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의 확장

아브라함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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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보다 질 2. 침묵의 의미 3. 하나님과 걷다 4. 속도를 늦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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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임마누엘 성가대로 섬기느라 고생 많았어요! 보이지 않는 청년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을 것이라 생각해요.
아브람 그의 믿음의 여정 6번째 시간이면서 마지막 시간이에요.
아브람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면서 그도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었고 또 나도 그처럼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위로와 소망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래요.

양보다 질

“선택하기 앞서 반드시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라고 지난 주일 말씀을 나누었어요.
한 주 어떻게 지냈나요? 그렇게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했나요?
나의 속도가 아닌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야 해요.
하나님이 속도를 내기로 마음 먹으면 우리는 따라 갈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기준에 맞는 속도로 일을 진행하고 계셔요. 그것을 애써 내가 끌어 당기면서 속도를 내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래요.
우리는 반드시 나에게 익숙한 속도를 놓아야, 아니 잊어버려야 해요.
내가 이런 속도로 달렸었나? 할 정도로 여러분의 속도를 낯설게 느껴야 해요.
세상이 말하는 가치 판단의 기준은 “얼마나 빠르게 결과를 도출해 내는가?” 에요. 이런 사람이 효율적이고 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요.
우리는 그 프레임에 갇혀 버렸어요.
유치원 때부터 경쟁과 빠른 속도에 끌려 가는 삶을 살아왔어요. 그래서 우리는 늘 오버 페이스 상태에요. 나에게 맞는 속도와 페이스가 무엇인지를 완전히 잃어 버렸어요.
오버 페이스 상태가 되잖아요?
지쳐요. 번아웃이 와요. 다 그만하고 싶어져요.
왜요? 내 페이스가 아니거든요. 나를 잃어버렸거든요.
오버 페이스로 나를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이 아무리 “너는 쏘 스페셜 해. 나를 닮았거든”이라고 수없이 말하고 외치고 또 외쳐도 그게 들리지 않아요.
또 옆 사람의 목소리가 절대 들리지 않아요, 들릴 수 없어요. 들을 여유가 없거든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을 내고 속도를 멈출 자신이 없거든요.
남들이 뛰니까 같이 뛰었어요.
한참을 뛰었는데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디에 서있는지 몰라요.
뭐라도 매듭을 짓지 않으면 안된다는 불안감이 내 안에 스멀스멀 올라와요.
그런데 어떻게 남의 이야기를 듣겠어요.
절대 못 듣죠.
여기에서 멈추면 난 이 나이 먹도록 아무 것도 한 것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거든요.
1분 묵상을 영상을 찍고 편집해서 올리는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드는거에요.
등교하고 출근하는 길에 1분만이라도 시간을 내서 듣고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하면 너무나 좋겠다. 라고 생각해서 시작했는데요.
오히려 제가 여러분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복음을 너무 가볍게 만드는 것 아닐까?
꾸준한 묵상과 기도가 있어야 우리의 신앙이 바로 서는데, 우리 청년들이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1분 묵상 촬영을 멈췄어요.
그리고 아무도 1분 묵상 안올리냐고 묻지 않더라구요. (농담)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 그분의 거룩함을 공유 받는 삶을 즉시 살아 낼 수 있을까요?
없어요.
왜냐하면 거룩함은 ‘하나님의 고요함’이라는 뜻이거든요.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아무 말도 일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고요한 시간을 보내며 내 안에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찾아내고,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하도록 하는 그것들을 하나씩 정리해야 한다는거에요.
거룩함. ‘고요함은 잠잠히 기다리는 시간과 인내가 있을 때’ 우리에게 주어져요.
여러분은 자신과 대화를 하는 시간을 갖고 있나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지금 왜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고 고민을 갖고 있는지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있나요?
지난 주에 태국을 다녀왔어요.
한 해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피드백을 통해 부족했던 부분을 정리하고 내년 계획을 세우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아내가 배려를 해줘서 태국을 다녀올 수 있었어요.
화요일 오전에 룸피니 공원이라는 곳에 갔어요.
룸피니 공원을 간 이유는 거기에 사는 대왕 도마뱀을 만나서 “싸와디캅”하고 인사하고 싶어서 간 거였는데,
갑자기 묵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리고 앉아서 호수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울컥하는거에요. 어떠한 은혜가 있어서 혹은 감동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에요.
최근 고민을 해야 할 일들이 저에게 생겼어요.
그것에 대해 더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고 제 자신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물을 여유가 있어서였어요.
공원 밖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들로 시끄러운데, 그 안은 정말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고요하더라구요.
그 고요한 시간은 저에게 정말 유익했어요.
잠잠히 기다리며 제 자신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어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은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해하는지 잘 알고 있나요?
그런 고민 할 시간이 없다 생각할 수 있어요.
우리는 좀 더 빠르게 결론을 내고 싶어하고 말씀을 듣고 깨닫고 싶어하거든요.
그렇게 속도를 내면 정말 큰일나요.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잃어 버리게 되거든요.
빠르게 얻는 것의 의미는 우리의 영적인 부분을 약화시키고 결국 죽게 만든다는 것 이거든요.
신앙 생활은 깊이 있는 영적 성숙의 시간이 반드시 동반 되어야 해요.
깊이가 생기도록 하는 고민과 어려움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 신앙의 성숙은 굉장히 더딜 수밖에 없어요.
내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그 믿음은 절대로! 빠르게 급조되어 만들어지지 않아요.
반드시 시간을 거쳐 차곡차곡 쌓여야 해요.
쌓여야 비로서 진짜 나의 신앙이 되는거에요.
제가 중학교 때 정말 굉장히 존경했던 형이 있었어요.
매일 밤마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기도하는 형이었어요.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매일 찬양하고 기도했고 또 저를 끌고 다니면서 기도를 시켰어요.
그런데 그 형이 어느 순간 사라졌어요. 그렇게 매일을 기도하며 부르짖던 그 형이 어느 순간 잠수를 탔어요.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떠났어요.
왜 그랬는 줄 알아요? 그 형에게는 알맹이가 없었던거에요.
찬양, 기도 중요해요. 그런데 정말 그 알맹이가 그 형에게 없었어요.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말씀이에요.
찬양 한시간. 기도 한시간 내가 뭐라도 한 것 같잖아요.
누군가 “나 기도 몇시간 했어”라고 말하면 “와우. 대단하다” 라고 반응하잖아요.
그 형은 찬양하고 기도하는게 너무 쉬웠던 거에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자리에서 하면 믿음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니까요.
그런데 말씀은 달라요.
재미도 없고 이해도 되지 않아요.
말씀 읽는 것보다 차라리 찬양을 듣고 부르고 기도하는게 편하다고 생각을 한거죠.
혹시 내가 그렇게 말씀은 전혀 읽지 않으면서 찬양만 듣고 기도만 하고 있지 않았는가 꼭 돌아보세요.
말씀이라는 알맹이가 빠지면 기도의 응답을 기다릴 수 없어요.
그 기도는 넋두리가 될 뿐이에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늘 저와 여러분에게 삶의 해답을 주고 있어요.
그런데 말씀을 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 우리는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반응하라!”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기도, 찬양도 중요해요. 하지만 말씀과 함께 가야 해요. 그래야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본질’을 놓치지 않을 수 있어요.
16장 16절.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아브람이 팔십 육세였더라”
17장 1절. “아브람이 구십구세 때에”
16-17장은 한 장이지만 13년의 차이가 있어요.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이 지났어요. 하나님은 그를 찾아오지 않았고, 어떤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으셨어요.
오로지 침묵하셨어요.
침묵의 의미는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낳아 기르는 것에 대해 찬성하셨다는 뜻 일까요?
잘 낳아서 기르고 있고 그 아이들이 믿음의 자녀가 될 것침묵을 통해 알려 주셨을까요?
왜 침묵하신걸까요?
우리는 이 침묵의 시간을 반드시 묵상해야 해요.
우리가 보았을 때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 같아요.
하지만 13년이라는 침묵의 시간은
아브람에게 있어 하나님을 계속해서 묵상하게 되었던 시간이었어요.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침묵하지 않으셨어요.
그돌라오멜 동맹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6-7년 동안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어요. 79세에 전쟁에서 이긴 후 85세에 이스마엘을 낳았어요.
6-7년간 이어졌던 하나님의 침묵 속에 아브람은 참다 사래와 함께 움직였어요.
하나님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드리고 그는 앞서 움직였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죠? 지난주에 나눴던 말씀처럼 엄청난 실패를 경험했어요. 평온했던 가정이 깨졌어요.
믿음의 사람 아브람이 그 상황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의 침묵이 긍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어요.
기근을 피해 도망갔던 첫번째 시험에 F를 맞았던 것처럼 또 아브람은 실패했고 F를 맞았어요.
끝장이 났어요.
하나님께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로도 비참해진 마음을 가졌어요.
저와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말씀대로 살아보려 노력하다 안되서 넘어지고 또 반복해서 죄를 짓고 나면 하나님께 고개를 들 수도 없고, ‘차라리 저를 죽여달라.’ ‘더 이상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등의 고백을 할 때도 있잖아요.
그느데 우리는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어떻게든 예배의 자리에 나와요.
왜요?
나를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절대 놓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아브람이 그랬어요.
또 다시 실패했고 F학점을 맞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이 자신과 한 약속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자신은 실패했고 실패 할 것이고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자신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하신 하나님을 포기 할 수 없었어요.
그 분이 자신을 용서해주시길 그리고 다시 관계를 맺어주시기를 13년의 침묵동안 기다렸을거에요.
이스마엘정말로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음을 상기시켜주는 아들이었어요.

침묵의 의미

1절. 아브람의 99세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세요.
아브람의 반응이 어떻죠? 어떤 질문도 불평도 하지 않아요.
3절의 말씀처럼 그저 “엎드릴 뿐”이에요.
두 손 들고 포기한거에요. 인간적인 노력이 불러 온 결과에 대해 두 손 들고 포기하고 엎드리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거든요.
13년만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엘 샤다이”라고 말씀하세요.
“엘”은 고대 근동의 다양안 종교의 신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고 “샤다이”전능하라는 뜻이에요.
“엘 샤다이” 우리 성경으로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지만 그 원래 뜻으로 보면 “나는 하나님이다. 특별히. 모든 능력을 가졌다.”에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엘 샤다이”로 표현하는 첫번째 장면이에요.
압도적이고 언제나 존재하고 선할 수밖에 없으며 모든 능력을 가진 존재
엘 샤다이가 아브람을 저를 그리고 여러분을 찾아오셨어요.
여러분 혹시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꽤 오랜 시간동안 연락이 안되다 연락이 됐다고 생각해봐요.
그럼 우리는 먼저 무엇부터 묻나요? “어떻게 지냈어? 어디서 지내?”라고 묻겠죠?
13년만에 나타나셨어요.
그러면 일반적으로 “아브람아 잘 있었니?”라고 물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정말 쌩뚱맞게 “엘 샤다이!”라고 하면서 나타나셨어요.
엘 샤다이.
압도적이고 언제나 존재하고 선할 수밖에 없으며 모든 능력을 가진 존재
나 여호와 하나님은 너를 떠난 적 없고 늘 너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거에요.
이스마엘을 키우는 13년 동안 하나님을 감히 먼저 찾지 못했던 아브람에게 ‘엘 샤다이 - 나는 늘 너와 함께 하고 있었다.’라는 그 말은 아브람에게 정말 큰 위로로 다가왔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째. “내 앞에서 걷는 삶을 살라”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여행’이에요.
여행이 뭐에요? 걷는 것이죠.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갖고 발걸음을 내딛으며 걸어가는 것.
한 장소에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
그것이 여행이에요.
“내 앞에서 걷는 삶을 살라”는 의미는 “나와 관련하여 걸어라.” “너의 삶에 내가 드러나도록 걸어라.”라고 하시는거에요.
반복해서 꾸준히 올바른 일을 하라.
긴 인생을 살 때 중요한 것반복과 올바른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에요.
중요한 것 꾸준한 올바른 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라”
“그 묵상을 입을 열어 찬양하고, 기도로 감사를 표하라”는 것이에요.
편해 보이고 언제나 할 수 있는 것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좀 불편하고 어색하고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꾸준히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것우리가 꾸준히 해야 하는 올바른 일이라는 것이죠.
둘째. “실수해도 괜찮다.”
완전하다라는 말을 보면 실수 하면 안 될 것 같고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실제로 완전은 완벽하다. 온전하다. 손상이 없다. 고결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절대 완전 해 질 수 없어요. 하나님도 알고 계셔요. 그럼에도 완전하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딱 하나에요.
실패해도 좋고 넘어져도 좋고 나에게 욕을 해도 좋고 다 좋다,
다만 내 앞에만 있어라.
내 앞에만 있다면 내가 그것을 선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바꾸어 주겠다.
의 삶을 반드시 내가 책임질테니 내 앞에만 있으라.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실수해도 좋고 실패해도 괜찮으니, 지금처럼 내 앞에 있으라.”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세요.
실패 후 13년이란 시간을 보내며 자책하고 고민하고 마음이 힘들었을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 잘못했다.”
“이스마엘은 너의 욕심으로 낳은 아들이다.”라고 타박하지 않으셨어요.
특별히 무엇인가를 더 요구하지 않으셨어요.
“지난 13년간 그리했던 것처럼 나와 걷자. 그거면 충분해”
“괜찮아. 잘 해왔고 잘하고 있어”
“그렇게 계속 걷자.”
13년동안 이스마엘을 볼 때마다 복잡한 마음을 가졌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지난 세월 그리 했던 것처럼 걸으라.” 말씀하세요.
아브람도 저도 여러분도 우리 모두는 완전해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에요 .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완벽하지 않지만, 온전하지 않지만 괜찮아.”
“그 모든 발걸음이 결국 너를 나와 함께 하는 완전함으로 이끌거야.”라고 말씀하세요.
저와 여러분의 발걸음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신앙인으로 살아가며 얻는 여러 어려움와 고난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말씀하세요.
그리고 우리에게도 말씀하세요.
“지난 세월 그리했던 것처럼 그렇게 걸어라.”

하나님과 함께 걷기

아브람이 하나님을 만난지 벌써 25년이 지났어요.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아들을 25년동안 기다렸다는 것이죠.
그 동안 수많은 실수와 실패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 시간들은 아브람으로 믿음이 더 단단해지도록 했어요.
그의 단단해진 믿음을 본 하나님은 2절을 통해 ‘너와 나 사이에 나의 언약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세요. 새로운 언약을 추가하겠다! 가 아니라 이미 맺었던 그 언약을 이제 내가 ‘실행하겠다.’라 하시는거에요.
하나님과 아브람의 언약이 뭐었죠? 아이를 낳는 것이었어요.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무수히 많은 자녀들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언약을 다시 확인 시켜 주시면서 아브람과 사래의 인생을 또 한번 바꾸세요.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의 세계관을 확장 시켜주셨어요.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방법으로 인간적인 모든 사고를 찢고 넓히셨어요.
지난주 말씀을 나눌 때 ‘사라가 하갈을 대리모로 선택했던 이유’를 언급 했었는데 혹시 기억하나요?
하나님께서 “사래를 통해 아들을 낳는다.”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폐경기에 접어든 그 여인 사래가 “약속의 아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16절을 통해 말씀하세요.
말이 안되는거에요. 90살에 어떻게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아요. 이건 그 당시 세계관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세계관으로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바꾸세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래로.
그들이 살아왔던 모든 삶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갖고, 지금처럼 하나님과 걸어가되 더 신뢰하며 걸으라는 뜻이에요.
아브람. 높임 받은 아버지. 달의 신이여 높임을 받으소서! 라는 이름을 가졌던 그가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어요.
성경은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때가 참 많은데요.
사람들은 아브람을 부르며, 달의 신을 떠올렸어요.
그런데 이름이 바꼈어요. 사람들이 묻겠죠. 왜 이름을 개명했어요? 아브람에서 왜 아브라함이 되었어요?
아브라함은 자신의 이름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실 모든 약속의 증표”가 바로 내 이름! 이라고 말했을거에요.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요. 그저 25년을 버티며 걸었을 뿐인데 하나님이 그에게 새로운 이름과 삶을 주셨잖아요.
사래. 나의 공주. 한 사람만의 공주라는 이름이 사라. 열국의 어머니가 되었어요.
아브라함은 사래가 90살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기가 막혀서 피식 웃었어요. 하나님은 그 웃음을 보며 ‘그가 웃었다’는 뜻으로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지으라 말씀하세요.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삭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를 때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떠오르게 된거에요.
열국의 아버지. 열국의 어머니 그리고 나의 믿음 없음으로 ‘그가 웃었다’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삭까지.
이 가정은 이제 완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고 떠올리는 가정’이 되어버렸어요.
엘 샤다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세요.
“나는 반드시 이 일들이 일어나도록 할 것이다.”
“절대 의심하지 말라”
“나로부터 아무 말을 듣지 못하거나 삶이 정체된 것 같아 보여도 의심하지 말라”
“나는 반드시 그 일을 할 것이다.”
그것을 믿고 살아갈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 9절이에요. “말씀을 지키는 것”이에요.
“지키라”에덴 동산을 돌보는 책임을 주셨을 때 사용했던 단어에요.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 저와 여러분에게 주셨던 그 약속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키지 않아도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기를 바라셔요.

더욱 깊어지라

99세의 노인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내용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175년을 살았던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침묵의 시간을 답답해하고 속상해하지 말고, 그 것을 묵상의 시간으로 삼으라는 것이에요.
반드시 우리는 묵상해야 해요.
세상이 주는 인식과 세계관을 뛰어 넘을 수 있도록 반드시 우리는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해요.
묵상을 통해 속도를 낮추고 더 깊어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누리는 것처럼, 나의 모든 세계관을 뛰어넘는 것을 누리게 될 거에요.
더욱 깊어지도록 하는 묵상이 우리에게 주는 세가지 유익이 있어요.
첫째, 분별력이 증가해요.
분별력불분명한 것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특성을 말해요.
보통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보게 되는 능력을 말해요.
삶이 분주하고 또 심플하지 않으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치 있게 만들어가는 세밀한 것을 모두 놓치게 되어요.
분별력이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될 뿐이에요.
결국 우리 삶은 의미 없는 경험의 연속이 될 뿐이라는 것이죠. 갑작스럽게 닥치는 삶의 문제 앞에 휩쓸려 갈 뿐이에요.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면서, 삶에 쫓기고 휩쓸리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어떠한 믿음의 이야기도 만들 수 없어요.
둘째,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더더더더 깊게 만들거에요.
분별력을 갖게 되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게 되어요. 수많은 소리 중 정확한 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거든요.
양이라는 동물은 오직 목자의 목소리에만 반응해요.
아무리 목소리를 따라해도, 정말 시끄러운 환경이어도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반응하고 달려와요.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야 해요.
우리를 어지럽히는 수많은 소리들 중 가장 필요한 목소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해요.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불안함은 사라져요.
속력을 늦추기 시작하면 깊이가 생겨요.
그 깊이는 우리에게 오직 나의 유익만을 구하고 주기를 원하시는 분하늘의 주인이고 나의 편이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해 줄거에요.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전능 하신 나의 벗. 친구. 하나님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거에요.
깊어지기만 하면! 우리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깊어지기만 하면!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 있게 될거에요.
마지막, 속도를 늦추세요.
하나님을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
하나님 앞에서 걷는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나의 삶의 통제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이에요.
실수해도 실패해도 넘어져도 원망해도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하겠다는 것을 말하는거에요.
속도를 늦출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하나 있어요. 하나님 앞에 걷도록 해주고, 내가 걷고 있는가를 확인하게 해주는 좋은 방법이 하나 있어요.
바로 말씀과 기도에요.
말씀 읽고 있나요?
읽고 있다면 지금처럼 읽되, 반드시 메모하세요.
묵상하며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다 메모하세요.
그것이 깊어지게 만들어 줄거에요.
말씀 읽지 않고 있어요?
왜 하지 않으세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이해하기도 어렵고 재미가 없으니까?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내가 이제 의지를 갖고 나의 속도를 늦추겠습니다!”라는 표현이에요.
세상의 속도가 아닌 하나님의 속도로 걷고, 오버 페이스를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페이스를 찾겠습니다!”라는 것이에요.
기도하세요?
기도하고 있다면 기도하는 내용들도 정리해두세요.
허공에 뱉어버리지 말고 신실하게 이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적으세요.
기도하지 않으세요?
왜 하지 않으세요? 뭐라 기도해야 할지 몰라서?
기도 장소가 없어서?
오래 기도해야 할 것 같다는 부담감이 있어서?
다 맞아요.
그런데 기도한다는 것단순히 시간과 장소를 찾아 나의 마음을 고백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기도한다는 것은 더욱 깊어지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에요.
이야기를 해야 친해지고 더 많은 마음을 나누며 깊어질 것 아니에요.
기도하지 않으면서 깊어지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불가능해요.
묵상을 통해 분별력을 갖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나의 속도를 찾아가는 은혜가 있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그렇게
하나님 앞에 완전해져 가는 가온누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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