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과 승리

다니엘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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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풀무불에 던져지다 2. 멀쩡히 나오다 3.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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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는 시날 땅에 세워진 그 신상에 절하지 않아 잡혀온 세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지금 굉장히 진지한 상태였습니다. 그기 지금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 친구가 자신에게 당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을 닮은 신상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어요.
“너희가 이렇게 잘먹고 잘 살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아냐? 나 때문이야.”
“내가 있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사는거다.”
“바벨론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감사해라.”
자의식 과잉이라 말할 정도로 느부갓네살은 신상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지금 포로로 끌려 온, 자신에게 발탁이 되어 공부도 하고 한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는 이 세 사람이 너무 당당해요.
자신에게 밉보이면 큰 일 나는 것을 잘 아는 세 사람이 너무 당당하게 서서 “절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세 친구가 잘 먹고 잘 살고 또 그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느부갓네살 때문입니니다. 당연히 엎드려야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반드시 이 세 사람이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한다 생각을 했고, 그 고마움의 표현이 엎드리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엎드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느부갓네살의 업적을 인정하고 그를 존중한다는 것이죠.
모든 사람들이 느부갓네살 신상 앞에 엎드려요. 세상이 보여주는 강함에 엎드렸어요. 세상에 엎드리는 그 행위는 우상숭배와도 같습니다.
그들의 엎드림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고 있었던 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상숭배는 다른게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마음과 사랑을 쏟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죠.
우상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합니다.
모든 시대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떠나고 잊고 우상을 따른 이유가 뭐겠어요. 그만큼 우상이 매력이 있기 때문이죠.
모두가 그것을 사랑하고 따라가게 되는 것에는 매력적이고 우리를 유혹할만큼 매혹적이라는 것이죠.
세상은. 우상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는 존채처럼 다가와요.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우상들은 사람이 자신의 필요를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나에게 뭔가 줄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이거든요.
신상 앞에 엎드렸던 이들의 모습은 우상숭배자의 모습이에요.
그리고 어쩌면 저도 여러분도 하나님을 믿으나, 삶에 작은 부분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 세 친구는 모두가 우상 앞에 절하고 있는데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냥 서 있다가 잡혀왔어요.
솔직히 눈 딱 한번 감고 절하면 끝이에요. 지금의 이 편안한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어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사실 신상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그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내가 사는 나라의 대통령. 나에게 명령을 하고 또 월급을 주고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 앞에 고개 한번 숙인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그 대통령이 있으니까, 식민지 백성인 내가 좋은 직업도 갖고,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 수 있는 것이잖아요.
양심에 찔리겠지만, 그냥 우상숭배가 아니다 생각하면서, 내 상사 앞에 머리를 숙인다 생각하면 되는 일이에요.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거에요.
솔직히 그렇잖아요. 누가 알아요. 그냥 한번 쓱 고개 숙여버리면 끝나는 일이잖아요.
하나님을 믿으면서 잘 버티고 살아 오기는 했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보기도 전에 먼저 그들이 죽을 수도 있었어요. 언제 그 일하심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 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절하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그 왕의 명령에서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거의 100%에요.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것을 절대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과 삶이에요.
그런데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어요.
구해주지 않으셔도 괜찮다. 절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상에 숭배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마음으로 버텼어요.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았지만, 안전장치도 없지만 그들은 절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을 선택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바로 끌려 왕 앞에 갔어요. 그리고 왕이 물어요.
“세상에 어떤 신이 내 손에서 너희를 구해줄 수 있을까?”
왕은 지금 자신있어요.
바벨론 왕을 방해할만큼 강한 신이 없다는 오만함이 그에게 깔려 있어요.
세상의 신들이 와도 바벨론 왕 자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는 엄청난 자신감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죠.
세 친구들은 풀무불에 던져졌어요.

세 친구의 이야기가 전하는 것

풀무불에 들어간 세 친구의 이야기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세 친구가 들어간 그 곳은 기존의 풀무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뜨거움이 있는 곳이었어요. 그들은 붙들고 있던 사람들이 죽을만큼 말도 안되는 뜨거운 불이었어요.
그런 불 속에 그들이 살아나왔어요. 그들과 함께 하는 한 존재가 그 안에 있었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그 안에서 살아 나오게 될 것을 절대 알지 못했어요.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죽기로 했을 뿐이에요.
자신들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불 때문에 죽는데 자신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그 모습을 보며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풀무불 속에 던져 졌는데 다치지 않고 뜨거움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전혀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말도 안되는 기적이 그들에게 일어났어요.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무릎 꿇지 않은 세 친구를 통해 반드시 알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결단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들과 같은 믿음의 선포가 필요하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어요.
유대인인 그들이 바벨론에서 살아가며, 바벨론사람 처럼 살아가는 것이 너무 지겨워서 질려서 지쳐서 포기하고 싶어서 차라리 죽여라! 이렇게 죽으면 순교다! 라는 생각에 절하지 않고 버틴 것이 아니에요.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이 살고 죽는 것은 의미가 없었어요.
곧 죽어도, 그들에겐 하나님이 전부였던거에요.
그 신상을 세운 느부갓네살에게도 하나님이 전부였던 때가 있었어요.
다니엘 2장 47절을 보면요. 그가 모든 대신들 앞에서 “하나님은 모든 신들의 신이며, 모든 왕의 주재이다!”라고 이야기 했어요.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한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을 믿을 것처럼 행동했어요.
하지만 변화되지 않았어요. 그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었어요.
그가 정말 하나님을 인정했다면, 그런 신상을 세우지 않았을거에요.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곧 잊었어요. 느부갓네살 뿐만 아니라 모든 대신들도 사람들도 하나님을 잊었어요.
심지어 엎드려 무릎을 꿇은 사람 중에는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도 있었어요.
그들은 우상 앞에 엎드리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어요.
왜? 세상의 분위기가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세친구는 세상의 분위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절하지 않았어요.
그들에게는 분명한 선이 있었거든요.
어렸을 때 채소를 먹으며 지켰던 그 선보다 더 크고 강해지고 분명해진 선.
“나는 OOO에 절하지 않겠다!”라는 확실한 선포의 선이 있었던 것이죠.
저는 이 선포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한 선포라 생각해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 우선’의 우상 숭배를 거부하는 것이에요.
우상 숭배를 거부하려면 또렷한 시각을 가져야 해요.
또렷한 시각은 말씀을 읽을 때 가질 수 있어요.
말씀이 우리의 무기가 되어야 해요.
말씀을 읽어야,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명확하게 알아야!!!
나의 마음이 끌리는 우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있어요.
말씀을 읽지 않는다면 우린 “나는 OOO에 절하지 않겠다!”라는 선포와 결단도 할 수 없고, 나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그 우상의 존재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없어요.
진정한 믿음은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더라도, 세 친구처럼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치러야 할 대가가 보여도, 내가 손해보는 것이 확정이라해도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순종하는 것이에요.
“나는 OOO에게 절하지 않겠다!”
세 친구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전부가 되는 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이 새벽의 시간 우리의 믿음의 선포와 결단이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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