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부활을 보여주는 성도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드러내는 성도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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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서 나타난 기적중에 가장 큰 예수님의 기적을 뽑으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의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시는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표적이라는 것은 요한복음 안에서 단순히 어떤 기적을 체험 시켜 주시기 위해서 보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시며, 우리의 삶에 무엇을 계획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잠시 예루살렘을 떠난 자리에서 친밀한 관계가운데 있던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의 형제 나사로의 긴급한 요청을 받으셨습니다.
이 두 자매들은 형제 나사로가 중병에 갈려지 사람을 보내어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3절에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이렇게 간구를 하는 것입니다.
이 요청을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께 조심스럽게 요청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갈등이 있었고 심지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시도하는 상황까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10:31-32)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금 벗어나 있는데, 다시 예루살렘 근처로 오시게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마가 16절에서 보면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정말로 그곳으로 가는 것이 예수님에게 위험한 일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생명에 대한 희망을 걸었습니다. 아마도 이때까지는 나사로가 병들어 있던 상태이고 죽은 상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것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음에도 불구하고 6절에서 그곳에 이틀을 더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사로를 향하여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자리에 그냥 계십니다.
차라리 5절에서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그 동생 나사로를 사랑하셨다는 표현이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다고 말하고 난뒤에 예수님의 행동은 전혀 그들을 사랑하는 모습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21절에서 마르다가 예수님을 보고 난 후에 통곡하며 말하는 장면은 우리가 이해가 되는 것이지요...
마리아와 마르다는 분명 나사로가 아직 죽지 않았을때에 예수님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셨더라면 나사로가 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지체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일어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그렇게 질병에 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 나사로가 무덤에 있는지 이미 나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2틀을 원래 있던 지역에 더 유하시고 오셨을 때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지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지역까지 오신 거리가 이틀정도 되는 거리라고 생각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출발 하셨다 하더라도 나사로가 죽은 뒤에 도착하셨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그럼에도 왜 예수님은 지체하였는가? 하는것이죠… 특히 4절에서처럼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한다! 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이 지체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영광을 받으시는가 하는것입니다.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마치 우리가 기도에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아니하시고, 이 세상의 불의함에도 침묵하시는 것 같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하지만 왜 불의함과 범죄와 아픔과 재앙들을 내버려 두시는가?? 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과 같이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지체하시는 모습은 정말 나사로를 사랑하시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사로의 죽음은 15절에서 처럼 “기뻐하는 죽음이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을 믿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2틀을 유하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고, 때가되어 나사로에게 가십니다.
어쨋든 마리아와 마르다는 가슴이 아플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서두르셨다면, 예수님께서 뭔가 액션을 취하셨다면… 그러한 서운함이겠지요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서운한 마음을 토로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그리고 22절에서 마르다가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니이다”라고 고백을 하는것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임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실 때에 마르다는 그저 종말때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가 39절에서도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의 돌을 옮기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어쨋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5절에서 더 놀라운 말을 하시는데…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다!! 다시말하면 예수그리스도 그 자체가 부활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있다면 죽음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은 항상 그랬습니다. 죽은것을 살리는 사역이었습니다. 잔치 자리에서 쓸모 없던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으로 그것이 그 잔치안에서 정말 필요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을 보여 주시기도 합니다. 눈먼자를 보게 하시기도 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은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은 죽음이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죽음이 역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생명만 있습니다.
그 생명으로 가득찬 예수님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음 가운데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33절에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사로가 자신의 생명가운데 거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비통해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막지 못한 예수님을 보면서 말합니다.
37절이지요.. 그가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더냐?? 조롱이지요… 예수님은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악도, 이 세상의 억울한 죽음도 막지 못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상대하시지 않습니다.. 왜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슬프시거든요..
너무나 슬픈 마음과 비통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무덤 앞으로 걸어가십니다.. 38절에서 무덤에 가시니 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데요… 그런데 이것이 “수동태입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님께서 그 감정에 휩싸여서 무덤앞으로 끌려 가시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나사로에 대한 슬픔과 (엠브리마오마이) - 비통 —> 분노입니다.. 분노하는 마음으로 가십니다.. 누구에게 분노하십니까?? 죽음에게 분노하십니다.. 그 사망에게 분노하십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들을 끌고 가는 그 사망의 권세에게 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은 디모데전서2:4 말씀과 같이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4 NKRV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덤 앞으로 다가가시는 장면은 죽음과 싸우러 나아가는 장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명하십니다 . 43절 : 나사로야 나오라!! 이것은 죽음에 대한 선포이기도 한 것이죠. 완전한 죽음 가운데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 하나님의 응답으로 죽음의 권세가 실패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누구신가 하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 성경은 쾌락을 쫓는 사람들에게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딤전5:6)
생명이 무엇입니까?
저는 요즘 죽음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정말 사람의 순간이 너무나 허망하게 끝날 수 있구나… 그러면 그렇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삶이 일시적이고, 잠깐의 삶일 뿐 아니라 언제든 이 땅에서 사라질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떤 이들은 그 남은 생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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