다 응답하신다. 단지 조지 뮬러는 기도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임을 알았던 것이다.
마7:7-8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우리 기도에 힘이 있는 이유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리신다고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구한다고해서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이나 내가 원하는 시간에 다 주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꼭 필요한 시간과 반드시 필요한 것을 주신다.
제가 지난 여름에 교회 2층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평일이었기 때문에 교회 성도님들이 잘 안오시는데, 두분인지 세분이 오셨다. 여성분이셨는데, 2층 화장실에 들어오신 것이다. 처음에는 제가 잘못 들어온줄 알았다. 한번씩 제가 생각이 깊어지면 멀하는지 모를때가 있다. 그래서 3층에 왔나하고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도사님이 2층에는 김야긴 장로님께서 꽃 장식을 하셨다는 말이 생각나서 보니까 제가 2층에 왔어요.
문제는 그 당시 안쪽 문이 고장나서 밖에서 털커등하면 열렸기 때문에 손잡이를 급히 잡았다. 슬픈 예감은 틀린적이 없다고 한분은 첫 번째 문을 여셨고, 한분이 문을 당기시는 것이다. 문이 열릴 번했다.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다. 내가 원하는 모양과 시간에 응답되지 않아도 실망하면 안 된다. 칼을 달라하는 아이에게 칼을 줄 부모는 없다. 그리고 떡을 달라하는 아이에게 돌을 줄 부모도 없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 그리고 정확한 타이밍에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주어지기를 원한다.
우리의 착각은 우리가 가진 문제가 해결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나의 문제나 핸드캡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문제를 지고 가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아멘하기 힘드시겠지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내가 당하고 있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의 백성으로서 살아내는 은혜를 구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성도인 것이다. ‘아멘’이신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 성도님들이 ‘배목사 봐~ 저렇게도 살아가는데...’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저봐 은보교회 성도래. 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살아낸데’ 이런 증인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3. 작은 구름과 큰비
44절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일곱 번째 작은 구름이 일어났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것이 응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합에게 비가 내린다고 마차를 타고 내려가라고 말한다. 그것도 작은비가 아니라 큰비였다. 우리는 기도 응답이라고 말할 정도가 되려면 내 아이가 서울대 가거나 죽었다가 살아난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교회 이상한 간증의 영향 때문이다. 기도 응답은 크고 작음이 없다. 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것이다.
사르밧 과부를 보면 한 움큼 가루와 조금 남은 기름이 다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니까 그것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만 기도응답이 아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한 번 떨어지는 불이나 한 움큼 가루와 기름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가루와 기름을 선택할 것이다. 불은 한 번 떨어지면 끝이다. 그런데 가루와 기름은 비가 내리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어느 것이 더 좋다는 말이 아니라 모두 기도 응답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은 내게 있는 한 움큼이면 충분하시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어떤 사람에게는 불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가루와 기름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결론>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신은 수명에 운행하실 때, 세상은 공허와 흑암과 혼돈이었다. 그곳에 빛을 시작으로 채워 넣으셨다. 우리 삶을 바꾸시고, 우리 가정을 새롭게 하시고, 불안한 대한민국을 조율하실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그러므로 사통팔방 기도로 함께 모여서 기도라는 오보에는 들고, 440Hz를 함께 맞추며 주께서 내리실 큰 비의 역사를 우리 모두가 경험하기를 소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