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칼을 향하다가 / 다윗이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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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2022년 8월 15일 월요일
제목 : 거인의 칼을 향하다가 / 다윗이 바꾸었다
주제
주보 챙기기- 광고 사항 확인받기 / 아침에 영상 한 번 더 확인하기
1. 이제 수요 기도회로 하나님께 나아가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찬송가 1장을 찬양하겠습니다.
2. 기원 (매주 수정)
앞에 계신 하나님이요 뒤에 계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자 당신 하나님을 위하시는 주님,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바다와 하늘을 지으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시는 주님.
우리에게 주신 삶의 질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나옵니다. 반복되는 리듬을, 지속되는 균형을, 우리의 근심을 해소시키는 안정성을 신뢰하며 주님께 엎드립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질서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리듬을 타게 하시며, 지속되는 균형에 참여하게 하시고, 우리의 근심을 바꾸어 소망되게 하옵소서.
리고 마침내 우리의 참된 집이 되어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3. 자리에 앉으셔서
찬송가 208장
찬양하겠습니다. (두 번
4.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사무엘상 21:1 - 22:2 입니다. 구약 445쪽입니다. (두 번)
- 저와 여러분이 한 절씩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7절을 읽겠습니다
도입
얼마전에 아내는 반려견 송이와 이별을 했습니다. 아내는 16년 동안 함께 잠을 잤는데요. 저는 그 슬픔을 짐작만 할 뿐입니다. 저도 송이와 한번 같이 잔적이 있었는데요. 굉장히 독특한 강렬한 경험이었습니다. 그 따뜻한 생명체가 저에게 몸을 붙히고 잠을 자는 기분은 뭔가 채워지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런 시간을 16년이나 보냈다니, 그 슬픔이 상상이 가지 않지만 짐작만 할 뿐입니다.
다윗이 놉에 도착함
1.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는 다윗 요나단과 눈물의 이별을 합니다. 다윗은 더이상 사울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한번은 요나단이 사울을 잠시 정신차리게 도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요나단도 더이상 손 쓸 수 없는 상태까지 왔습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광기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아들 요나단 마저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언약관계를 맺었던 요나단과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불가항력으로 헤어져야 했던 그 둘의 이별 장면은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성경은 다윗이 더 흐느껴 울었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헤어짐이 어느 정도의 무게였을지 짐작할만 하지요.
아내는 요즘 자꾸만 유기견들의 이야기를 들여다 봅니다. 저에게도 한마디씩 해주곤 하는데요. 저는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의 행보를 예측합니다. 그리고 아내의 마음과 생각도 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에게 유기견과 관련하여 뭔가 하고 싶다고 할 것 같습니다. 작게는 우리가 임시보호처가 되어주자고 하거나, 더 나아가면 유기견을 입양하고 싶다고 하겠지요. 그만큼 아내의 허전함이 그 상실의 아픔이 크다는 의미일 겁니다.
다윗 또한 큰 일을 당하고 아픔을 당한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윗의 선택와 행보를 통해 다윗의 마음과 생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합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헤어지고 바로 놉으로 향합니다.
2. 다윗이 왜 놉으로 향했을까 싶지만 제가 생각하는 그 단서는 조금 뒤에 나옵니다. 놉에는 하나님의 성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키는 제사장 가문도 있었습니다. 놉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삼상 21: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어찌하여 홀로 있고, 어찌하여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까.”
2-1 사무엘상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기점이 되는 지점이 몇군 데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가,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베들레헴이 가는 장면입니다. 그 이야기과 지금의 이야기가 아주 잚은 지점이 많습니다. 이 시간에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처음 장면에서부터 서로 오버랩이 됩니다.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갑자기 방문했을 때, 베들레헴 사람들도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사무엘은 허투루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의 방향과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의 움직임은 그 무게가 다릅니다. 그 걸음을 베들레헴 사람들은 두려워 했습니다. 오늘도 다윗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놉 성소를 지키던 아히멜렉 제사장이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두려움은 단순히 다윗을 향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제사장이 두려워 한 사람은 어쩌면 다윗이 아니라, 사울이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아들마저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의 휘하에 있으면서 부당하게 죽어나간 이들이 꽤 많았을 겁니다. 사실 사울이 변하던 시점부터 그는 대체로 일관된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 주요 인물들을 대하는 방식도 자기중심적입니다.
제사장은 그런 사울을 잘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주요 신하가 되었던 다윗이 찾아오자 두려워합니다.
3. 그의 두려움에는 또 이유가 있었는데요.
삼상 21:7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곧 알게 되겠지만, 이곳 성소에는 이미 사울의 정보원이 와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사울왕이 이 당시에 여기저기 숨겨 놓은 정보원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요. 사실 그의 신분 자체에서 오는 불길함도 있습니다. 에돔사람으로 소개되는데, 예수님 시대의 헤롯왕도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성경의 곳곳에서 에돔과의 관계를 껄끄러운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미 놉 성소의 제사장은 사울에게 감시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히멜렉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울과 함께 활동했던 제사장 아히야의 형제이기도 했습니다.
4. 이제부터 다윗과 아히멜렉 사이의 다급한 대화가 진행되는데, 저는 도엑이 있다는 걸 둘 다 의식하고 있다고 전제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두 사람의 대화가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그 근거는 이렇습니다. 다윗은 언젠가 이날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22:22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5. 제사장은 군인이었던 다윗이 어떤 업무 때문에 온 것이라면, 어찌하여 다윗이 혼자인 것인지 묻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비밀작전 중이며, 자신과 함께한 군인들은 지금 따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러한 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지시했다 말합니다. 여기가 참 이상합니다. 이러한 저러한 곳으로 오라는 표현이 조금 얼버무리는 느낌을 줍니다. 다급한 느낌도 주고요. 진짜 비밀작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따르는 이들 같은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말입니다. 이런 대목만 보아도 아히멜렉은 지금 다윗이 도엑을 의식하고 말한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둘 사이의 연기가 시작됩니다.
6. 다윗은 먼저 먹을 것을 구합니다. 그가 얼마나 준비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에게는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오래 머무를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그 수중에 있는 먹을 것을 구할 뿐입니다. 여기서 떡 다섯 덩이를 달라 말하죠. 다윗이 매끄러운돌 다섯개를 주웠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숫자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숫자 다섯은 ‘약간, 조금’의 이미로 사용됩니다.
7. 아히멜렉은 다윗을 기꺼이 도우려고 합니다. 물론, 도엑을 의식하여 둘 사이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상황이겠지요. 적어도 도엑에겐 아히멜렉이 사울의 비밀작전을 수행중인 다윗을 돕는 모습으로 비춰질 것입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이 가지고 있던 떡이라고는 “거룩한 떡”뿐이었습니다. 이는 성소 안에 여호와의 상 위에 매주 올라가는 12개의 진설병이었습니다. 이는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히멜렉은 율법 규정을 느슨하게 적용합니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이들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면, 먹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8. 다윗은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자신과 부하들이 사흘동안 여자와 동침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어 보통 여행 중에도 군인들의 그릇이 성결한데, 지금 작전 수행중에는 응당 그릇을 성결하게 하지 않겠냐고 되묻습니다. 여기서 그릇이라는 표현은 의복이 될 수도 있고, 몸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둘 다를 의미할 수도 있겠지요. 군인들이 임무를 할 때 자신들의 그릇을 성결하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이 평소 어떻게 임무를 다했는지 은근한 어필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도엑을 의식한 발언이지 싶습니다.
8. 어떤 종교적 규율을 강화했던 사울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사울은 여호와의 군대에 심취한 나머지, 상황이 자신에게 좋게 흘러가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나머지, 한창 싸움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더 어려운 임무 부과했습니다. 먹고 힘을 내도 모자를 판에, 모든 군인들의 금식을 명했지요. 하지만, 아히멜렉은 오히려 느슨하게 규율을 적용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군대에게 꼭 맞는 결정을 내립니다. 싸움을 앞두고 있는 이는 먹어야 합니다. 생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다윗은 거룩한 빵을 먹습니다.
-> 어떤 상황을 인식하고 정도와 타이밍을 판단하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저는 이것이 지혜이지 싶습니다. 예수께서도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지요. 아무리 좋은 규칙도, 말도, 그 삶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싸워야 하는 자국 군대의 힘을 다 뺏어버렸고 이때문에 자신의 아들까기 죽일 뻔 했습니다 .하지만 아히멜렉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 다윗을 살립니다. 엄격함이 잘못이고, 느슨함이 정답이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일에 일반화해서 적용할 수 없죠. 하지만 적어도 성숙한 사람일수록 상황을 파악할 줄 알고 유연합니다.
9. 이 첫 번재 대화가 끝이 나고서야 성경은 도엑이라는 자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다윗은 무기 같은 것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아무리 비밀 작전이라고 해도, 무기도 들지 않았다는 건 이해되지 않습니다. 더 의아한 건, 지금 하나님의 성소에서 무기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번지수 잘못 찾은 거죠. 성소에서 무기라니요. 하지만 다윗은 이 곳에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자신이 거인을 죽이고 전리품으로 취한 거인 골리앗의 칼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었는지 즈음은 알고 있었겠지요. 그것은 놉 성소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애초에 놉을 방문한 다윗의 목적은 바로 골리앗의 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모른척 묻습니다. “여기에 칼이나 창이나 무기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이 또한 도엑을 의식했겠지요.
10. 저는 이것이 다윗이 놉으로 온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전에 먼저 아히멜렉은 굳이 다윗의 업적을 언급합니다. 당신이 죽인 그 골리앗의 칼이 여기 있긴 있다, 그것이라도 괜찮으면 가져가라. 애초에 이 칼을 가져갈 목적으로 왔다는 사실은 다윗의 반응에서도 확인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말합니다.
21:9  제사장이 이르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하더라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취합니다. 이러한 연기는 도엑을 겁먹게 만드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설령 자신의 거짓말이 발각 되더라도 쉽게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말이지요.
11. 허기를 채운 후 다윗의 다음 행선지는 또 의아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거인의 칼을 챙겼다는 사실과는 잘 연결됩니다. 다윗은 이곳은 가장 적합한 은신처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곳은 블레셋 입니다. 블레셋 연합국의 한 곳인 가드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그는 가드왕 밑으로 들어갑니다. 거인의 칼을 들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거인의 칼은 블레셋에게 수치를 주는 기억일지도 모르고요. 그것을 들고 제발로 왔다는 사실은 일종의 회심의 증표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다윗이 얼마다 대단한 인물인지, 얼마나 쓸한만 존재인지 인식시키는 효과를 지녔겠지요. 골리앗을 뛰어 넘는 존재가 자신들의 편으로 넘어왔습니다. 이는 다윗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습니다. 사울의 살해 위협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 사울이 제일 두려워하는 적국으로 피난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골리앗의 칼을 들고 말이죠.
하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12.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의 망명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상기시킵니다.
성경은 다윗은 어딜가나 지혜롭게 행동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놉 성전에서 도엑의 눈을 피해갑니다. 그리고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외국으로 망명 계획까지 세웁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실패합니다. 진짜 어떤 위협과 어려움이 닥쳐오면서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지혜를 신뢰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지혜와 하나님을 혼동하기 직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인의 칼을 향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다윗의 지혜는 무너집니다. 최선으로 섬기고 탁월한 결과를 냈지만 사울에게 지독한 미움을 샀습니다. 상황을 속이고 조금 겁을 주었던 도엑에 의해서 결국 다윗과 아히멜렉을 고발 당합니다. 자신을 도왔던 아히멜렉은 어떤가요?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관련된 제사장 80명 그리고 그 가족들까지 모조리 살육 당합니다. 그리고 회심의 은신처인 적국에서조차 얼마 가지 않아서 위험인물로 찍히고 맙니다.
13. 그리고 다윗은 결국 행동을 바꿉니다.
21: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한글 성경에는 행동이 변했다고 말하는데, 이건 굉장한 강조표현에 능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행동을 바꾸었다 말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미친적 행동을 바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표현이 마치 다윗이 회개하고, 마음과 몸을 삶의 방향을 돌이킨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이 행동을 바꾸었다. 다윗이 비로소 정말로 바꾼건 무엇을까요? 그는 자신의 지혜만을 신뢰하는 삶으로부터 몸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고향 근처로 향합니다. 다윗의 실패는 그를 고향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독특한 공동체가 시작됩니다.
22:1-2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실패와 원통함을 가지고 머물자, 빚진자, 가난한자, 억눌린자, 원통함을 가진 자들이 몰려 옵니다. 다윗의 실패는 그 사회의 중심부에서 밀려한 이들에게 갈 곳을 만들어 줍니다. 그곳은, 골리앗의 칼을 가진 자만이 아니라, 그것을 만지기는 커녕 본적도 없는 이들이 찾아 올 수 있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했습니다. 교회가 그러해야 하던 것처럼 말이죠. 화려함이 아니라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올 수 있는 곳, 환대와 구원의 공동체이길 바랐습니다. 폭력으로 점철된, 그 정점에 머물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다윗은 거인의 칼을 더이상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빚진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의 리더가 됩니다. 그렇게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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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늘, 중심부에서 밀려난 이들이 환대받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말뜻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들을 환대하자, 가 아닙니다. 억지로 끌고 오지 않아도, 사정사정하지 않아도, 그들이 자연스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낮은 곳으로 오셨다고 고백하지요.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은 첫 번째 증인들은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당시 목자들은 어떤 재판의 증인의 자격도 얻지 못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처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은 장면을 한번 보겠습니다.
2장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다윗의 동네는 두 군 데입니다. 예루살렘일수도 있고요. 베들레헴일수도 있지요. 하지만 자신들이 찾아갈 수 있는 곳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작은 동네 베들레헴입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경계가 높이 세워져 있었으며, 종교지도자들의 장소였습니다. 목자들이 감히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지 않습니다. 천한 목작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말합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자. 천한 이들도 거리낌 없이 방문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구주를 영접하고 철저하게 외지인이었던 그들이 환대를 받습니다. 그렇게 목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그곳에서 구주 예수님과 함께하는 최초의 예배가 열립니다. 그 예배가 있는 곳이 교회의 원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아둘람 공동체가 그런 돗
이번에 고등부는 아이들과 “나의 신앙일지”라는 주제로 수련회를 진행했습니다.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신앙일지를 써내려가면 좋겠다는 기대로 기획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수련회 후속모임까지 다양한 분야의 신앙의 선배들을 모셔서 그들의 신앙일지를 듣고자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결국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가능성을 말합니다. 새로운 삷에 대한 가능성입니다. 회복의 가능성 치유의 가능성 화해의 가능성 하나됨의 가능성. 사울의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삶입니다. 비천한자의 삶의 가능성, 아픈자의 삶의 가능성, 깨어진 자, 상처 받은 자들의 삶의 가능성을 이야기 합니다.
다윗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된 이 공동체에는 다윗의 가족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이고 싶은 다윗이 도망을 쳤는데, 사울이 그 가족들을 가만히 둘까요? 우리는 수많은 역사를 통해서 특히 정치범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를 잡기 위한 가장 탁월한 방법은 가족을 건드리는 일이지요. 사울이 만드는 세상에서는 아무런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수 없는 이들입니다. 따라서 아둘람 공동체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일들을 꿈꿀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새롭게 시작된 아둘람 공동체도 이제 서로를 환대할 겁니다. 환대는 기본적으로 외인, 그러니까 안전한 공간에 살아가지 않는 이가 친구로 전환되고, 안전하고 환영받는 장소를 만드는 것과 연관됩니다. 다윗은 작은 자에서 권력의 주류, 사람이 되었다가, 이제 국내로 들어가지 못하는 외인이 되었습니다. 외인만이 시작할 있는 일을 합니다. 외인이 받아들여지고 환대받는 공동체, 결과로 우정 또는 새로운의 친족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이는 새로운 가족의 모습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요나단과의 관계 확장입니다. 그렇게 갈곳 없는 이들이 모여 놀랍게도 공동체를 형성한다. 자신의 지혜에 대한 실망, 그리고 실패와 원통함이 놀랍게도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은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환대받았으며, 용납 받았음을 배워갈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관계가 완벽하지 않아서 삐그덕 거리겠지요. 그러나 우리를 먼저 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운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핵심은 교회가 골리앗의 칼을 가지지 않는 사람도 환대받는 곳이고, 용납받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환대와 용납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우게 됩니다. 사실 사무엘상에 기록된 다윗의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안타까움과 아찔함의 연속입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아둘람 공동체의 상태는 하나님을 보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합니다. 최종 목적지라고 할수는 없으나, 최고의 시작이며 최고의 과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결말입니다.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 모인 곳 그 이상이 될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임도, 우리의 공동체도,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이시니,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에는 가능성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환대와 용납으로 그 이상의 공동체가 되길, 그 이상의 것을 소망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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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합심 기도
1) 본문 속 메시지를 잠잠히 묵상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혹시나 거인의 칼을 향하다가 실패하진 않았나요? 혹은 실패가 두려운가요? 지치진 않았나요? 주님 앞에 잠시 머무르며 우리의 걸음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실패를 그저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또 한가지는, 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원형들은 하나같이 낮은자들의 모임입니다. 아프고 찢기고 고통당한 이들의 모임입니다. 사회 중심부에 있다기 보다는 그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 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성령께서 함께하시며,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그곳에서 약함의 가능성, 약할 때 강함되시는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우리의 모임이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공동체가 되게 해달라고 같이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마무리 기도
주님 우리는 자꾸만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인의 칼을 향해 갑니다. 내가 이룬 업적과 결과에 집착하기도 하고, 내 경험과 지혜를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나만의 신념과 하나님을 혼동합니다. 그렇게 망가져 갑니다. 그렇게 실패합니다. 주님 결핍 있는 우리의 모임이, 우리가, 교회 되게 하옵소서. 이 땅에 머리 둘 곳 없이 외인으로 오신 주님, 그 주님이 시작하신 새로운 가족 곧동체를 우리가 닮게 하옵소서. 아프고 찢기고 상처받은 이들이 가까이 오기를 주저하지 않는 주님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그곳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그렇게 새로운 삶이 열리며, 주님께서 꿈꾸신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7. 광고 - (꼭 확인!!!!!!!)
8. 축도/ 주기도문
이제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의 실패와 아픔을 가능성으로 바꾸시며, 그곳이 교회되게 하시는 오늘 주 앞에 엎드린 모든 성도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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