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지만 확실한 것

인생질문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25 views

1. 우리가 보여야 하는 반응 2. 불가능 & 합리적 3. 부활의 가능성을 보지 못한 이들 4. 최초의 목격자는?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A
D
F
J
S
Emotion
A
C
T
Language
O
C
E
A
E
Social
View more →

우리가 보여야 하는 반응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에요. 한해의 삶을 돌아보며 감사해야 하는 날이에요. 그런데 본문은 감사가 아닌 부활이죠. 굉장히 쌩뚱 맞아 보일 수 있다 생각해요. 지혁이도 추수감사절에 부활 본문 신선하다고 했거든요.
감사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며 고민하던 중 이 본문이 강렬하게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리고 묵상을 하면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렸던 진짜 감사를 회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에 실제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해요.
지난 주 우리는 내용물이 바뀐 혼인잔치 그리고 우리의 내용물도 계속해서 바꾸어 가고 계시는 성령님을 나누었죠.
한주 어떻게 지냈나요.
여러분의 내용물을 끊임없이 정화하고 바꾸고 계셨던 그 성령님을 만났나요?
느꼈나요?
아니 여러분의 내용물을 바꾸고 계심을 정말 믿나요?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우리의 믿음은 불가능과 합리적인 것 두가지 모두를 다 포함하고 있어요.
믿음은 불가능과 합리적인 것 두가지 모두를 다 포함한다. 굉장히 어색한 문장이죠.
불가능부터 알아볼까요?
솔직히 여러분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과 내용물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 눈으로 본 적 없잖아요. 그리고 정말 바뀌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때도 있을거에요.
이건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당연한거에요.
우리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하는, 그리고 뭔가 입증이 되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죠.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 그리고 내면의 변화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에요.
불가능한 일이죠.
입증할 수 없으니까요.
여러분 스스로에게 지금 이렇게 질문해 보세요.
“나는 보이지 않는 것, 입증 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창조, 타락 그리고 구원의 이야기를 나는 어떻게 믿고 신뢰하게 되었을까?”
(쉬고)
어 답이 나오나요? 왜 여러분은 이 성경의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드리고 믿고 신뢰하게 되었나요?
(쉬고)
믿음을 어떻게 갖게 되었나요? 아니 어떻게 믿음이라는 것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쉬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 그 신뢰. 신앙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망가져버린 영적 감수성으로는 절대 ‘유일한 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질 수 없어요.’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세요.
이단에 빠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무신론자들도 있을거에요.
각기 다른 신들을 향한 믿음을 가진 이유무엇인가를 붙잡고 의지하고 싶기 때문이겠죠.
그러다 마음에 드는 신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신론자가 되기도 했을 것이구요.
여러분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과 내용물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 자체가 원래 불가능 한 일이에요.
저와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이 ‘믿음'이라는 것은 외부의 개입 혹은 초월적인 어떠한 존재의 도움 없이 불가능해요.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보이지 않고 영원한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품으며 살아갈 수 있겠어요.
우리 힘으로 믿음을 얻고 간직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의 영역이에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이성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거든요.
하지만 굉장히 이성적이에요. 다른 말로 합리적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의 길 그리고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 기록들이 다 여기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이에요.
보지 못한 것, 구전되어 내려오는 것을 그저 머리로만 믿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누군가의 뇌피셜로 적혀진 내용을 우리가 계속해서 세뇌되듯이 외우고 읽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에요.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믿음은 너무나도 확실한 증거들로부터 시작이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합리적이에요.
완전히 망가져서 감지조차 할 수 없는 영적 감수성무엇인가를 느끼고 받아드렸다는 것은, 초월적인 어떤 존재의 개입 혹은 도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불가능한 것이에요.

불가능 & 합리적

다음은 믿음은 합리적이다에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더 단단해지고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거든요.
우리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불가능을 합리적으로 받아드리 는 과정을 동시에 겪었어요. 그러면서 그들도 예수님이 정말 메시야라는 사실. 나를 위해 죽었다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을 받아드리는 과정을 가졌어요.
예수님은 살아계시는 동안 자신의 부활에 대해 늘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제자들이 그걸 믿지 않았어요. 불가능하잖아요. 어떻게 사람이 살아나겠어요. 부활이라는 기적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어요.
당시 헬라인들은 육체를 포함한 모든 세상의 물질들을 약하며 악의 근원이라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정신을 강함. 선의 근원으로 생각을 했어요.
죽어서 약하고 더럽고 악의 근원인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 것진정한 인간의 구원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다보니 몸의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악한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니까요.
유대인들은 헬라인들과 다르게 물질 세계 자체를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이라 여겼어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육체는 악하지 않다. 하지만 신이 한 개인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는 것을 믿지 않았어요. 믿을 수 없었다는 말이 맞을거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들의 사고체계로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고, 그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세주이다. 이게 성립이 되지 않았어요.
정신 나간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 여겼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도 감히 바라거나 기대조차 하지 못한거에요.
그들의 사고를 넘어서는 영역이 바로 부활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요. 예수님 곁에서 살아갔던 제자들과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는데요. 예수님을 죽였던 적들은 부활을 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라고 병사들을 보내 경비를 서게 해요.
세상은 알고 있었던 거에요.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 무덤 앞에 경비병을 세우고 부활을 숨기려고 했던 것이죠.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어요.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왔어요. 그리고 충격을 받아요.
무덤을 덮고 있던 돌이 옮겨져있었거든요. 자신보다 먼저 이 곳에 온 사람은 없어요.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변수들이 몇가지 있죠.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하지 않은 누군가가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갔다.
제자들이 먼저 와서 돌문을 열고 예수님의 시신을 보고 있다.
누군가가 훔쳐 갔다.
마리아는 여러 변수들 중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를 생각했던 것 같아요.
동굴 안을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돌아 달려 시몬 베드로와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를 불러왔어요. 그들은 무덤 앞에 도착을 했고, 베드로만 먼저 들어가서 세마포를 봤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머리를 싼 수건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요.
여기에서 정말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면,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고 수많은 표적을 보았던 그들이라면, 또 예수님을 통해 능력을 받고 그것을 직접 행했던 사람들이 맞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라는 말이 먼저 나왔어야 해요.
그런데 그들은 부활을 믿지 못했어요. 아니 부활이라는 단어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1세기 모든 유대인들은 “부활은 불가능해. 아무리 그 분이라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수 없어!” 라고 말하고 생각했어요.
영적으로 눈이 멀어 버렸거든요. 세상은 그 분의 부활을 믿고 경비병을 세웠는데, 정작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지 못했어요.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몇 년동안 충분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볼 수 없었어요.’
왜요? 영적으로 눈이 멀어버렸거든요.
죽어버린 영적 감수성을 깨워서 은혜를 붓다 못해 쏟아내고 계셨던 예수님이 옆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었어요.
부활이 그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고 유익도 되지 못했어요.
우리는 어떤가요?
저와 여러분의 영적인 시선은 어디를 향해 있나요?
우리의 영적 감수성은 괜찮은가요?
부활.
그분의 살아나심.
우리를 구원해주심!
이것이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그것이 여러분의 감사의 제목이 되고 있나요?

최초의 목격자는 누구인가?

빈 무덤을 최초로 본 사람이 누구라고 했죠? 막달라 마리아죠?
성경은 분명 막달라 마리아가 보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최초로 본 사람이라는 이 기록은 정말 세상 중요한 포인트에요.
당시 여성의 지위는 유대 법정이나 로마 법정에서 증언할 자격이 없었어요.
가부장적 문화에서 여자의 증언은 어떤 신빙성도 갖지 못했어요.
100% 확실한 말을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진짜라고 받아드리지 않았어요.
여성이라는 이유 만으로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요.
요한이 몰랐을까요? 왜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가 최초 목격자이다"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쉬고)
진짜이기 때문이에요.
부활이 실제 사건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일어난 일이고, 부활하신 분을 틀림없이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이기 때문이에요.
기독교. 혹은 종교 운동을 선전하려고 널리 퍼트리려고 부활기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에요.
없었던 사건을 있었던 것으로 꾸며내려 했으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두가 다 부활의 첫 목격자가 여성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거에요.
틀림없이 일어난, 실제 사건이기 때문에 기록한거에요.
이제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가 어떻게 불가능과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믿음을 갖고 부활을 신뢰하게 되었는지 같이 살펴볼게요.
베드로가 빈 무덤에 뛰어 들어가요. 그리고 성질 급한 그 답지 않게 이성을 유지하며 동굴 안 을 살펴 봐요.
성경은 베드로가 “보니"라고 말하고 있어요. ‘보니'는 ‘블레포'라는 헬라어 단어인데 그 뜻은 심사숙고하여 소화하 다.에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들어가서 원래 성격대로 “예수님 어디있어!!”하면서 다급하게 두리번 거린게 아니라는거에요.
들어가서 찬찬히 둘러보았어요.
첫째,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었던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들고 갔다면 수의를 입힌채로 가져 갔을 것이다.
굳이 냄새나는 시체를 둘러 쌓고 있던 수의를 벗긴체 맨 몸의 시체를 가져가진 않았을 것이다.
둘째, 적들이 가져간 것이라면 수의를 벗겨 가지런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찢어서 훼손을 시켰거나 그대로 들고 갔을 것이다.
베드로가 보니 수의가 찢겨진 흔적도 없고, 둘러싼 세마포가 잘 놓여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머리를 쌌던 수건도 잘 놓여 있었던 거에요.
모든 정황을 심사숙고 해서 보면서 이 사건을 지금 소화시키고 있어요.
그리고 베드로는 “부활 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부활 하셨을 수도 있겠다. 가능하다.”로 바뀌기 시작해요.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을 통해 세계관이 깨어지면서 새로운 것을 보게 된 것이죠.
베드로와 달리 막달라 마리아는 밖에 서서 울고 있었어요. 그 때 누군가가 나타나요.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요.
“마리아야!”
이 부르심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요나를 부르셨을 때와 똑같은 부르심이에요.
“아담과 하와야! 네가 어디 있느냐? 누가 너의 헐거벗음을 알려주었느냐?”
“요나야! 네가 나에게 화내는 것이 옳으냐?”
아담과 하와 그리고 요나를 부르셨던 목적은 그들을 혼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전적이 은혜를 통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였어요.
15절.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정신을 놓고 울고 있던 그녀가 정신을 차리도록 하시는 부르심이에요. 그런데 마리아가 그토록 바라고 보고 싶어하던 예수님이 앞에서 자신을 부르는데도 눈치채지 못해요. “동산 관리인"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마리아는 눈 앞에 그 분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자신의 ‘시선'으로 예수님을 찾고 있었던 거에요.
부활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있으니까 앞에 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죠.
그런 그녀를 한번 더 부르세요.
“마리아야!”
두 번째 부름에 마리아는 깨달아요. 양들이 음성을 알고 구분하는 것처럼 그분이 내가 찾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녀를 찾아오신거에요.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죠.
베드로는 동굴 안에서 심사숙고하여 바라보고 상황을 소화시키면서
부활을 그의 방법대로 받아드리며 믿음을 갖게 되었어요.
그의 세계관이 깨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정말 메시야다라는 것이, 은혜로 깨달아졌기 때문이에요.
마리아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셨어요. 그녀의 삶에 개입하셨어요. 인격적으로 만나주셨어요.
그래서 알아보지 못했던 그녀가 곁에 서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부활이 실제 사건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어요.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아내고 있나요? 어떤 모습으로 지난 1년을 살아왔나요?
양육 프로그램 중 하나인 북쉐어링 시간에 나누었던 이야기 중 하나에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들은 하나님 나라에 기록이 되고 있어요.
흔적으로 남고 있어요.
언젠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곳에 임하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했던 모든 일들이 다 흔적이 되어 드러날거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던 순간과 모습 그리고 행동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거죠.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2022년을 살아왔나요? 그 분과 함께 동행하는 1년을 보내셨나요?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어요.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알았어요.
이름이 불리는 순간 “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다!” 라는 그 정체성을 깨닫고 회복하게 되었어요.
믿음은 온전히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그분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데, 우리는 그 분을 믿고 있어요. 그리고 그분과 지금 이 순간도 함께 살아가고 있구요.
우리의 믿음이 불가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을 받아드렸다면 우리가 이번 한주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것이 있어요.
지난 주를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믿기 전 후로 바뀐 여러분의 삶과 생각 그리고 행동 등을 각자 메모해 보았나요?
믿기 전후의 나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예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될 것”이라 나누었고, 또 그 맛이 저와 여러분을 더 깊이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도 이야기 했었죠.
메모하고 돌아봄으로 그 맛을 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그 맛을 음미하고 느끼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해야 해요.
저와 여러분의 믿음 그리고 그 대상은 동일해요. 한 분 하나님이에요. 하지만 그 믿음을 갖게 한 것은 상대적인 경험에 의해서에요.
각자의 삶에서 만나 경험한 예수님이 상대적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것이 과거로 남지 않도록 하겠다! 라고 결단하는 것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해요.
지나간 은혜에만 만족하며 살지 않아야 해요.
한 해를 지켜주신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매일의 삶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며 주실 “오늘의 은혜"에 우리는 집중 해야 해요.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서 이름을 부르셨어요. 이름을 부름으로 마리아의 정체성을 세워주셨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셔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매일의 삶 속에서 나와 동행하고 계셔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것이 과거로 남지 않도록 하겠다! 라고 결단하고 동시에 “오늘의 은혜에 만족하며 감사할 줄 아는 내가 되겠다!”라고 선포해야 해요.
이번 한주를 살아갈 때 아침 저녁으로 이렇게 고백 선포해보세요.
아침에는 “오늘을 살아갈 힘과 은혜를 나에게 주십시오"
잠자리에 들 때에는 “오늘의 은혜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불가능한 믿음을 주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함을 표현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