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만한 구름 같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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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여러분들은 어떤 교회를 꿈꾸십니까? 우리 하름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예전에 교회학교의 어떤 아이는 자기가 꿈꾸는 교회는 ‘매주일 마다 피자와 치킨을 시켜 주는 교회’라고 하더군요. 순수하고 귀여운 말이죠?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우리는 각자 꿈꾸는 교회가 다 있습니다.
PPT 미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자 기독교 베스트셀러 작가인 필립얀시가 쓴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필립 얀시가 이 책을 쓴 이유가 있거든요. 그는 자신이 먼저 교회에 실망을 하고 떠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한동안 방황을 하다가 다시 교회로 나오면서 회복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미국 남부 출신에 모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담임목사의 율법적인 설교, 성도들끼리 서로 정죄하고 무거운 예배 분위기 등 견딜 수가 없어서 청년이 된 다음에는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기 전에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이 ‘교회는 나의 고민거리야, 내가 왜 교회를 두고 고민해야 하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결코 혼자서는 신앙이 성장하지도 유지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는 믿음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 위에 세워지는 것임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고 아껴야만 하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책 제목으로 삼았던 것이죠. 교회는 정말 많은 이들의 고민거리이자, 사랑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엘리야와 450명의 바알 제사장들이 갈멜산에서 대결하는 내용으로 시작이 됩니다. 이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이었는데, 그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악한 왕이었고 심지어 왕비인 이세벨은 아합보다도 더 악독한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그러니 왕실이 어땠겠어요? 왕실의 악함이 온 나라에 전염병처럼 퍼져나갔고 이제 북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는 오히려 정상적이고 합당한 행위가 되었습니다. 이제 바알과 아세라가 이들의 하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리모콘 [왕상 16:33]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리모콘-메인 아합은 역대 이스라엘 왕들에게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심히 노하게 만든 왕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엘리야가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뭐, 엘리야가 등장한다고 해서 왕실을 중심으로 한 악행과 우상숭배가 달라지나요? 대세는 바알과 아세라죠. 하나님은 그냥 옛 추억 속의 신이 되어 버렸어요. 심지어 엘리야라는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이거든요. 지금 시대의 하나님은 바알과 아세라인데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는 이름을 가진 낯선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엘리야가 말하는 것이 그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가 대세인 시대에 어떤 말을 합니까? 리모콘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지금 엘리야는 당신들이 능력이 없다고 하는 그 여호와라는 신께서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선포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3년 6개월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리모콘-메인 여러분, 한 나라가 3년이 넘게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았다면 이거 정말 심각한 문제 아닙니까? 이런 엄청난 재난 가운데 왕은 무엇을 걱정해야 하겠어요? 당연히 백성들이죠. 더욱이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이라면, ‘아, 왕인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백성들이 다 죽게 되었구나!’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자, 그런데 아합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열왕기상 18장 5절을 보십시오. 리모콘-본문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지금 아합왕을 사로잡은 생각은, 냇가를 찾아서 물을 얻는 것뿐입니다. 왜 그래요? 말과 노새를 살리려고요. 왕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과 노새가 필요한 거예요. 아합왕은 백성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어요. 오직 관심은 왕 자신뿐입니다. 그만큼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이렇게 3년 6개월이나 지속된 대기근 속에서 아합이 보여준 모습은 왕으로서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는 그냥 걱정만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기도 조금, 걱정 많이 그러고 있는 거예요.)
리모콘-메인 여러분, 만일 내가 3년이 넘게 항암치료하면서 몸이 아파요. 그런데 누가 와서 “그거 금방 안 낫는대” “힘들어도 고생해야지 어떻게 하겠어!” 이러면 아무리 맞는 얘기라도 얼마나 듣기 싫어요? 엘리야가 아합에게 그런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 엘리야가 싫었으면, 18장 17절에 보니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라고 합니다. 아합 입장에서 엘리야는 자신과 백성을 괴롭히는 사람으로 보일 뿐이죠. 백성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기근으로 힘들어 죽겠는데, 엘리야는 문제만 일으키는 문제아일 뿐이에요. 온 백성의 미움의 대상이 되어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던 엘리야가 18장 1절에 아합을 다시 만나러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3년 6개월 만에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됩니다. 리모콘 [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이스라엘 땅에 비를 내리시는 진짜 신은 바알이 아니라, 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제 보여주시겠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리고 18장 16절부터는 그 유명한 갈멜산에서 바알 제사장 450명과의 대결이 펼쳐집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여호와 중에 누가 참 하나님이신지를 공개적으로 대결하자고 한 것이죠.
대결방식은 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놓은 후, 모든 백성이 보는 가운데 어느 신이 불을 내려 그 제단을 사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알의 제사장들이 바알에게 불을 내려 달라고 미친 듯이 소리치며 자해까지 하는데, 바알은 불을 내려 주질 않는 거예요. 바알 제사장들이 완전히 탈진해서 더 이상 간구하지 못할 때, 엘리야가 멋지게 일어서서 하나님께 불을 구합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현장이 어떻게 돼요? 하나님께서 제단 위에 불을 던지셨는데, 이게 얼마나 강렬한지 한순간에 제물과 제단을 살라 버리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그 자리에 모인 이스라엘 모든 이들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고백하고, 바알의 제사장들은 모두 처형이 되고 맙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시작되는 순간이죠.
그리고 바로 이때 엘리야는 큰 빗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 오늘 본문 41절을 보세요.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소리가 있나이다
아니 하늘이 여전히 맑디맑고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는데, 엘리야는 큰비가 내릴 테니 대비하라고 왕에게 말하는 거예요. 엘리야의 귀에만 큰 빗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바알의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했고요.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더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비를 내리시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엘리야는 이제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실 일만 남았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누구도 빗소리를 듣지 못할 때, 엘리야는 큰 빗소리를 듣는 귀가 있더라고요.
제가 아직 이사하기 전이라서, 이전 교회 사택에서 새벽에 차를 몰고 오거든요. 장로님들은 ‘목사님, 새벽에 먼 거리에서 운전하고 오시는 게 피곤하지 않으시냐?’고 걱정이시던데, 여러분 저는 그 새벽에 차를 타고 오는 시간이요. 얼마나 신나는지 몰라요. 새벽인데 그렇게 신이 나요! 차 안에서 찬양을 들으면서 운전하고 오는데요. 제가 비구름을 몰고 가는 기분이에요. (믿어주세요) 그래서 저의 새벽예배는 5시 30분이 아니라, 차에 타는 순간인 새벽 4시 50분부터 시작이에요.
여러분, 저는 꿈이 있습니다. 저처럼 우리 성도님들이 교회에 오시는 게 신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도 빗소리를 듣지 못하는 때에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몰고 올 빗소리를 듣는 성도님들이 되시는 것이 제 꿈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중심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가 너무도 선명해서 세상이 알아보고 놀라는 일들이 벌어지는 꿈, 그런 꿈을 꾸고 있습니다.
단지 젊은 담임목사가 부임해 왔다고 교회가 갑자기 큰 행사를 하고 여신도회원님들 주방에서 일하고 한복 입고 안내하고 이러는 게 제 꿈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변화해서 우리 하름교회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지고 있다는 소문의 진원지가 되는 그런 꿈입니다. 그 빗소리가 여러분의 귀에도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새벽에도 신이 나서 차를 몰고 오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신이 나서 비구름을 몰고 오셨으면 좋겠어요.
자!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 하름교회가 큰비를 몰고 올 구름같은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하름교회 성도님들이 갖추어야 할 집중력은 무엇일지 2가지로 나누어 보길 원하는데요.
그 첫 번째는 실제로 약속이 실현될 때까지 결코 안주하지 않기입니다. [성경책 41절, 42절 합독]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빗소리가 있나이다.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여러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보통 패역한 왕들을 꾸짖을 때 어떻게 하나요? 왕에게 회개하라고 하고, 정신 차리라고, 이 나라가 당신 때문에 망할 것이라 하면서 엄청나게 혼을 내잖아요?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라고 막 그러잖아요? 그런데요. 지금 엘리야가 아합에게 하는 말을 보세요.
“당신들도 저 바알의 제사장들처럼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회개하라”고 하지 않고 그냥 이제 큰 비가 올 테니까 왕께서는 올라가서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는 영적 각성을 요구하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아합은 여전히 먹고 사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은요. 이렇게 엘리야처럼 관심사가 다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올라가서’라는 표현은 아합이 엘리야와 같이 바알의 선지자들을 처형하는 기손 시내에까지 함께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의 처형이 끝나자 엘리야는 아합에게 이제 다시 왕의 장막으로 올라가서 먹고 마시라고 하는 겁니다. 아마도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이 대결을 벌이는 동안 이 아합이요.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지금 누가 진짜 신이냐? 자신의 왕권을 건 대결인데, 밥이 넘어갔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먹고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라고 합니다.
저는 엘리야가 아합에게 한 이 말이 예사롭지 않아요. 지금 이 시기는 가뭄과 기아로 온 나라가 재앙 가운데 있는 시기 아닙니까? 지금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오랜 가뭄의 재앙이 완전히 끝나게 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대결의 승자인 엘리야의 여유를 보세요. 이제 바알의 거짓됨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백성들도 바알이 참 신이 아닌, 여호와가 참 신임을 고백하게 되니까 아합에게 안심하고 이제 가서 음식을 즐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17절)’라고 했는데, 실은 왕과 백성들을 위하는 자임을 드러내는 일이죠.
18장 1절을 보면,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가뭄이 끝나는 3년 6개월 후에 반드시 비가 내릴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었습니다. 비를 내리시지 않던 이유가 조금 전 갈멜산의 대결에서 완전히 제거되었어요. 그 순간 빗소리를 들었다고 하는데 비가 내리지는 않습니다. 약속은 주셨지만, 약속이 실현되지는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빗소리를 들려주셨으면 비도 주셔야 하는데, 정작 현실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지 않아요.
그 순간 엘리야도 왕과 같이 먹고 마시러 갑니까? 42절을 보니까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 오릅니다. 거짓 신을 숭배하다 패배한 왕은 먹고 마시러 장신의 장막에 올라가는데, 엘리야는 엄청난 승리를 한 후에도 비가 내릴 때까지 기도하기 위해 갈멜산으로 오릅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세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이거 안 될 것 같은데요. 야고보서 5장 17절과 18절 [리모콘]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하나님은 분명히 비를 내리겠다고 약속해 주셨어요. 심지어 바알 선지자들 450명을 모두 불로 처단하는 기적을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이 비를 내리실 거라는 걸 엘리야 자신도 알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알고 심지어 아합왕도 알았으니 이제 여유 있게 같이 먹고 마시면 안 되나요?
리모콘-메인 아니 엘리야가 왜 이렇게까지 할까요? 바알 선지자 450명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잖아요? 완전히 해외 토픽감인데, 백성들은 ‘과연 엘리야의 하나님이 진짜 신이시다!’ 하면서 그를 추앙했고 아합도 꼬리를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는 다시 갈멜산으로 올라가서 다시 기도를 시작했을까요?
아직 큰비가 내리지 않았잖아요. 약속은 받았지만, 아직 큰비가 안 왔어요. 그래서 바알선지자 450명을 상대로 그 엄청난 대승을 거두고, 엘리야 자기 이름 그대로 ‘하나님이 여호와이시다’를 증명해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눈앞의 승리에 안주하지 않고 진짜 큰비를 보내주실 때까지 갈멜산 기도의 자리로 다시 올라가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간절히 기도하는 엘리야를 보세요.
여러분, 엘리야는 짐승에게 마시게 할 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3년 넘게 고통당하고 있던 백성들의 영적 갈증을 해갈할 큰비를 기다리며 갈멜산으로 올라가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비가 내릴 때까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 가뭄을 주시면 인간은 힘이 없습니다. 큰비가 오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비를 주실 거라 약속해 주세요.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큰 빗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그 비가 실체가 되게 해달라고 작은 승리에 도취 되지 않고 갈멜산으로 올라가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기도가 쌓였을 때 하늘이 열리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제가 비를 몰고 올 작은 구름 같은 목사가 되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저는 정말 그러고 싶어요. 저는 우리 하름교회에서 아합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질 않길 원합니다. 자신의 왕권을 위해 말과 노새에게 먹일 물만 찾는 그런 사람이 아닌, 백성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영적 가뭄을 해갈해 줄 그런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저만 그러면 안 되잖아요? 저도 엘리야처럼 바알선지자들 450명을 그냥 다 눌러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좋겠어요. ‘성도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처리 할테니 올라가서 먹고 좀 쉬세요.’ 저같이 미숙한 사람은요. 진짜 그런 능력이 있으면 금방 교만해 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담임목사 한 사람의 영적인 탁월함에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담임목사로 부임해 온 이유는, 큰비를 주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함께 꿈을 꾸고, 함께 각자의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자는 거예요. 저는 담임목사로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고요. 장로님들은 교회의 핵심리더로서, 제직 여러분들도 섬김의 자리에서 작은 변화나 은혜에 도취되지 말고 함께 큰비를 주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까지 다시 갈멜산으로 올라 자신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인 수가 늘고, 재정이 여유로워져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는 교회가 되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이 하계동과 노원구 지역의 영적 가뭄을 해갈할 수 있는 위대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공동체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엘리야처럼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큰비가 실제로 내릴 때까지 안주하지 않고 갈멜산으로 올라가서 기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엘리야와 같은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교회가 갖추어야 할 두 번째 영적인 집중력은,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려는 간절한 기대감 갖기입니다. [성경책 43절, 44절]
43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앞서 소개해 드린 필립얀시의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위를 바라봐야 해! 교회 구성원들을 바라보지 마! 인간은 결국 실수투성이의 흙에 불과해 그러니 위를 올려다봐. 하나님이 계신 곳을 똑바로 쳐다보고 그분의 풍성한 뜻을 알 때까지 위를 바라봐야 해. 하나님의 말씀에 흠뻑 젖지 않고는 결코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하니까. 위를 바라봐야 해!”
여러분, 엘리야가 자신의 사환에게 바다 쪽에 구름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폭풍우의 진원지가 바다였기 때문이죠. 사환은 없다고 하자, 엘리야는 또 얼마간 기도한 후에 다시 묻습니다. “구름이 있느냐?” 다시 사환은 없다고 대답합니다. 엘리야는 또 기도한 후에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구름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쯤 되면 사환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온갖 짜증이 다 나는 거죠. 왜 짜증이 나는지 아세요? 사환은 맑은 하늘에 구름이 있을 리가 없다고 단정 지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구름 한 점 없는데 왜 그렇게 구름이 있냐고 물어보시는 거야?’
43절의 “바라보라”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함베트’는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기대감을 갖고 주도면밀하게 집중해서 관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바다 쪽을 바라보라’는 엘리야의 말에는 반드시 큰 비를 주신다는 기대감을 갖고 바다 저편을 잘 관찰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환의 눈에는 비가 내릴 징조가 보이질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는 기도를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큰 빗소리를 분명히 들었고 비가 내리는 것을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기대감을 갖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다면 징조가 보이지 않더라도 직접 큰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기대를 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필립얀시의 말처럼 인간은 실수투성이의 흙과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만, 하나님이 계신 곳을 똑바로 쳐다보며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반드시 갈라진 마른 땅에 강이 흐를 만큼 많은 비를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일곱 번째로 바다 쪽을 바라보던 사환의 눈에 드디어 (손을 보여주며) 손바닥만한 구름 하나가 들어옵니다. 사실 별것도 아닌, 그냥 작은 구름일 뿐이에요. 사환은 깜짝 놀라 엘리야에게 아주 작은 구름이 떠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기도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죠. 하늘이 곧 구름으로 덮이더니 큰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온 땅을 다 적셔버려요. 3년 6개월, 3년 6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아 갈라질 대로 갈라진 그 마른 땅에 강이 흐를 만큼 많은 비가 쏟아져 내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손바닥만한 구름’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껏 닫아 놓으셨던 하늘의 문을 열겠다는 하나님의 징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바로 은혜의 장대비를 내려 주시지 않습니다. 기대하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의 인생과 그런 이들이 속한 교회에 작은 구름을 먼저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왔던 그 일을 우리 가운데 행하시기 위해서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을 먼저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중요한 점은, 여섯 번, 일곱 번을 포기하지 않고 비를 몰고 올 바다 쪽을 기대에 가득 차서 기다리는 사람들, 이 혼탁한 시대에 손바닥만한 구름과 같은 징표가 되어 줄 교회가 되어 주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이런 특별한 꿈을 꾸길 원합니다. 우리 하름교회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채 그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약한 사환들이 모인 교회가 아니라, 그런 약한 교회들이 우리 하름교회를 보면서 ‘큰비를 몰고 온 손바닥만한 구름’같은 교회 같다는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이 노원구 지역에 많은 교회들이 우리 하름교회를 보면서 부러워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하름교회를 통해 저렇게 큰일을 하신다면, 우리 교회에도 분명 그런 일이 있을 거야” “우리도 하름교회처럼 이 땅을 품은 하늘공동체로서 비를 몰고 올 작은 구름을 기대해 보자” 이러면서 부러워했으면 좋겠습니다.
글쎄요. 저는 그것은 좀 욕심이 나는데요. 저는 이 역할이 다른 교회로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큰비를 몰고 올 손바닥만한 구름’같은 교회가 되는 것이 저의 꿈이고 우리 성도님들의 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다른 것은 욕심을 내지 않겠지만, 이 일에는 욕심을 내고 제가 담임목사로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욕심. 비가 내리지 않는 하늘 곳곳에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손바닥만한 구름’을 이곳 서울시 노원구 노원로 11길 17번지 하름교회 바로 이 자리에서 보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작은 변화나 은혜에 도취되거나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징표가 실제로 실현될 때까지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 작은 구름을 보기 전까지 간절한 기대감으로 이 영적 대기근의 시대에 큰비를 몰고 올 구름과 같은 교회! 바로 우리 하름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