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다니엘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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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 고난 중에도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인내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자.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고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 가는 어두운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기다림 만나
얼씨구나 부등켜 안고 웃어 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 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 눈 내리는 보리밭 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한국 서정시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정호승 시인의 작품,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는 시입니다.
설교제목은 희망을 기독교적 언어인 소망으로 바꿨을 뿐입니다.
이 시를 보며 슬픔과 절망이 가득찬 세상에 우리가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 꿈을 꾸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각박한 현실 세계에 묻혀 살면 꿈을 꾸기 힘듭니다.
무거운 현실에 눌려 꿈이 압살당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2022년 한해동안 우리가 살아온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기후위기로 많은 나라에 재앙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가끔씩 끔찍한 참사가 일어나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심지어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도 다가와 우리를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또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강자만 살아남고 약자는 도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보이고,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볼 성경의 다니엘이라는 인물이 살던 세상은 어떻습니까?
그는 나라가 망해 포로로 잡혀와 머리가 하애지도록 머나먼 이방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돌아갈래야 돌아갈 고향이 없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거대한 우상들이 즐비하고, 언제나 자신을 노리는 원수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신앙을 지키려다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제국의 화려한 문명이 마음을 흔들어놓고, 불쑥불쑥 세상과 타협하고자 하는 마음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기 힘든 환경입니다.
이런 환경속에서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꿈을 꾸게 하십니다.
이방인 왕을 통해, 때로는 자신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꿈과 환상을 열어주십니다.
다니엘에게 이런 꿈과 환상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였고, 이 세상의 주관자가 제국의 왕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믿는 우리는 이 험난한 세상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본론]
첫째, 우리는 과거를 털고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20절)
20절입니다.
내가 아직 아뢰어 기도하면서, 나의 죄와 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하고, 나의 하나님의 거룩한 산 성전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주 나의 하나님께 간구할 때
9장에서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이 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들어서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특별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예레미야서 25장 11절에서 바벨론왕을 70년동안 이스라엘이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묵상합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이 70년후 끝날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어린 시절 바벨론 포로로 끌려와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었으니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말씀을 묵상하며 먼저 털어낼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니엘은 묵상을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한 것은 하나님의 힘이 약하거나 그들이 군사적으로 약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죄악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70년이라는 세월은 단순히 심판의 시간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회개할 시간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다니엘은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한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가 없다면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털 것은 털고 가야 달라진 미래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다니엘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하셨던지 21절에 보면 곧바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응답해주십니다.
23절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이 간구하자 마자 곧 응답이 있어 하나님이 자신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고자 안달이 나신 것입니다.
이사야 65:24절에서 하나님은“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기도에 하나님은 놀라운 응답을 주십니다.
과거를 털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적 연결]
이사야 43장 25절에서 하나님은 허물을 삭제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다시는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시지 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약속하셨습니다.
[적용]
결혼지옥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니 부부가 나이가 70이 넘었는데도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왠만하면 그 정도 나이면 무슨 일이 그리 심각할 게 있을까 싶었는데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이 젊은 시절 바람핀 사실을 잊지 못하고 끊임없이 끄집어내는 바람에 매번 싸우는 것입니다.
서로 웃으면서 좋다가도 결말은 젊을적 남편 바람핀 이야기, 밥 잘 드시다가도 남편 바람핀 이야기, 모든 이야기의 끝이 남편 바람핀 이야기 였습니다.
남편은 이제 여생을 아내와 재밌고 행복하게 보내려 하는데 늙어서도 아내가 그 기억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랑 아내가 그 이야기를 보면서 아내도 상처가 깊어서 힘들겠지만 남편도 참 힘들겠다 싶더라구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 하나님도 그 분처럼 끊임없이 우리의 죄악을 들쳐내신다면 어떨까요?
예배할 때도 10년전 죄악을 기억나게 하시고, 밥먹다가도 기억나게 하시고 그럼 어떨까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 우리의 모든 죄악을 잊으십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이 날 우리는 한 해동안 해묵은 죄들을 먼저 털어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가 더 짙은 농도로 주님께 드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영혼을 깨끗이 씻고, 마음에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년에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새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둘째, 지경을 넓혀 하나님의 비전에 동참해야 합니다(24절)
2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백성과 거룩한 도성에 일흔 이레의 기한을 정하셨다. 이 기간이 지나가야, 반역이 그치고, 죄가 끝나고, 속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영원한 의를 세우시고, 환상에서 보이신 것과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고, 가장 거룩한 곳에 기름을 부으며, 거룩하게 구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정확한 응답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세울 것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더 큰 비전을 다니엘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먼 미래의 비밀한 일까지 다니엘에게 다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여기서 일흔 이레는 70이 일곱번, 즉 490년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이 원했던 70년이 70이레로 바뀌어 490년이 되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490년을 어떻게 해석할지가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난제중 하나라서 여러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한가지 힌트는 7이 완전수이고, 10도 완전수라서 490은 7*7*10이 되어 세개의 완전수가 모여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숫자를 상징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또한 70이레후 이루어질 일들을 보면 그 때가 언제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죄가 끝나고 속죄가 이루어져 하나님의 영원한 의가 세워지는 때는 먼저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때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 끝에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이 섞여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이런 비밀스러운 일을 다니엘에게 알려주셨을까요?
23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그를 크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크게 은총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문자적 의미는 ‘소중한 것, 보물, 보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다니엘을 자신의 보석처럼 소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하나님의 비전에 동참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연결]
창세기 12장 2,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며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 민족만 복받는 게 아니라 온 세상 민족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 복이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나라의 샘플로 이 땅가운데 세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그 하나님 나라가 온 세상 민족들에게 전파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적용]
야곱의 축복이라는 노래 속에, ‘너는 담장너머로 뻗은 나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야곱의 축복이란 야곱이 축복을 받는다는 게 아닙니다.
창49장에서 야곱이 죽기 전에 아들들을 축복하며 요셉을 축복할 때 그를 샘곁에 무성한 가지라고 부르며 그 가지가 담을 넘었다고 축복합니다.
담장너머로 뻗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내 울타리를 넘어 하나님의 비전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매번 나의 소원, 내 가족의 소원만 빌게 아니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기도할때마다 고통받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는 지경이 넓어지는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나만 누릴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을 섬겨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가 복의 통로, 하나님 나라의 통로가 되어 내 이웃이 복,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년에도 나와 가족들을 위해서만 기도해야할까요?
하나님이 온 세상을 향한 꿈과 비전을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내 담장 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까요?
주님은 우리를 보석처럼 소중히 여기셔서 담장 너머로 뻗어나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이런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은 어떻게 지금을 살아가야 할까요?
셋째, 현실에 압도당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27절)
27절입니다.
침략하여 들어온 그 통치자는 뭇 백성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굳은 언약을 맺을 것이다. 그리고 한 이레의 반이 지날 때에, 그 통치자는 희생제사와 예물드리는 일을 금할 것이다. 그 대신에 성전의 가장 높은 곳에 흉칙한 우상을 세울 것인데, 그것을 거기에 세운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끝 날을 맞이할 때까지, 그것이 거기에 서 있을 것이다.
24절에서 일흔이레를 490년으로 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일흔이레를 세 시대로 나눠서 다시 말씀합니다.
7이레, 62이레, 그리고 1이레입니다.
합치면 70이레가 되는 거죠.
먼저 일곱이레는 25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보수, 재건하는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 기름부음받은 지도자가 세워지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을 이끌었던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말합니다.
여호수아서 여호수아가 아니라 그 당시 대제사장 이름이 여호수아입니다.
그 다음 62이레 동안에 어려움도 있지만 이스라엘 거리와 성곽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아마도 느헤미야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62이레가 지난 후 상황이 바뀌어 기름부음받은 지도자가 부당하게 살해당하게 됩니다.
어떤 학자들은 살해당한 지도자가 주전 2세기 중반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26-27절에 나온 마지막 한이레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설명이 제일 길고 자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한 이레때 침략자가 들어와 예루살렘이 다시 황폐해지는 기간을 겪게 됩니다.
이 침략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많은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 것을 볼 때 주전 2세기 중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숫양, 숫염소 환상을 설명할 때에도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높은 곳에 흉측한 우상을 설치하고 많은 유대인들을 죽였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정하신 끝 날을 맞이할 때까지’입니다.
이 말은 악의 세력에 끝을 하나님이 정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때를 겪더라도 그 기간 조차 하나님의 큰 계획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적 연결]
다니엘서에는 많은 꿈과 환상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이런 꿈과 환상을 주신 이유는 그 당시 이방 나라에 유배민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암흑처럼 암담했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환상을 보여주신 것은 그 당시 로마 황제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큰 고통과 환란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꿈과 환상의 핵심은 모든 고난에 끝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최후승리를 누릴 것이라는 점입니다.
[적용]
앞서 언급했던 우리의 세상을 보십시오.
암담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과 환상을 열어주십니다.
꿈이 질식당해 버릴 것 같은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꿈을 꾸라고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정호승 시인의 마지막 부분,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격려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과 환상은 세상을 도피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실은 무시한 채 막연한 몽상가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끔찍한 현실 속에 묻혀, 패배감이나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승리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현실을 묵묵히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꿈과 환상을 많이 본 다니엘이 몽상가였습니까?
그는 현실을 누구보다 충실히 살아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다가와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가운데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누군가는 한 해를 돌아볼 때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많았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삶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쁜 일이 있더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한 해동안 좋은 일, 나쁜 일,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주님의 은혜로 여기고 감사합시다.
그리고 새해에는 다니엘처럼 주님이 주시는 꿈과 환상을 꾸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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