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찬양한 드보라

킹덤스토리 44과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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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을 찬양한 드보라
말씀 : 삿 4:4-10절
찬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찬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오늘은 ‘하나님을 찬양한 드보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오후시간에도 함께하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한주를 잘 보내고 계십니까? 저도 저녁마다 다니엘 기도회를 통하여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저랑 수요기도회를 하지 못하다 보니, 이 오후예배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저와 함께 살펴보던 여호수아 말씀이 끝이 나고 이제 사사기 말씀에 들어섰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가나안 땅, 그 땅을 어떻게 정복하였는지, 또 그 땅을 지파에게 어떻게 분배하였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점령하며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경험했었습니다. 생각나는 사건 있으세요? 가나안 땅에 들어설 때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을 앞서가자, 요단강이 멈춰섰던 사건, 들어가서 여리고 성을 점령한 사건, 그들은 싸우지 않고 말씀대로 성을 돌아 성이 함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북부 연합군이, 하나님이 내리신 우박에 맞아 죽고요, 여호수아가 해가 멈추기를 구하자 해를 멈추는 것을 보며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승리 뒤에 땅들을 분배받았지요.
여호수아는 그의 할 일을 마치고 마지막 세겜 땅에서 12지파를 불러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제 우리들을 이 땅에 살아가게 될 것인데, 너희들이 우상신이 좋아보이면 그것을 섬기고,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좋아보이거든, 하나님만을 섬겨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 너희들도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며 그의 말씀을 따라 살으라며 유언성격의 설교를 하며, 여호수아서는 마치게 됩니다.
이제 여호수아서 뒤에 있는 사사기 말씀은,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며 살아가는 왕정시대 전까지의 초기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사기라는 제목은, 그 제목의 모습처럼 이 시기가 사사라는 직분을 통하여 통치받는 시대임을 보여줍니다.
사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사라는 말이 애매하긴 한데, 이 원뜻은 영어로는 judge(졋지) 원어로는 ‘샤파트’ 재판관을 의미합니다. 사사들은 이스라엘을 외부로부터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는 일을 주로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평소에 하는 일은, 재판과 송사에서 백성들에게 공정한 재판과 판결을 해주는 재판관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죠.
어쨋건 사사기의 책안에는 총 12명의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사사기에서는 주로 사사가 뭘로 등장해요? 구원자로 등장합니다. 외세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등장합니다. 여러분 왜 백성들이 구원이 필요로 했을까요? 그들이 왜 핍박과 고난을 겪어야 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여호수아의 유언처럼,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야 했는데, 가나안 땅에 정착하자마자 실패하고 맙니다. 사사기의 패턴은 이와 같습니다. 먼저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쫓아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십니다. 주된 방법은 주위 이방 나라들을 일으키셔서 백성을 징계합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힘이 들어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주셔서 그들을 구원케 하십니다. 또 평안하게 되면 뭐해요? 범죄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징계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사사를 보내 구원하고 이 패턴이 12명의 사사동안 계속적으로 반복되어 지는거에요.
사사기에 우리가 잘 아는 대표하는 구절 있죠,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하는데, 무엇을 따라 살아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쉽게 말하면 “내 좋은대로”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것을 따라” 살아갔던 것이죠.
이 백성들의 영적 모습은 약 3000년전 사사시대뿐 아니라, 지금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정해진 길이라면 질색합니다. 진리가 있다면 독선으로 치부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사는 자유를 추구합니다. 또 좋아보이는 것처럼 각자의 삶의 취향과 패턴을 존중합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무엇을 위해 살던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죠. 그것이 쾌락이든, 세상의 성공이든, 돈이든, 외모든, 풍요로운 삶이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니는 니 갈길 가라, 나는 내 갈길 간다. 참견하지 말라. 하는 것이 요즘 보여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사는 시대인 것이죠.
이런 사사시대 같은 현재의 우리의 삶에 과연 소망이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실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길 원합니다. 오늘 사사기 4장에 등장한 사사는 바로 ‘드보라’라는 사사입니다. 영적으로 암흑과 같은 그 시대 가운데 사사 ‘드보라’가 세워졌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떠한 상황입니까? 아까 그 패턴 가운데, 또 범죄한 거에요.
4장 1-3절 말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4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드보라 전 사사였던 에훗이 죽자마자 뭐했다고요? 또 백성들이 범죄하며 악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백성들을 파셨습니다. 그는 다른 압제자들과 다르게 약 20년간 이스라엘 자손을 더욱 심히 학대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기고만장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3절에 보면 그는 뭘 가지고 있습니까? 철 병거 900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최신식 탱크 900대를 가지고 있는겁니다. 이런 강력한 군대를 가진 야빈이 이스라엘을 심히 압제하고 있는거에요. 누가봐도 절망적인 상황아닙니까?
이런 상황 가운데 놀랍게도 4장에는 12명의 사사 중 유일한 여자 사사인 드보라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사사들이 뭘 했냐면, 직접 지휘관이 돼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왕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철병거 900대를 가지고 있는 야빈 때에, 누가 세워집니까? 여자 사사 ‘드보라’가 세워집니다. 재미있게도 4장 5장에서의 진정한 주인공은 여인 2명입니다. 한명은 사사 드보라, 한명은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죽인 ‘야엘’이라는 여인입니다.
이 내용은 여자 사사 드보라가 세워진 후, 드보라는 ‘바락’이라는 사람을 이스라엘 군대 장관으로 세워 군대를 조직합니다. 그 때에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지파 사람들이 주축을 이뤄 만명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기손강에서 야빈의 군대와 전투를 치루게 되는데, 야빈의 철병거 900대를 끌고온 군대장관 시스라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패배하게 됩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시스라가 도망치는데, 도망치다가 헤벨의 집에 거하게 됩니다. 헤벨은 야빈 왕과 친한 사람이어서 안심하고 시스라가 그 집에서 쉬게 되는데, 그때 헤벨의 아내였던 야엘이 시스라를 맞이합니다. 따뜻한 우유도 주고 그를 자게 해주고 나서, 야엘이 손에 말뚝을 가지고 시스라의 관자놀이를 쳐서 완전히 야빈의 군대가 패배하게 됩니다.
이 사사기 본문은 교회 역사상 끊임없이 논쟁되어져 온 ‘여성 사역’의 주제가 관련이 있는 본문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이해할 때 두 가지의 극단적 해석을 피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이 드보라 시대 때에, 하도 신실하고 믿음의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라 할지라도, 드보라가 세워졌다는 해석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 지휘관으로 등장하는 ‘바락’이 사사의 일을 회피 했기 때문에, 드보라가 세워졌다, 이런 해석을 합당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런 언급도 없을뿐더러, 4절에 오히려 그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여선지자였으며, 사사로 명확하게 부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의 극단적인 해석은 이 본문을 근거로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여자도 할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아니 성경에 여자도 선지자도 하고 사사도 했는데 왜 목사나 장로는 하지 못합니까? 질문하는 사람들이있습니다. 이 본문을 근거로 이런 논리를 이어가는 해석입니다. 사사기 4장에서 드보라는 사사였지만, 그녀는 용사가 아니었으므로, 이 일을 누구와 함께 행합니까? 바로 ‘바락’이라는 인물을 불러 함께 동역합니다. 더 나아가 구약의 중요한 직분은 바로 제사장, 선지자, 리더 예를 들어 왕이나 사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공식적으로 하지 못하는 직분은 딱 하나 있어요. 뭘까요? 바로 ‘제사장’입니다. 레위기 21장에 보면, 모든 제사장은 공식적으로 아론의 후손인 남자가 하게 됨을 율법으로 규정합니다.
구약은 여자에게 동등한 가치, 존엄성,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이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주권도 주셨습니다. 또한 제사장 외의 어떤 역할에서든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자유롭게 사역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평등하게 존엄하게 지으셨지만, 획일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신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이 사도행전에 보면 선지자로도 등장하구요, 오히려 여자들이 더욱 중요한 자리에서 충성되게 사역함을 보여주는 말씀들이 허다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 역시 여성들이였으며, 수많은 서신서에서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교회의 중요한 부분을 감당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에 직분에 대해 한 가지 역할을 제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로’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장로의 자격에 대해 말하면서, “한 아내의 남편”이 될 것이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남성이나 여성 할 것 없이 모든 역할을 은사에 따라 자유롭게 사역하며 섬길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남자를 위해 마련하신 역할은 제외합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제사장이고, 신약에서는 장로와 한 가정의 대표성입니다. 장로는 구체적으로 종교개혁 전통에서는 치리하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를 구분합니다. 쉽게 흔히 말하는 장로와 목사이죠.
요즘 우리나라에 젊은 사람들 가운데 남녀간의 갈등의 문제가 심각해요. 정말로 심각합니다. 10대, 20대 30대 할 것 없이 정말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남성들과 동일하다고, 지금껏 피해를 받아왔으니, 보상을 해달라.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은 요구들을 서스럼없이 합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 10대에서 30대 들이 무슨 피해를 봤겠습니까? 봤으면 얼마나 봤겠습니까? 오히려 여성이여서 덕본 세대들이죠. 여기 앉아계신 성도님들 시대쯤 되야 이런 말을 할 정도 되지 않겠습니까? 남성들은요 뭐라고 말할까요? 우리가 남자이기 때문에 배려한 것들 이제 더이상 하지 않으려 합니다. 서로 간의 갈등이 심해지는 거에요.
성경은 남녀의 차별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 문화와 시대를 거스른 하나님 안에서 한 몸이 룬 교회의 지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고백하지요. 그럼에도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하나님은 아시고 적절한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여러분 남자와 여자가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저희 집에 둘째 아들 유찬이를 키우고 있는데, 그냥 신생아때부터 유은이와 달라요. 똑같은건 생김새만 똑같지 다 다릅니다. 울음소리부터 달라요. 저는 아기가 그렇게 크게 우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는 태생부터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은 누가 낫고 덜 낫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동등하되 다르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우린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자의 가치가 덜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존엄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진 것에 있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냐, 어떤 직무를 감당하냐에 따라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대통령이, 백수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 것이죠.
오늘 사사기 4장 5장에서는 그 강력한 왕이었던 야빈의 군대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주역들은 바로 사사였던 ‘드보라’와 결정적으로 도망치고 있던,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죽인 ‘야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어두웠던 사사시대에, 고통 받는 이스라엘을 가장 강력한 왕이었던 야빈의 손에서 이 여인들로 하여금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헌신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것이죠.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은 성별에 관계없이, 인간적 조건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이루십니다.
저번주에 선교축제로 선교사님들을 모시고, 함께 예배했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마음이 드셨습니까? 아직도 세계 열방에, 곳곳에서 하나님의 일들이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일어남을 깨닫지 않으셨습니까? 선교사님들이 뭐 어떠한 놀라운만한 능력이 있어서 그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헌신,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먼저 경험한 그 마음, 한 영혼과 주님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마음 그것들로 인하여 그 머나먼 나라에서 주님의 복음과 사랑을 전하여 고통 가운데 있는 한 영혼을 품고 살아가고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들을 통해 자신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건강을 가졌든지 못가졌든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다니엘 기도회 참석하고 계시죠? 그분들의 간증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연약함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함 아닙니까? 오히려 그분들의 약점은, 연약함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 가운데, 한 영혼,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며 주님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모든 성도님들의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살펴볼 부분은 바로 5장에 등장하는 드보라와 바락의 찬양의 내용 부분입니다. 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들을 통하여 구원하신 일을 찬양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이 노래를 통하여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14절부터 18절 내용인데요. 그 내용에 보면, 드보라는 야빈과의 전쟁을 앞두고 여러 지파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에게 큰 어려움이 없는 지파들은 이 전쟁에 참여했을까요? 안했을까요? 안한 것이죠. 이제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 된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 지파만 중시하는 지파 공동체로 바뀌어가고 있던 것이죠. 요단 동편에 있었던 르우벤 지파는 전쟁 참여를 마치 남의 일처럼 여겼습니다. 목동의 피리를 부르며 일상생활을 계속했구요, 아셀 지파는 자신들의 해상 무역에만 치중합니다. 유다와 시므온 지파는 아예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모습들은 죄인들의 습성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특성은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일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공동체와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죄의 항목가운데 말하고 있는 무정과 자기사랑의 모습인 것이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땅히 전쟁에 참여하고 도와야 했음에도, 자신들이 평안하니 그저 남의 일로 여기며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세상의 물결이 교회 가운데에도 들어와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개교회 중심이 되어지고, 철저하게 자신의 교회만 생각합니다. 성도 개인으로 보면 자신이 교회의 세례 받은 한 일원이자 지체임에도, 멀리서 관망합니다. 자신의 지체의 역할을 하지 않아 다른 지체에게 짐을 더 지우는 것이죠. 적극적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봉사에 참여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더 나아가 성도는 이 땅의 아픔을 품고 통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저번주에 일어난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10월 29일 토요일 밤에 이런 사고가 일어났는데, 제가 그 주간 목,금을 발반사 이사회사 서울에서 있어 목사님 대신 다녀왔거든요, 그때 마침 아버지가 서울에 병원에 올 일이 있으셔서 한강에 여러 다리 중 한 곳 근처를 저녁에 산책하는데 와 정말로 광주에서 볼 수 없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거리에서 보았습니다. 이렇게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다녀온 후 그 다음 날 이태원에서 그런 일이 생긴 겁니다.
무려 지금까지 156명의 사망자가 확인되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숫자지요. 그런데 이 사고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피해자는 있는데, 명확한 가해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언론에 보면 이 책임을 누군가에게 지우기 위해 압수수색을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하겠죠. 중요한 것은 이 자리에서 죽은 156명의 사망자 중 90퍼센트 이상이 10대에서 30대입니다.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그 거리에서 비명횡사를 한 것이죠. 이 가해자가 없는 어이없는 참사에 대해 우리는 가슴을 찢고 통회해야 합니다. 왜 그들이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그 거리에서 끔찍한 참사의 희생양이 되었는지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그 피해자들의 가해자들이 우리 일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운이 좋았다 싶을 뿐이지, 그 현장에 내 자녀가 있었을 수도 있고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그곳에 서 있었을지도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참사를 영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얼마든지, 내가 정성스럽게 내가 못했던 먹을거 걱정안하고 풍족하게 나름대로 좋은 길로 인도해 키운 내 자녀가, 끔찍한 죄악의 구렁텅이에, 고통의 현장에 피해자로 혹은 가해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구약에 나온 느헤미야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바벨론 땅에 술맡은 관원장으로 궁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었습니다. 별 걱정 없이 살아갔어요. 그런데 소식이 들려오죠. 자신의 형제들이 유대땅에서 큰 환난과 능욕을 받고 있다. 그 땅에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들이 불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럴 때 그는 어떠합니까?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깐 괜찮아” 한 것이 아니라,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기도합니까?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범죄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나와 내 집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습니다”라며 자신의 가슴을 찢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여러분 그 일이 느헤미야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 앞에 신실한 성도의 모습은 이러한 것이죠. 특정 가해자가 없는 우리의 다음 세대의 끔찍한 참사가 우리의 죄악 때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복입니까? 저는 오늘날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경험한 가난, 먹을 것이 없어 서러웠던 것 내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풍족하게 키운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복입니까? 우리는 이 참사를 보며 우리의 가슴을 찢어야 합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갈바를 알지 못하고 헤메이는 길거리의 청춘들이 내 자녀들 우리의 다음세대입니다. 교회에 주일학교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을 떠나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이 아니고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여러분 이 모습은 나라에 일어나고 있는 적신호 중 아주 일부입니다. 모든 부분에 있어서 이 나라가 말도 안되는 상황입니다. 정치, 경제, 세계의 상황들 북한의 위협, 조금만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지금 이 나라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 이 나라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내가 주님 앞에 범죄하였습니다. 내가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여 이러한 일들이 생김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나님 내가, 우리 가정이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된 자로 서길 결단합니다. 우릴 사용하여주시고, 다시금 주의 말씀으로 돌아가, 주님께서 맡기신 한 영혼,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스라엘이 드보라와 헌신된 지파를 통하여 구원 얻었던 것처럼, 우리 교회를 사용하여 주시고, 우리 가정을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우리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이 땅에 일어난 참사, 유족들 위로하여 주시고, 우리의 다음 세대를 세워 주시옵소서, 이 모든 모습들이 우리의 죄악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 나라가 실로 어렵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마음을 찢어 통회하게 하시고 다시금 주의 말씀으로 돌아가, 주님께서 맡기신 한 영혼,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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