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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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예배 콘티
말씀 : 사사기 7:1-7
제목 :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시다!
찬 258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
찬 313장 내 임금 예수 내 주여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시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감사합니다. 오늘 이 오후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만이 왕 되심을 선포하는 이번 한 주간의 삶이 되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에, 저는 육군에서 병장 전역하였는데요, 항상 점호시간에 하는 구호가 있습니다. 복무신조라는 것인데요, 군인이 군복무를 하며 따라야 하는 신의의 내용을 만든 내용입니다. 이 복무신조는 반드시 훈련소에서 암기해야 했으며 매일 저녁점호 시간에 이 복무신조 함께 외워야 했습니다. 복무신조의 서론의 내용을 재대한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복무신조를 시작하며 지금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죠, 저는 여기서 ‘충성’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군인은 무엇에 충성하는 사람들일까요? 이 복무신조에 따르면 바로 국가와 국민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군인입니다. 군인은 바로 이 때문에 복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인들은 인사할 때도 뭐라고 인사합니까? “충성”하고 경례를 하며 인사합니다. 여러분 군인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그것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왜 충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냐면, 사람들은 다 어떤 것들에 충성하며 살아가요, 그리고 그 충성하는 대상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복무할 때에 저는 보직이 운전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바로 위에 선임은 어떤 운전병이였냐, 바로 장군 운전병이였습니다. 장군 운전병이 뭐가 좋은지 아세요? 제 선임은 그냥 병사였는데, 그가 장군차를 운전한다는 이유로 부대 간부들조차 제 선임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잘해주더라구요, 이것은 간단한 예이지만, 사람이 누구에게 충성하냐 누구를 모시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가치 역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계에서 조직 보스를 모시고 충성하고 있는 조폭들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의 삶은 아무리 포장해도, 조직에 몸담고 있는 한, 보스를 모시며 충성하는 한 조폭의 삶입니다. 반대로 한 나라의 지도자나 왕을 모시며 그 밑에 충성하며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무엇을 하든 자신이 모시고 있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거나 중요한 사람이라면, 밑에 사람들 역시 영광을 취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충성하며 누구를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까?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그 왕을 섬기는 자들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분 때문에 영광이 있습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의 삶에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사사기 7장에 등장하는 기드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너무나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사사기 6장 1절에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으로 한 장 펴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미디안 족속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미디안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에 웅덩이와 굴과 산성들을 만들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파종, 즉 씨만 뿌렸다 하면 쳐들어와서 온갖 밭을 헤집어 놓고요, 먹을 것 하나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키우던 가축 역시 모두 다 가지고 갔습니다. 7년간이나 이런 괴로움에 시달렸어요. 이스라엘은 너무나 배고팠으며 굶주렸습니다. 너무나 괴로우니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부르셨고요, 사사를 부르십니다. 그 사사가 누구였을까요? 바로 기드온이었습니다.
이 기드온이 처음 사사로 불림 받았을 때 모습이, 사사기 6장 11-12절에 나옵니다. 한번 더 같이 읽어볼게요. “(삿 6:11, 개정)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을 보고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몰래 숨어서, 미디안 사람들에게 걸리지 않고, 밀을 타작하려고 하고 있는거에요. 참 웃기지 않습니까? 그를 큰 용사라고 부르면서 정작 기드온의 모습은, 미디안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숨어서 밀이나 타작하고 있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그를 사사로 부르자, 그는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쏟아놓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어떻게 미디안이 우리를 괴롭게 하며 쫄쫄 굶게 만듭니까? 하나님이 대답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불러 구원하라고 하는거 아니냐? 그러자 기드온은 쩔쩔맵니다. 15절 보십시오.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까? 내 집안을 보십시오. 내 상황을 보십시오. 자신이 부족하다며, 이런 저런 표징들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기드온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말했듯 그 사람의 삶이 어떤 가치인가 평가받는 유일한 근거는, 그 사람이 충성하는 대상입니다. 기드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서 숨어서 밀타작을 하고 있든, 하나님께 불평불만하며 자신은 못한다며 표징을 계속구하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지금 그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고, 지금 왕이신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계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이제 왕이 보낸 사신, 사사가 되어버렸어요. 무엇 때문에요? 그가 가진 능력이나 형편이 아니라 바로 왕되신 하나님 때문에요. 계속해서 하나님은 그 사실을 기드온에게 거듭 말씀하십니다.
12절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너와 함게 계시도다“ 그가 큰 용사인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16절에 보십시오. 하나님이 직접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그가 모래와 같이 많은 미디안 족속을 물리칠 수 있는 이유가 뭡니까?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군사적 능력을 가졌는지, 용기를 가졌는지, 형편이 어땠는지가 중요한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미디안 손에서 구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준비되어야지, 내가 능력을 갖춰야지, 내가 용기를 내며 열심을 내야지. 결국 나를 의지하면 결론이 뭡니까? 아직 부족해, 내 힘으로는 안돼, 원래 안되는 일이었어, 내가 더 열심을 내야지. 결국 끝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 함께 하십니까? 바로 왕이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능히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주도 왕되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동행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능력으로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두 번째입니다. 따라해보겠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통하여, 자신이 함께 함을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이었죠? 바로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로 모래알과 같이 많았던 미디안 족속을 물리친 방법이었습니다.
드디어 기드온은 하나님께 표징도 받게 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과 용기를 얻고 미디안 족속과 전쟁을 치루러 나가게 됩니다. 기드온이 군사를 몇 명이나 모았나? 약 3만 2천명을 모았습니다. 미디안 족속의 군대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7장 12절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메뚜기 떼와 같았고, 그들이 타고 온 낙타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았다고 표현합니다. 사사기 8장에는 이들의 대략적인 숫자가 나오는데요 10절에 보면, 12만명이 죽고, 만 오천명이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미디안은 13만 5천, 즉 이스라엘 보다 4배가 족히 많은 규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군대 3만 2천대 13만 5천이 싸워도 솔직히 될까 말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오히려 기드온에게 지금 너희 수가 너무 많다. 이렇게 싸워서 이긴다면 너희가 잘싸워서 이긴 줄 알테니, 군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겁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그 말을 듣고 순종합니다. 너희 중에 겁먹은 사람이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라. 그래서 몇 명이 돌아갔어요? 3절 보면, 2만 2천명이 돌아갑니다. 병력의 약 3/2가 집으로 돌아갔어요. 이제 만명이 남았죠. 하나님은 그래도 많으니깐 더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그 방법은 물가에서 물을 먹이는데, 손으로 떠서 개처럼 핥아서 먹는 사람만 남기라는 겁니다. 물을 먹을 때 이렇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니깐 몇 명이 남았어요? 300명이 남았습니다. 만명중에 97%가 떠나버렸고요 약 3%사람 300명이 남았습니다.
여러분 기억해야 하시는 건요, 여기에 남은 300명이 정예부대가 아닙니다. 그냥 물을 개처럼 핥아서 먹은 사람 300명 남은거에요. 300명으로 13만이 넘는 미디안 군대를 어떻게 이길까요? 도무지 생각해봐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손에 나팔을 들고 다른 한 손에 빈 항아리를 들게 하셨고요,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어 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진영으로 가 항아리를 부수면서 횃불을 들고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락 외치니, 그 군대가 서로 칼로 치며 혼비백산에 빠지게 되어, 그들은 스스로 자멸하게 되어 전쟁에 패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의 방법과는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도 너무나 쉽게 이 숫자의 논리에 빠져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숫자라는 것이 희한하게도 아주 우리에게 편리한 도구이며 수치를 보여주는 글자이지만, 때로는 이 숫자가 우리의 영적인 눈을 가려버릴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숫자는 눈에 보이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숫자를 의지합니다. 3만 2천대 13만 5천 누가 봐도 13만 5천 아닙니까? 하지만 300명이 남은 순간에도, 그 숫자를 넘어 누가 그들과 함께 계셨어요? 왕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숫자의 논리는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우리도 이 머릿수, 또는 숫자에 사로잡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도 모르게 교회를 머릿수로 생각합니다. 머릿수가 얼마나 되냐에 따라 크고 영향력 있는 교회, 작고 힘없는 교회를 나눠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그러한 생각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어요. 머릿수를 많이 채워넣고 싶어하구요, 결국 그 채워넣은 머릿수는 뭐가 됩니까? 내 영광이 됩니다.
제 안에도 끊임없는 이런 욕망들이 있음을 깨달았어요. 주위의 목사님들이 요즘 코로나로 주일학교도 어렵고 그런 농촌에서 아이들이 오냐고 물어보면요, 제 안에도 욕망이 있는거에요, 언제부턴가 머릿수를 채워넣어야 겠다는 내가 영광 받아야 겠다는 죄성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제가 그때 하나님 앞에 회개했어요.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정말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며 사랑하며 세워줄까,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방법은 항상 소수였으며, 마음의 중심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과 골리앗 마찬가지에요. 딱 까놓고 수치를 보십시오. 키로 보나 덩치로 보나 당연히 골리앗 압승입니다.
다윗은 그 상황에서 숫자를 보지 않습니다. 뭘봐요? 하나님을 바라봐요. 지금 그 전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그 골리앗,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는 골리앗이 모욕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갑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인, 어떻게 13만 5천의 미디안을 무찌릅니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방법을 붙드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머릿수처럼 잘보여지는 것이 현 시대에는 돈입니다. 숫자로 표현되는 그 돈이 또 다른 세상의 방법이 아닙니까? 교회는 특히나 머릿수와 돈을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는 도구가 되어지지만, 그것을 조금만 벗어나게 되는 경우, 사람의 영광을 취하게 되거나, 세상의 방법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대로 미디안 족속에세 승리를 거머줬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이 끝난 후 누가 영광을 받았을까요? 그렇게 하나님은 3만명이나 되는 군대를 1퍼센트 즉 300명만 남기시면서까지 그렇게 사람이 영광 받지 않기를 원했는데, 결국 나중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누구를 칭송합니까? ”기드온“을 칭송하구요, 그를 자신들을 다스릴 ‘왕’과 같은 자로 세우려고 합니다.
그 때 기드온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8장 23절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참 말은 잘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십시오.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차고 있는 금귀고리를 좀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외에도 초승달 장식과 패물, 미디안 왕복과 왕궁 낙타까지 원해요, 게다가 아들의 이름을 뭐라고 합니까? ”아비멜렉“ 그 뜻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으로 이름을 짓습니다.
이 부분을 우리는 함께 살펴보며, 다시금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하며, 정말로 이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다시금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드온도 시작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비록 부족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통하여,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 손에서 구원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이 함께 하셔 이룬 모든 것이 기드온 자신의 영광으로 변질되어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우리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자, 우리 교회의 주인, 우리 가정과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십니다. 이번 한주 간의 삶이, 정말로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그분과 동행함으로 인해 우리의 삶의 가치가 왕과 같이 영광스러움 가운데 가치있는 삶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영광이 나의 영광이 아님을 분명히 기억하며, 세상의 방법과 숫자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방법대로, 믿음으로 마음을 다하여 한 영혼을 섬기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한 예배자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