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08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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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393 오 신실하신 주
본문 : 예레미야애가 3:18-26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땅을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했던 힘겨운 순간들이 찾아오고, 이 일만큼은 일어나지 않길 바랬던 낙심할만한 순간들이 우리에게 찾아오며, 답답하고 억울하며, 괴롭고 곤고한 때를 마주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당장 눈 앞에 닥친 현실만을 바라보며 낙담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신실하신 아버지를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둘러싼 변화무쌍한 현실 속에서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배워서 알기는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들을 통해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 지나온 흔적들을 하나하나 돌이켜보면 못마땅한 것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올 한해만 돌아보더라도 이런 일은 내 인생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내 인생 가운데 일어나게 하실수 있는가.
예레미야애가의 배경은 이렇다.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읍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여기 있겠다 말씀하신 곳이다.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사는 곳이다. 거기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 성전은 처참하게 불에 탔고, 다 무너져내렸고 약탈당했으며, 성전안에 있던 거룩한 모든 용기들이 전리품으로 탈취당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를 보면서 울며 예레미야애가를 쓴다. 여기에는 예레미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깊은 고통과 고뇌, 시온의 멸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그러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그가 도리어 희망을 발견하는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깊은 슬픔과 탄식 중에도 그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아주 놀라운 이야기이다.
우리의 인생이 바람을 타고 순항을 시작하며 인생의 절정을 향하여 올라갈 때 우리는 즐거워하고 노래하며 기뻐한다. 하지만 뭔가 좌절이 되고 인생이 좌초되며, 거대한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는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승승장구할 때만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의 인생이 깊은 계곡 속으로 들어갈때도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죽은 사건이다. 그들은 그만큼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고, 약탈되고, 불타버리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던 것이다.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자기들이 볼 때 하나님은 살아계시니까, 여기까진 허락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 군대가 들어와서 피비린내 나는 살륙이 벌어졌다. 고대 전쟁을 보면 성문을 열었을때 살육당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포위된 상태에서 1년 반 동안 버텼다. 물이 끊기고 음식이 끊겼음에도 1년 반이나 버텼지만 결국 함락이 되었다.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군대는 결국 버티다가 함락된 성을 가만히 놔둘리 없다. 본보기를 보이듯 예루살렘성을 짓밟아 버린다. 멸망하기 이전 남유다 요시야 왕은 경건한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애굽과 바벨론의 전투에 합류했다가 죽었다. 그리고 그 아들들이 이어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이후로 22년 남짓의 이 시기는 남유다의 가장 불경건한 시대였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셨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거짓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말에 위로를 얻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무엇인가? 예루살렘 멸망이 현실로 다가오기 직전까지 거짓선지자들은 끊임없이 “평강하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라고 선포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하나님이 너희를 지키시지 않겠어?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이방인들이 이 땅에 발을 붙이도록 허락하시겠어?”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담담히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한다. 렘 7:3-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이것이 더이상 성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니까, 너희에게 하나님이란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 하나님이 너희 삶에 아무 의미없는 존재니까. 예레미야는 이런 메세지를 전했기에 수없이 맞아야 했고 감금당해야 했고 고난받아야 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은 동일하게 이루어진다. 어느시대나 그랬다. 어느 때나 거짓교사와 거짓선지자들이 많았다. 결국 성전은 파괴되었고 약탈당한다. 예레미야가 전했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다. 유다백성들에게 성전의 파괴와 잔혹한 학살은 믿을 수가 없던 일이다.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뿌리채 뽑힌 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 해봐야 껍데기 뿐이었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 떨며 받았던 자는 아무도 없다. 그저 듣고 싶었던 말씀만 들었을 뿐.
예레미야애가는 선지자의 탄식과 눈물과 한숨이 가득하다. 본문 애3:19-20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쑥과 담즙. 그 쓴물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고백하지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애3: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낙심이 되고 쑥과 담즙이 내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데, 이것이 나에게 오히려 소망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짧은 문맥에서 무엇이 쑥과 담즙을 소망으로 만들었을까? 무엇이 낙심을 소망으로 만들었을까?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지금 예레미야는 두개의 렌즈로 바라보고 있다. 하나는 자기가 처한 상황이다.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봤다. 그 성전이 훼파되는 것을 보았다. 유다 백성들이 피비린내 나는 살륙 당하는 것을 보았다. 내 눈앞에서 펼쳐진 상황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렌즈를 통해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그 렌즈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렇다. 언제나 2개를 보아야 한다. 내 눈 앞에서 펼쳐지는 사실. 너무나도 비참하고 괴로운 현실. 숨쉬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답답하고 한숨만 나오는 현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는 신자에게는 언제나 믿음의 렌즈로 봐야 하는 하나님도 계시다는 것이다. 선지자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데 애3:22-23 를 보니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주의 성실하심에 대해 말한다. 이는 구약에서 말씀하시는 대표적인 하나님의 성품들이다. 인자와 긍휼과 성실.
선지자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그토록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소망을 품는 그 이유는 그 고초와 재난 속에서, 쑥과 담즙이 나오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선지자는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가 하나님께 크게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쌓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 판단한다면 지금 눈 앞에 일어나는 일보다 더 크고 처참하며 비참한 심판이 일어났어야 마땅한데,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모두 진멸당해야 마땅한데, 그런데 애통하고 슬퍼하면서도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선지자는 자신들이 아예 진멸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진노 중에도 자비를 보이시는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바라보고 경험하는 눈 앞의 상황이라는 렌즈로만 세상을 바라본다면 어떠할까?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들은 매우 변화무쌍하기에 이러한 환경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은 때로 선하시기도 하지만 악하시기도 한 하나님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선지자는 영원토록 불변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자신의 변화무쌍한 상황을 바라본다. 그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주의 성실을 통해 자기 상황을 다시 해석하기 시작한다. 본문 24-26절을 보라. 여기서 선지자는 ‘바라리라, 기다리는, 구하는, 바라고, 기다림' 이라는 비슷한 단어를 반복하여 나열한다. 강조하는 것이다. 이 동사들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이 내 기업이라 말한다. 유산, 내게 떨어지는 몫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여러분에게 1000억의 유산이 상속된다 한다면 여러분은 다른 곳에 한눈 팔 수 있는가? 더욱 나에게 주어질 그 유산을 바라보고 구할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유산이 되신다고 말하는 자에게는 한 가지 고백이 있다. 바로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라는 고백이다. 이것이 선지자가 그토록 참담한 형편 속에서도 놓치지 않았던 고백이다. 우리는 쉽게 상황이 무너지면, 고난이 찾아오면 이 고백을 쉽게 놓치고 만다. 상황이란 안경으로 하나님을 보고 싶은 유혹 때문이다. 상황이 흔들리고, 터가 무너져도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고 그분은 무너지지 않으시기에 내 소망은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는 선지자는, 그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고백한다.
여러분, 선지자의 고백을 생각해보라. 애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오늘도 우리가 함께 찬송했지만 찬393장 ‘오 신실하신 주’는 미국의 토마스 치솜 이라는 목사님이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감동을 받아 시를 쓴 가사이다. 이 찬송가의 후렴은 이렇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그런데 본래의 시는 이렇다. “매일 아침마다 나는 새로운 인자하심을 봅니다" 라는 뜻이다. 예레미야의 고백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무엇이 새로운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과 성실 말이다.
성도 여러분, 어쩌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오늘도,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런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도 그래왔듯, 우리에게 다가올 시간들도 여전히 변화무쌍할 것이고, 언제든 크고 낙심할만한 위기의 순간들이 또 찾아오게 될런지 모르겠다. 이 일만큼은 나에게 안일어났으면 하는 일들이 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과 환경은 여전히 그럴지라도 우리가 현실을 바로 바라보는 렌즈와 더불어, 그 변화무쌍한 현실속에서도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렌즈로 현실을 바라본다면, 우리도 선지자와 같이 고백하면서 새로운 아침을 맞을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의 상황이 너무 힘들어도, 하나님을 구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우리는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지 않겠나?
오늘 하루가 시작되는 이 새벽의 시간에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자.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고 그 성실하심이 크신 우리 하늘 아버지께 이러한 은혜를 구하자. “주님, 제가 매일 아침마다 주님의 새로운 인자하심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변치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의 렌즈로 우리의 상황들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상황이 어떠하든지, 변함없으시고 인자와 긍휼이 무한하시며 성실하신 그 하나님을 확고히 붙들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선지자와 같이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기업이 되심을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