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몬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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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11월 13일 주일 청년부
제목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본문 : 빌레몬서 1장 4-7절 *신351
결단찬양 : 예수 우리들의 밝은 빛
[도입]
오늘도 우리는 이 빌레몬서를 참 맛있게 먹어보려고 합니다. 저번 주의 내용을 살짝 복기해보자면, 먼저 빌레몬서는 옥중서신이며, 요한이삼서를 제외하곤 가장 짧은 성경, 즉 바울서신 중에서는 가장 짧은 성경이라는 것과 또 바울답지 않게 지극히 개인적 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강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이 평강이란 단순히 척,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전쟁과 분쟁 뒤에 오는 연합이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인사도, 끊없는 조롱과 핍박이 있었기에 더욱 절실한 인사였지 않았을까 합니다. 저는 이 평강이 우리의 삶 가운데에 끊임없이 주어지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수신자 1. 빌레몬]
오늘은 우리가 수신자를 함께 나누며 시작하고자 합니다. 저번주, 이 빌레몬서의 수신인은 총 몇 명이었습니까? 무려 3명이 이 개인적인 서신서를 받아보게 됩니다. 먼저 빌레몬입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애정 있는 사람’ 또는 ‘사랑의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약 요한이 알았더라면, 정말 선호했을지도 모르는 이름입니다.
빌레몬 역시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와 자료는 없지만, 19절을 근거로 아마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게 되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라고 언급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빌레몬이 거주했던 골로새 지역의 교회가 어떤 경우로 생겼는가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사도행전 19장 9절과 10절,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에베소에서 약 3년간 복음을 전할 때, 주변 국가에 거주했던 빌레몬이 에베소를 방문했다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빚진 자가 되었다 추측에 근거를 더해보고자 합니다.
어찌되었든 사도 바울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 보자면, 빌레몬 그는 사도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영적 아들이나 다를 바 없는 셈이었던 것이지요.
빌레몬, 그의 이름은 ‘사랑의 사람’ 입니다. 그런 그를 향해 사도 바울이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1절을 보니,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라 말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가 특별히 빌레몬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들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또한 빌레몬을 사랑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에는 조금 더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빌레몬의 이름의 뜻에도 ‘사랑’이, 그리고 그를 부를 때에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감은, 앞으로 오네시모를 향한 용서를 구함에 있어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기에 전략적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를 ‘동역자’ 라고 칭합니다. ‘쉰에르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같이 일하는 사람’ 또는 ‘같은 목적을 갖고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손을 잡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 이라는 의미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사도 바울이나 디모데같은 목회적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분명 같은 목적, 같이 일하는 사람이긴 했으나 그는 목회자도 또 골로새 교회의 교역자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그저 집사 또는 장로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교회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출석 성도의 10%가 섬기게 되면 매끄럽게 움직여 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청년부는 90%가 섬김이 아닌, 90%가 섬기고 있으니 너무나 건강한 사람들이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정말 여러분들의 마음을 잘 어루 만지셨고, 또 이끄셨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하튼, 빌레몬도 저보다는 여러분들과 같은 직책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의 집은 꽤나 부유했던 모양입니다.
우선 노예를 다루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재산이 있어야 했고, 그걸로 그치지 않습니다. 22절을 보니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 방문했을 때, 그를 재워주고 먹여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수신자 2. 자매 압비아]
두번째는 자매 압비아입니다. 지극히 개인적 서신이지만, 빌레몬에게만 조용히 쓴 것은 아닙니다. 자매 압비아와 아킵보를 향해서도 함께 서신을 보내게 됩니다. 그럼 압비아는 누구일까요?
바로 빌레몬의 아내입니다. 개인적인 서신이나 가정에 이 사실을 함께 알리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빌레몬이 아내와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또 혼자 고민하면 더 막힌 마음과 결단을 할 것인데, 이를 유하게 하고자 조금 더 고민할 수 있게 하고자 했던 전략적 선택일 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사도 바울은 빌레몬의 아내 압비아를 향해 ‘자매’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압비아의 촌수를 잘 모르거나, 애매모호해서 부르는 호칭은 아닙니다. 이를 의심할 것이었다면, 우리는 1절부터 의심을 해야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후서를 통해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 불렀는데, 여기서는 ‘형제’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즉 압비아에게 ‘자매’라는 호칭을 쓴 것은, 남녀노소 모두가 주 안에서 차별없는 형제요 자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우리를 ‘형제’라 부름을 히브리서 2장 11절을 보니,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형제라 부름에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한 근원에서 낫기에 우리는 한 형제요, 한 자매라 당당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평강이라는 단어만큼 형제, 자매라는 호칭도 조금은 거리감이 있어보이기는 하나, 그만큼 매력적이고 또 하나된 공동체임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단어라 생각하게 됩니다.
여하튼, 압비아에 대해서 많은 정보가 없지만, 사도 바울은 그녀를 자매라 부르며, 주 안에서 함께 성장한 신앙 공동체 한 성도였음을 알게끔 합니다.
[수신자 3. 아킵보]
아킵보는 누구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를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라 말합니다. 그는 빌레몬과 압비아 사이에서 나온 아들입니다. 그런 그를 향해 ‘병사’라 칭합니다.
바울보다 1세기 전에 살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수 많은 전투 현장에서 함께 목숨을 걸었던 병사들 앞에서 ‘동료 전우 여러분’ 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고 합니다. 육적으로 지쳐갈 때 대장이 병사들에게 이런 말 한 번 해준다면, 그 위로와 격려가 상당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이 말 한 마디에도 병사들의 심금을 울렸고, 또 그들이 다시 힘을 내 싸워 이길 수 있는데 원동력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습니다. 카이사르처럼 칼을 들고 싸우는 전투 현장은 아니었지만, 이미 바울서신서를 볼 때 우리는 그의 태도가 소극적인 태도이기보단 전투적 태도임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도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등 군사적 용어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카이사르와는 전투의 형태가 조금 다르나 사도 바울 또한 충분히 전투 현황 속에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아킵보를 향해서도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라 부르며, 그가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싸우는 용사로 본 것이지요.
골로새서 4장 17절을 보면,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많은 성경해석자들이 그는 골로새에서 가까운 라오디게아 교회를 섬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골로새나 라오디게아 교회나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이단들의 침투와 접근이 컸기에 목회의 길을 걸었던 아킵보가 지쳐있을 가능성이 컸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향해 사도 바울은 위로와 격려차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라 부른 것이지요. 사역 기간이 짧은 아킵보를 향해, 위대한 믿음의 선배인 사도 바울이 그리 불러준다면 얼마나 큰 위로고 힘이 되겠습니까?
여하튼, 빌레몬도 압비아도 또 아킵보도 모두가 믿음 안에서 하나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만 택하기 보다 압비아와 아킵보를 언급하며 모두가 함께 앞으로 나올 주제에 대해 의논하고 대비할 수 있기를, 어쩌면 함께 나눌 때 마음이 더 유해지기에 바울이 택한 전략적 방법이었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로 기도하라]
이제 우리는 이들을 향해 사도 바울이 어떤 말을 했는가 하나 하나 보고자 합니다. 먼저 4절 함께 봅시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사도 바울, 얼마나 바쁜 삶을 삽니까? 복음 전하다 죽을 뻔하기도 하고, 또 실제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참 바쁩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보내준 기도제목과 또 들은 제목들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는데, 오히려 더 축복하게 됩니다. 이런 기도까진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왕 기도하는 것, 더 큰 은혜와 축복이 이들 가운데 거하길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더 했을 것입니다. 빌레몬과 그의 가정을 위해 더 큰 축복과 은혜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허락하시고 또 배푸시며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감사 또 감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 예수 안에서 기도하라]
5절입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사도 바울이 그를 위해 기도할 수 밖에 없음은 그가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과 ‘믿음’이 충만하다는 소식을 이미 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적 관점에서도 사랑과 믿음을 추구하고 또 이를 충만하다 할 수 있는 자들이 분명 있지만,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보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며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는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이며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이 오셨으며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수단은 그리스도와 그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란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것은 나의 모든 소망을 그리스도께 의탁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가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에 모든 기대를 거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주 예수를 믿는 것은 나는 내 자신의 삶을 신뢰하지 않으며 내 자신의 행동도 전혀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안’이라는 표현보다 ‘주 예수 안’이라는 표현을 즐겨쓰며, 신격과 인격 모두를 지니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며, 사도 바울이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에 확고한 선포함이 있었습니다.
[사랑과 믿음, 평안과 기쁨과 위로를 준 빌레몬]
디도서 3장 3절에 의하면 우리는 본래 악을 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할래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사랑을 곧 잘 실천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7절을 보니,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그는 곧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믿음과 평안과 기쁨과 위로를 주던 자였습니다. 우리 공동체 가운데 하나만 뚜렷히 보여도 저는 아름답다 고백했을 것인데, 빌레몬은 하나에 만족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꽤나 여러가지 모양으로 믿음의 동역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빌레몬의 모습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이라면 백 번이고, 만 번이고 칭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도 이런 청년 공동체, 또 각각 한 사람 되길 소망합니다. 주님 주신 말씀 잘 붙들고 걸어가 주님께 칭찬 받는 자 되길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주 예수를 바로 알아 기도하기에 힘쓰며, 또 행실 또한 주 예수를 닮아 빌레몬처럼 칭찬 받기에 합당한 자가 여러분 모두 되길 소망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고래가 IQ가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래를 훈육할 때 칭찬을 자주 해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도 아닌 포유류에 칭찬을 해도 기뻐 춤을 추는데, 우리 안에 칭찬이 오고간다면 이보다 더 한 것, 즉 복음이 흘러가지 않겠습니까?
우리 그런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서로 세우고 칭찬하며 걸어가는 그리고 함께 기도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런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1) 주 예수를 바로 알아 날마다 기도하기에 힘쓰게 하소서
2) 칭찬을 비롯한 위로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청년 공동체 되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변치않으시는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하심이
이 자리에 모여 날마다 기도하기에 힘쓰며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하며 함께 세워져 가는 청년들과 이 공동체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