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6 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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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도전 88 내 진정사모하는 / 82 성부의 어린 양이
찬송 205 주 예수 크신 사랑
본문 시1:1-6
20세기 미국의 국민시인으로 불려지는 로버트 프로스트가 쓴 유명한 시, ‘가지 않은 길' 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시의 결론부분은 이렇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지으며 말하렵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시인은 인생 가운데 단 두 개의 갈림길이 있다고 말한다. 오늘 본문인 시편 1 편 을 비롯하여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 두 개의 길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이 시를 낭송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인이 말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은 이 점을 다소 모호하게 다루었다. 하지만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본문의 말씀이다.
본문을 보라. 시편기자는 복있는 사람을 설명하면서 긍정적인 차원에서 시작하지 않고 뭔가 부정적인 차원의 것을 먼저 설명한다. 시1: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에 세 가지 동사가 나온다. “따르다", “서다", “앉다" 이 동사들은 삶의 근본적인 행위들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좇아 행하기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그 자리에 서게 되고, 나중에는 그 자리에 아예 터를 잡고 눌러 앉게 되는 법이다. 문제는 그가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가는가, 그는 지금 어느 위치에 서 있는가, 어느 자리에 터를 잡고 앉아있는가에 대한 부분이겠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특이하게도 그것을 어느 자리라고 표현하지 않고 ‘누구와 함께' 라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이 말은 진정 복있는 자는 악인이나 죄인이나 오만한 자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편기자의 말을 잘 보라. 그는 단 한순간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도 그들도 죄인인데 뭐! 죄인이니까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것이고, 죄인이니까 언제든 악한 자들과 함께 할 수도, 그들과 손을 잡을 수도 있는 거지 뭐"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전에는 죄인이었으나,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영접함으로 거듭난 존재이다. 신학적인 용어로 중생이라고 한다. 중생을 통하여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즉 우리의 본성 자체가 변화한 새로운 피조물이다. 따라서 예전처럼 악인의 꾀를 따라 살아갈 수 없고, 죄인의 길에 설 수 없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자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그런 악한 길이 즐거웠었고, 죄인들과 함께 어우러져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하던 삶이 기뻤었고, 오만한 자들과 함께 높은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 삶의 이유였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 거듭난 이후로 이런 자리가 더이상 즐겁지가 않다. 오히려 불편해진다. 거북해진다. 이미 그의 목표와 가치와 삶의 이유가 바뀌었으니까. 시편기자는 복있는 자가 교회다니는 사람이라 말하지 않는다. 시편기자가 교회에 등록한 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시편기자는 진정 복있는 자란 예수를 영접하여 중생함으로서, 거듭남으로서, 그의 본성이 바뀌어서 전과 같이 살 수 없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시편기자는 부정적인 차원의 것들을 말하다가 이제는 적극적인 특성들을 언급한다. 시1:2 를 함께 읽어보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 있는 자란 무언가를 따르지 않고 무언가에 함께 서지 않으며, 무언가에 함께 자리잡지 않는 자 정도가 아니라, 무언가를 아주 열심히, 아주 적극적으로, 아주 즐겁게 추구하는 자이다. 이전에는 악인의 꾀를 따랐고 죄인의 길에 섰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기를 즐거워했는데, 중생하고 나서 그의 즐거움의 대상이 바뀌었고 인생 가운데 추구하는 바가 달라진 것이다. 그 첫번째가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여호와의 율법, 법, 명령은 “하라" 와 “하지 말라" 라는 수많은 명령과 규례로 형성되어 있다. 완전한 순종을 드린 자에게는 축복을 약속하지만, 그 중 단 하나라도 어기는 자에게는 오만가지 저주를 약속하셨다. 사람이 이런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은 언뜻보면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율법을 즐거워한다. 그래서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이다. 이 말은 이 사람에게 뭔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단순히 악인이나 죄인, 오만한 자와 함께 하지 않는 정도 차원의 것이 아니라, 이 율법을 즐거워하게 되었고,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게 되었다는 것은 뭔가 그의 삶 가운데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중생, 거듭남이라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중생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는 율법을 즐거워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거듭나지 못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할 수 없다. 사람이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가 무엇인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것이 기쁨이 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 된 것이다. 그래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역사속에서 박해가 일어날 때 모든 것들은 다 빼앗겨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큼은 목숨걸고 지켰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의 불씨는 유럽 전체를 뒤흔들었다. 독일과 영국, 스위스 등 유럽 각지에서 종교개혁은 강력하게 일어났고, 이는 강력한 로마카톨릭 국가였던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칼빈주의를 따르던 개혁주의 성도들을 가리켜 ‘위그노(Huguenot)’라고 불렀다. 당시 프랑스 왕 앙리 4세는 비록 프랑스가 로마카톨릭을 국교로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위그노들을 존중해주었다. 그래서 ‘라 로셸’ 이라는 지역에 그들이 따로 모여 살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앙리 4세가 죽고난 후 루이13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루이13세는 아주 강력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루이13세와 그 아들 루이14세에 이르기까지 라 로셸에 살고 있던 위그노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기 시작한다.
당시 로마카톨릭은 독일이든지 영국이든지 무조건 라틴어로 된 성경을 보았고, 설교도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그러다보니 회중이든, 설교자이든 이것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루터를 비롯하여 칼빈은 모국어로 된 성경을 번역하는데 힘을 썼다. 자기 말 성경을 가지고 자기 언어로 예배드리게 하였다. 어찌보면 종교개혁의 구심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로마카톨릭은 제일먼저 무엇을 없에려 했겠는가? 당연히 번역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 왕 루이13세와 14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가장 먼저 프랑스어로 번역된 성경을 모조리 불태우려 했다. 이에 위그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성경을 아주 작은 사이즈로 옮겨적는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필사로 옮겨적었다. 그들은 머리장식이나 옷깃에 넣어 숨기고 다닐 수 있도록 성냥갑만한 작은 미니성경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박물관 등에서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는가? 그 말씀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을 사랑했기 때문에.
또한 복있는 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2절 후반부를 보시면 ‘그 말씀을 묵상하는 자’라고 한다. 묵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읽는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묵상은 읽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읽기만 하는 것이 묵상은 아니다. 묵상은 읽은 말씀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되게 하고 찬양이 되게 하는 행위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나? 읽은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고 또 되새기는 것을 통해서이다. “이 말씀은 무엇을 교훈하는가, 이 말씀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이고, 나는 그 하나님의 성품을 나의 삶 속에서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던지되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기까지 그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라. 하루종일 하나님의 말씀만 읽으라는 것이 아니다. 가령 아침에 읽은 그 말씀 중 어떤 한 구절을 가지고 묵상하는 것이다. 그 말씀을 곱씹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이 일을 즐거워하는 자이다. 그는 이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한 자이다. 그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얻고 누리는 유익, 능력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는 자이다. 그 말씀을 계속해서 되새기며 마음 가운데 그 내용들이 기도가 되고 찬양이 되기까지 곱씹는다면 이것이 신자의 삶 가운데 얼마나 힘과 능력으로 나타나겠는가? 왜 우리의 기도가 힘을 잃고 왜 우리의 찬양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가? 우리가 묵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대 유명한 청교도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삶 가운데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고난 가운데 넘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를 가리켜 묵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으로 꼽는다. 묵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왜 교회 안에 성경에 박식한 자들은 많지만 참된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이 많아지는가? 묵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성경은 읽는다. 성경에 대한 공부도 한다. 그러나 묵상이 없다면 그는 오만한 자가 되고야 마는 것이다.
제가 2012년에 아내와 함께 필리핀의 어떤 오지로 단기선교를 갔었다. 그 마을을 가려면 강을 건너야 하는데 강에 다리조차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된 지역이었다. 주변에서는 소떼를 풀어놓고 키우고 있어서 강에는 소똥들이 둥둥 떠다닌다. 그래도 목적했던 마을을 가려면 그 강에 들어가서 물살을 헤치며, 떠다니는 소똥들을 피해서, 모든 짐들을 머리 위로 번쩍 든 채로 건너가야 했다. 그러한 마을에 오늘 우리처럼 수도시설이 잘 되어 있겠는가? 물을 얻기 위해서는 펌프질을 해야 한다. 마을 밖 강에서도 물론 물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물은 똥물이다. 그 물은 더럽다. 마실 수 없는 물이다.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서는 힘껏 펌프질을 해야 한다. 수고를 해야 한다. 우리가 수고를 감당하지 않는다면 결코 신선한 물을 얻을 수 없다.
성경도 그러하다. 복있는 사람은 그 이치를 영적으로 적용하는 사람이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그러나 아무런 수고도 없이 그 말씀의 맛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복있는 자는 그 말씀의 맛을 얻기 위해, 그 꿀송이보다 달다는 말씀을 경험하기 위해 묵상이라는 수고를 기꺼이 하는 자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는 점점 더 하나님의 율법에 드러난 하나님의 모든 성품에 대한 진리의 영향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룩함을 입어가는 것이다.
복있는 자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시인은 3절을 통해 잘 보여준다. 시1: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이 사람의 삶은 열매 맺는 삶이고 형통한 삶이다. 이렇게 열매 맺고 형통한 삶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그를 시냇가에 심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친히 심으신 나무를 세상 어떤 권세가 꺾거나 뽑을 수 있는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 이것이야말로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이다. 그래서 그 잎사귀는 마르지 않고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 이 말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결국에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고난의 때에도 인내의 과실을 맺고, 시련의 때에도 믿음의 과실을 맺으며, 번영의 때에도 거룩한 기쁨의 열매를 맺는다.
또한 복 있는 자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만사형통은 고난이나 문제거리, 나쁜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형통은 어떤 일들, 어떤 상황 중에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셉을 생각해보라. 그는 17세에 형들에게 팔려 애굽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다. 이처럼 비참한 경우가 어디있는가? 그럼에도 창39: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가 형통한 자라고 말씀한다. 그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도 창39:23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복있는 사람의 형통함은 무엇인가? 그의 삶 가운데 아무런 문제거리들이 일어나지 않는것이 아니다. 복있는 자는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상황, 모든 형편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고, 결국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형통함이다.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며 동행하시는 형통이고, 이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이다. 때로 복있는 자들의 삶은 세상의 기준대로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때로 복있는 자들의 삶은 빠른 길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길은 바른 길이고, 의인의 길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잠14:12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빠른 길과 바른 길을 구별해야 한다. 예수믿는 우리는 빠른 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악인들은 어떠한가? 4절부터 보면 시편 기자는 악인의 특징이 복있는 자의 모든 특징과 정 반대라는 사실을 말한다. 악인은 물론 악인의 꾀를 쫓아 행하고 죄인의 길에 서 있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눌러 앉은 자들이다. 악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결코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다. 악인은 그 삶에 어떠한 선한 열매도 없으며 모든 일이 형통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는 흡사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기 때문에 빠른 것처럼 느껴질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버림을 받고 불태워질 겨에 불과하다. 사람이 보기엔 바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망의 길로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빠른 길, 빠른 성공을 추구한다. 그들은 빨리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형통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바른 길은 관심사가 아니다. 아무 가치도 없는 겨에 불과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5절을 보라. 그들의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후 설 수 없다는 것이다. 견디질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 사는 동안에 사람들의 시선을 속일 수는 있다. 교회에 들어가 섞일 수도 있겠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지만 추수의 날이 이르기까지 목사도 될 수 있고 장로나 권사도 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이르게 되면 그들을 포장하고 있던 모든 허울들이 벗겨지게 될 것이다. 사람들을 속여왔던 모든 껍데기가 벗겨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마13: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것이 그들의 결국이다. 바른 길을 추구하지 않고 빠른 길만을 추구하였던 그 인생의 종착지이다.
시편기자는 6절을 통해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대조하고 있다. 시1:6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말씀을 따라 미국 개혁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목사라 할 수 있는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시편1편 설교의 제목으로 “빠른 추월의 길과 옳은 길"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기도 했다. 인생을 살다보면 빠른 추월의 차로로 느리게 가는 차들을 앞지르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빠른 길이 바른 길은 아니다. 우리는 그 길이 옳은 길인지 살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인지 살펴야 한다. 나의 양심을 조금만 속이면, 한번만 눈감아주면 훨씬 더 빠르게 갈 법한 길들이 보인다. 그러나 그 길은 망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어떤 길을 인정하시는가? 언제나 바른 길이다.
여러분, 이제 설교를 마무리 지으며 하나만 생각해 보려 한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 본문의 말씀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누가 복있는 자인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지 않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여러분, 과연 여러분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실 수 있는가? 여러분은 진정 내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했던 자가 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성경 속의 인물들을 여기에 대입해보라.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은 진정 이런 사람인가? 아니다. 그는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면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 했던 옹졸하고 비겁했던 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역사에 크게 쓰임받은 모세는 이런 사람인가? 그는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서 살인했던 자였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 다윗은 이런 사람인가? 그는 자신의 힘과 권세로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이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복있는 사람인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등장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도 여기에 속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복있는 자란 말인가? 우리는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보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어떠한 인간도 1절에서 말씀하시는 복있는 자의 범주에 들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악인의 꾀를 좇지 않으셨고, 오직 그분만이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셨으며, 오직 그분만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신 유일한 분이다. 아담도 범죄했고, 성경의 수많은 선배들도 그러하였으며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 복음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약속하셨다. 오직 주님만 진정 복 있는 분이시지만, 그분을 마음 가운데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여 산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다.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우리에게 거듭남, 곧 중생이라는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의 존재 자체를 새롭게 변화시키셨다. 이전 것과는 다른 새로운 존재로, 이전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피조물로 우릴 바꿔버리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머리가 되셨고, 우리는 그분의 소유요, 그분께 속한 그분의 거룩한 몸이 되었다. 멸망받아 마땅한, 망하는 길을 쫓아 살던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가 임하였다. 롬8:1-2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은혜를 누리는 자가 진정 복된 자가 아닌가? 이 은혜 가운데 있는 자가 진정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아닌가? 이 은혜를 붙드는 자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길을 걷는 자가 아닌가? 여러분,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진정 복이 있는 자이다. 예수 믿는 자가 진정 행복한 자이다. 이 사실을 확신하시는 여러분들 되셔서 더욱 우리 구주를 붙드는, 그래서 조금 느릴지언정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인생을 살아가시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06 주님의 귀한 말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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