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본성에 속한 무력함으로 용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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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86
1. 예수님의 공생애는 죄인을 용서하는 걸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서란 무엇인가요?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와 동등하게 가치있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용서하지 못할 때에 반드시 잘잘못을 따지고 비교하면서 “내가 옳아. 너는 틀렸어. 그래 나도 잘 못한 부분이 있지, 하지만 최소한 나는 너보다는 옳아”라는 확증편향에 빠집니다(세상에서 제일 접착력이 강한 수렁). 또한 상대를 선물로 생각하지 않을 때에 내가 그 사람을 통해 더욱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과 서로 의존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내게 전혀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 받지 못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너는 인간도 아니야. 너는 내게 전혀 필요 없는 존재야.”
2. 우리는 세상을 보십시오. 일생 동안 끊임 없이 용서 받고 용서하는 경험보다 용서 받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경험치가 쌓입니다. “너는 인간도 아니야. 너는 내게 전혀 필요 없는 존재야.”를 가까운 사람에게 쏟아 놓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렇게 관계의 회복을 이루지 않음으로 모두가 성장하거나 형통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과 갈망을 살펴보십시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부부사이에서, 사회 안에서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너는 내게 정말 필요한 사람이야”라는 사실을 느끼고 싶습니다. 다들 쓸모와 능력으로 그것을 확보하고 싶습니다. 조금만 능력 없는 것을 들켜 쓸모 없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긴장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용서하고 용서 받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과정은 “그래도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나에게 당신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이렇게 용서를 통해 사람들의 인간성을 키워주는 사람으로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이 용서를 통해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과정을 봅니다. 오늘 통독 본문인 23장과 24장에서도 용서의 걸음을 내 딛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특별히 오늘 통독하실 때에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통해 죄인을 용서하시는 걸음에서 보여주시는 것은 당신의 권능이 아니라 사랑의 본성에 속한 무력함임을 주목하십시오. 사랑의 본성에 속한 무력함이 무엇인지 본문에서 대략 살펴 보겠습니다.
4. 23장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무력함입니다. 먼저 총독 빌라도의 무력함입니다. 23장 4절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총독으로서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하고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력합니다. 대중의 여론 앞에 무력하고, 있을 지 모르는 소동 앞에 무력하고, 자신의 지위 앞에 그의 양심과 권력은 무력합니다. 25절까지 보여주는 것은 빌라도의 무력함과 비겁함입니다. 죄 없는 한 사람을 정죄하는 무리 앞에 빌라도는 무력합니다.
5. 26절에도 한 무기력한 사람을 만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순례객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군병은 이 사람을 붙들어 예수님이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매우 짧은 기록이지만 놓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나중에 그의 자녀들은 초대교회에서 지도자로 쓰임을 받습니다. 여튼 여기에 자기의 의사와 상관 없이 무기력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분명 예수님의 십자가의 무게를 이후 변화의 과정을 통해 가장 힘있게 증거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6. 빌라도는 스스로 권세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무기력하게 무죄한 예수님을 정죄한 사람이었고, 구레네 사람 시몬은 항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무죄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순례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 가장 무기력하게 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분은 온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이십니다. 열두영이나 되는 천사를 보내 로마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지신 왕이셨습니다. 그런데 피조물의 손에, 로마 군병의 손에 무력하게 이끌려 가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진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의 온 몸과 머리는 으깨지고 찢어졌습니다. 상할대로 상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해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증명하라. 너 스스로를 구원하는 권능도 없으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는 그런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7. 계속말합니다. “권능을 드러내지 않으면 메시아가 아니다. 무기력한 너는 메시아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십니다. 전능하신 성자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무기력함을 끝까지 드러내십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이 죄인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용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주도권을 뺏깁니다. 젠장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호세아서를 생각해 보십시오.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을 합니다. 그녀는 결혼식을 하자마자 집을 나가 배가 불러 돌아옵니다. 호세아는 그녀의 아이들을 키웁니다. 그런데 엄마는 또 집을 나갑니다. 기다려도 그녀는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그녀를 데려오라고 해서 찾아가보니 그녀는 이미 포주에게 저당 잡혀 몸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을 다시 돈을 주고 사서 돌아옵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호세아가 바보요, 고멜도 바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더 바보냐고 말하면 호세아죠. 완전히 주도권을 뺏긴 병신 같은 남편입니다. 다리 몽댕이를 부러뜨리든지 해야지 왜 이렇게 행동을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믿을을 수 없는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는 사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8. 호세아 11장 8~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성경의 하나님은 혼자 화를 내고 또 혼자 화를 풀고, 북치고 장구친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런 변덕을 부리는 하나님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분명 온 우주의 주권을 가지신 분이신데, 그래서 모든 주도권을 가지신 분이신데, 그분은 에브라임 앞에서, 이스라엘 앞에서, 교회 앞에서, 주도권이고 뭐고 다 버린 호세아가 되어 버립니다. 그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의 손에 이끌려 여기 저기에 보내져서 조롱을 당합니다. 사람의 창에 찔립니다. 왜요? 왜요? 사랑의 속성 때문입니다.
9. 사랑하면 무기력해 집니다. 부모에게서 우리가 경험한 것입니다. 그렇게 강한 엄마가 내게 무력해 집니다. 내가 뭐 잘난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부모님께 무례한지 모릅니다. 뭘 그렇게 요구하는 지 모릅니다. 사과도 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정말 무기력하게 자녀에게 끌려 갑니다. 더 사랑하니까. 더 사랑하니까.
10.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예수님께 우리는 용서의 길을 배웁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기력함에 참여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내가 한다 진짜… 용서해 줄게. 내가 더 강하니 용서해 줄게”라는 식으로 용서를 권능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용서란 사랑의 본성에 속하는 무력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린 제자들은 그런 무력함을 나누며, 그 뿌리가 깊어질수록 용서하지 않을 가능성도 줄어들게 됩니다.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너는 내게 정말 필요한 사람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