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시작, 평강 엔딩(몬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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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11월 6일 주일 청년부
제목 : 은혜 시작, 평강 엔딩
본문 : 빌레몬서 1장 1-3절 *신351
결단찬양 : 은혜
[도입]
고급 레스토랑을 가면 모든 음식을 하나 하나 설명해주며,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인지, 또 어떻게 먹을 때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경험이 없어서..)
사실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어도 제주도의 흑돼지집만 가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뭘 찍어 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또는 이번에는 이걸 찍어 드셔보시겠어요? 라고 권하며 더 맛있는 음식을, 또 손님에 맞춰 음식을 준비합니다.
가게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그만큼 그 음식에 자부심이 있고, 또 자신이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손님 입장에서도 내용을 알 때 정말 더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받을 수 있으니 기분도 좋습니다.
오늘부터 함께 나눠갈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의 그 유명한 옥중서신 중 하나입니다. 굳이 빌레몬서가 아니고,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등 더 유명하고 잘 알려진 옥중서신이 있는데, 왜 하필 빌레몬서를 가져왔는가?
[Chapter 1. 빌레몬서의 특징]
아주 작은 서신이지만, 이 서신 안에 담겨진 복음과 은혜가 너무 크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나누었으면 하여 빌레몬서를 택했습니다.
이 빌레몬서를 우리도 맛있게 먹으려면, 이 빌레몬서가 어떤 특징들이 있는지 또 알아야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빌레몬서의 개관과 또 1절부터 3절까지가 담아내고 있는 은혜를 나누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빌레몬서의 특징 : 1. 옥중서신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옥중서신이라는 것일겁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작성한 서신이라는 것이지요.
빌레몬서의 특징 : 2. 333개의 헬라어 단어로 구성
그 다음으로 볼 특징은, 요한2서, 요한3서를 제외하곤 가장 짧습니다. 빌레몬서는 333개의 헬라어 단어로 이루어져 있을만큼 정말 짧습니다.
빌레몬서의 특징 : 3. 지극히 개인적인 서신
그리고 마지막 특징으로는 지극히 개인적인 서신입니다. 보통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교회를 향해 작성하여,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 가야 하는지.’ 또는 ‘교회를 이끌어가는 너희들이 앞으로 어떻게 이들을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지.’를 담아내곤 합니다.
그런데, 이 빌레몬서는 교회를 향해 작성한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교회를 이끌어가야 하는 리더들에게 앞으로의 행보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지극히,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서신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빌레몬서의 시작도 보면 자신을 사도나 종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 이라 표현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한 번 모아봤습니다. 개인적인 서신이 아닌 곳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먼저는 로마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고린도전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고린도후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갈라디아서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빌립보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골로새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디모데전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디모데후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디도서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 곳곳에 자신을 사도다, 종이다 라 언급하며 신분을 드러내지만, 빌레몬서에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서신을 이어갑니다.
물론 한 군데, 동일하게 자연스레 넘어가는 서신이 있습니다. 바로 데살로니가전후서도 사도라는 언급과 종이라는 언급없이 자연스럽게 넘어갑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소그룹 모임을 하며 자세히 나누길 바랍니다.
여하튼, 빌레몬서는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서신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다뤄볼 내용들을 보면, 진짜 개인적인 것이라 ‘왜 성경에 들어왔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Chapter 2. 사도 바울]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작성한 서신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에 대해서는 많이들 들었을 것이지만, 이 빌레몬서를 통해 드러난 바울의 스토리를 한 번 이야기 하며 넘어가고자 합니다.
바울을 이야기 하기 전에 신학자 랄프 P.마틴이 빌레몬서를 보며 이렇게 이야기 했음을 전하고 시작하려 합니다. “바울의 인격을 알기 위해 열려진 창문”
늘 강하고 담대한, 그리고 확신에 찬 말투로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울의 모습이 우리 눈에 그려질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도 따뜻하고 인간적인 측면이 있음을 빌레몬서를 통해 볼 수 있기에 마틴은 방금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만약 이 작은 문서가 보존되지 않았더라면, 바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아주 빈약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이 작은 서신을 통해 사도 바울의 어떤 면이 드러나기에, 오늘 날 독자들에게 이렇게까지 기대감을 주는가 생각하게 합니다.
루터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먼저는 1522년 9월 성서에 발행한 글 중 발췌를 해보았습니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교 사랑의 대가다운 사랑할 만한 예증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성 바울이 어떻게 불쌍한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그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의 주인에게 대신 변호하고 범법한 오네시모 자신과 다름없이 처신했다. 오히려 그는 충분히 권리를 가진 권위와 강제력으로 하지 않고 빌레몬으로 하여금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그리고 1527년에 발행한 빌레몬 강의에서는,
“이 편지는 참으로 순전히 사적이고 가정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곳에서 조차 그리스도에 관한 일반적인 교리를 가르치기를 억제할 수 없었다. “믿음 안에서”(딛3:15). 이것은 교회 안에서 이 교리를 보존하기 위하여 그가 어떻게 권면하고 강조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어느 노예를 그 주인에게 화해시키되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을 것 같은 방식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당신은 키케로가 보지 못했던 탁월한 교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현존하시지 않는 일상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것들을 부지런히 설명해야 한다.”
루터 뿐 아니라 칼빈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비록 더욱 중요한 서신 속에 더 잘 나타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 서신 속에는 바울 영혼의 숭고한 우수성 역시 두드러진다. .. 그는 도망친 노예이자 도둑을 그의 주인에게 돌려보내려 하고 있으며, 그를 용서할 것을 간구하고 있다. 그의 논점을 설명하면서 그는 기독교적 관용을 토론하는데, 한 개인의 사적인 문제보다는 전 교회의 유익에 관해 생각하는 정도의 무게로 다룬다. 아주 천한 조건에 있는 한 사람 대신에, 우리가 다른 곳에서는 그와 같이 온유한 성격에 대한 생생한 그림을 거의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정중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춘다.”
이들은 빌레몬서의 중요성을 말함과 동시에 사도 바울의 인간됨을 언급하며, 다른 서신서에서 나타나는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됨을 언급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빌레몬은 바울이 사도임을 알기에, 또 지극히 개인적인 서신인만큼 친한 사람에게 편지쓰듯 작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한 상황을 언급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 때문이며,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김”을 강조합니다. 즉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갇혀있음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잘못 없는 자가 죄 없이 갇혀있기에 떳떳하고 당당함을 언급합니다.
우리 또한 복음을 들고 서는 것, 또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아니곱게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결코 기죽지 말아야 함은, 우리가 쥐고 있는 무기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손에 쥔 자들 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 우리에게 주어질 지언정, 그것이 복음을 전하다 닥쳐온 상황이라면, 우리는 자랑스러워 함이 마땅합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지만, 그렇다 하여 결코 기죽은 상태도 아니고, 당당하며 확신에 찬 모습을 가지고 어쩌면 잘 지내고 있습니다.
[Chapter 3. 은혜와 평강]
다음주에는 수신자 빌레몬과 압비아와 또 아킵보를 보고자 합니다. 이제는 사도 바울이 그들을 향하여 건낸 첫 마디가 무엇인지 함께 보길 소망합니다. 3절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 서신을 보며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인사는 결코 빠질 수 없는 인사이기도 합니다. 그렇담, 빠짐없이 하는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고, 또 반복에 또 반복을 하는 것이라면 그만큼 중요한 것인데, 왜 이 인사가 중요한 것으로 분류되는 것일까요?
여기서의 핵심은 당연 은혜와 평강일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두 단어의 관계성에 있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보다 우리 믿음 전체에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은혜는 우리 믿음의 시작입니다. 평강은 우리 믿음의 마지막입니다. 은혜는 샘이요, 원천이요, 근원입니다. ..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삶이 산출해 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은 평강입니다.”
말씀에서도 찾아 봅시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나 더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어떤 내용입니까?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결과적으로 주고자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평화고 평강이고 평안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사모해야 하는 삶은 곧 무엇입니까? 평강의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입은 자 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 은혜가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 합니다. 죄 가운데 놓인 우리에게 찔림을, 또 회개함에 감사와 기쁨을, 삶의 고난 속 주님을 붙잡고 나아가는 결단과 의지를, 어려운 자들을 향해 손내밀 수 있는 배려와 자비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런 자의 최종 결과는 평강입니다. 왜 평강입니까? 무엇이 평강입니까?
두 친구가 시비가 붙어 싸웠습니다. 이 상태가 평강의 상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 쪽이 참고 참아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같이 지냅니다. 이 상태가 평강입니까? 이 또한 그렇지 않다 대답할 수 있습니다.
두 가정이 함께 모였습니다. 한 가정은 기독교, 다른 한 가정은 불교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가정이 함께 명절을 보내는데, 서로 배려한다며 각자의 모습으로 예배와 제사를 드리기로 합니다. 이것은 평강일까요? 이 또한 평강이라 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가 평강이라 칭할 수 있습니까? 저의 어릴 적 명절은 늘 전쟁터 였습니다. 독실한 불교 집안에 시집온 저의 어머니는, 저를 교회에 데리고 나가셨고, 명절만 되면 ‘우리는 제사상 앞에 절할 수 없다.’로 많은 언쟁을 해왔습니다.
저 또한 주일학교에서 배우기로, 제사상 앞에 절하지 말아라 라고 배웠기에 당연히 그리 행했습니다. 다만 그 행동이 그리 큰 언쟁으로 커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처음 그 문제를 당면하게 되었을 때, 생각보다 큰 파장임을 알게 되었고, 저는 매년 제사 시간만 되면 밖으로 나갔습니다. 집에 있는 것은 곧 전쟁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강은 언쟁을 피해 아무렇지 않은 척, 서로 배려해서 이해하는 척 하는 것이 결코 평강이 아닙니다. 평강은 치열한 전쟁, 분쟁을 겪은 후 뒤에 오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척, 척 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와 진실된 마음으로 나아가는 연합이 바로 평강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평강의 상태에 놓이도록 두지 않습니다. 우선 우리 스스로에게도 평강이 없습니다. 내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하고 달굽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또 재촉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도 내면의 평강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강이 없습니다. 이태원 참사 사건 또한 그렇습니다. 그 비좁은 곳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151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2002년 광화문과 시청 앞에 모여 수 많은 사람들이 응원을 위해 나왔습니다. 그리고 모였습니다. 그곳에서 사망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공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나 그런 사고는 없었습니다.
이들의 차이는 평강의 차이입니다. 2002년에는 하나됨, 연합이라는 평강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태원 사건에는 평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더 힘 쎄. 밀어 밀어.’ 라는 대화가 오고 갔고, 심폐소생술하는 의료진들 뒤로 희희낙낙 술을 마시며 그 상황을 구경하는 사람들, 또 잠시 쉬며 물을 마시던 의료진을 향해, ‘얼릉 끝내고 물대신 술마시러 가자.’고 말하던 행인들. 이태원 사건에는 평강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와 자연에서도, 나와 국가에서도, 국가와 국가에서도 평강은 없습니다. 내가 더 편리한 대로 행하는 것, 내가 더 유익을 챙길 수 있도록 행하는 것. 이 세상 어디에도 평강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평강의 엔딩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이 바로 함께 등장하는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나의 공로나 노력이나 업적이 아닌, 값없이 주어진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분에 넘치는 호의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된 평강에 길에 이르는 것은 오직 은혜 뿐입니다. 은혜 아니고서야 우리는 평강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패했고 타락하여 스스로 평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강의 대로를 걷게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셔 가능케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인사는 매순간 반복되는 패턴과 같은 인사였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너무나 크고 귀한 내용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평강이 오늘 날 여러분들 가운데도 함께 임하길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저는 청년 사역자로서 너무나 무능합니다. 흔히 말하는 경험치 조차 미비한 사람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만은, 저에게는 여러분들이 충분히 즐거워하는 주일이 되도록, 삶의 예배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기에 늘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준비합니다.
그러다 이번주 제가 정말 존경하고, 또 랜선 멘토로 삼았던 목사님을 온라인으로 만나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언제든 편히 연락하라며 연락처를 알려주셨습니다. 4-5년을 짝사랑하며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이런 은혜가 주어지니 너무 기뻤습니다.
근데, 그보다 더 마음에 울림이 있는 답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청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예배의 즐거움을 누리게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어떤 제스처를 취하면 좋을까요?’ 라고 물었고, 목사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세대의 목회자는 기능에, 그러나 2세대 목회자는 멘토에 초점을 둔다. 지금 현재는 정답이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내고, 또 그 자리를 지켜줘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한국 교회 뿐 아니라 이 세상은 답이 없습니다. 그렇다해서 우리는 이 삶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내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평강의 삶으로 엔딩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저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같아 보이나, 저는 자리 지키는 것이 너무나 어렵고 고난 길이라 생각합니다.
고난이나 그 자리를 지킴에 있어 최선을 다해서, 우리 함께 평강의 삶을 살아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로마서 5장 1절 함께 합독하며,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기도제목]
1) 은혜로 충만한 우리 되게 하소서, 또 우리 청년부 되게 하소서
2) 평강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 되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변치않으시는 사랑과
은혜를 허락하시고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하심이
이 자리에 모여 함께 찬양하며 예배하며
주님의 사랑의 충만하고자 하여 고백하는 청년들과 이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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