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 안에 욕망을 숨기는 악인들

사무엘하 강해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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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 한 이들이 어떤 일을 겪게 되는 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본문을 통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대하는지 깨닫고 은혜받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1- 악인은 하나님 이름 뒤에 욕망을 감추는 사람이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악인은 하나님 이름 뒤에 욕망을 감추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은 북쪽 이스라엘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지금처럼 언론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팩트체크가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는 정보는 아브넬이 다윗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갔는데, 거기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북쪽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을 생각이 없고 사울의 혈통을 계승한 이스보셋 정권에 대해 굉장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브넬을 살해한 것은 요압이고 그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자세한 것을 알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윗 곁에 있는 백성들도 다윗이 금식을 하고 애통하고 하니까 겨우 겨우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까? 저기 마하나임 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이 애통한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윗의 지시로 아브넬이 살해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1절에서 말한 것처럼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손의 맥이 풀렸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이 상황에 어떤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아나라는 사람과 레갑이라는 사람입니다. 이사람들은 이스보셋의 신임을 받는 군지휘관이었습니다. 2절 말미에 브에롯도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브에롯도 베냐민 지파로 간주되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브에롯이 어디입니까? 브에롯은 여호수아서 9장 17절에 나오는데, 여호수아를 속이고 이스라엘 군대와 평화조약을 맺은 이들입니다. 가나안 정복 시절에 가나안 족속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했을 때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로 편입된 이방민족이 바로 브에롯입니다. 사무엘하 21장 2절과 5절을 보 시면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 정권 치하에 있을 때 탄압 받았던 사실을 언급한 것이 있습니다. 아마 베냐민 지파에 가나안 정복기 시절에 편입된 이방인들을 싫어해서 사울이 이들을 탄압한 것 같습니다. 브에롯은 기브온에 속했는데 이 일로 인해 기브온 사람들이 다윗에게 사울의 자녀들을 달라고 요구하고 그들을 처형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바아나와 레갑은 이런 배경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민족적, 역사적인 배경은 왜 바아나와 레갑이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이렇게 쉽게 배신하고 죽일 수 있었는지 설명합니다. 이스보셋이 죽는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4절에 요나단의 아들, 그러니까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과 요나단이 전쟁에서 죽을 때 도망하다가 떨어져서 다섯 살 때부터 절름발이로 사는 사람입니다. 고대에 왕은 제사장과 비슷하게 몸의 결함이 있거나 흠이 있으면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므비보셋이 절름발이인 것을 언급한 것은 이제 이스보셋이 만약 왕이 안되면 이제 왕이 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을 죽이면 더 이상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 땅에는 왕이 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을 죽여 다윗정권에 투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을 때 난제가 하나 있는데 5절과 6절에 보시면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고 있는데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을 찌르고 도망갔다가 다시 7절에 침상에 누운 이스보셋을 쳐죽이고 목을 베어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마 동일한 사건을 다양한 각도에서 기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6절에서는 레갑과 바아나가 어떻게 이스보셋의 처소에 들어갔는지 설명합니다. 밀을 갖다주는 사람으로 위장을 해서 처소에 들어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절은 어떻게 죽였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를 쳐 죽이고 목을 베었습니다.
바아나와 레갑이 밤새 아라바로 건너가 다윗에게로 갑니다. 다윗에게 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입니다. 8절에 보시면 “왕의 생명을 해하려 했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을 죽인 동기는 다윗이 북쪽 지역으로 건너가 그들을 죽일까봐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이스보셋을 먼저 죽여서 다윗 정권에 투신하여 보상을 받기 위해서 다윗 앞에 섰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도 아니고 다윗을 생각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동기는 보상입니다. 10절에 다윗이 이전에 사울을 죽였다고 거짓말한 아말렉 사람을 언급합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성경은 내가 그를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reward라는 말이 나옵니다. 보상이라는 뜻입니다. 새번역 성경도 보상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바아나와 레갑의 의도를 간파했습니다. 바아나와 레갑은 다윗을 생각해서 이스보셋을 죽인 것이 아니라 다윗 정권에 투신하여 보상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이스보셋을 죽였습니다. 심지어 이것이 여호와께서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다고 까지 하면서 이스보셋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특징입니다. 그냥 자기가 나쁜 짓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당신에게 좋은 대로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하면서 은근히 자신에게 이익을 줄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에게도 혹시 이런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말로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한다고 하면서 당신을 위해서 내가 이렇게 합니다. 하지만 은근히 나의 이익을 위해서움직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오히려 더 큰 폭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차라리 내가 이렇게 하고 싶다라고 하면 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가져오고 너의 유익을 위해서라고 다른 사람의 핑계를 대면서 더 과감하게 더 잘못된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폭력을 위해 나의 이익의 방도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중세에 십자군 원정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유대인 팔다리를 묶어서 강제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것 때문에 지금도 유럽인들을 싫어합니다. 회복이라는 영화를 보면 유대인들이 유럽사람들을 막 저주하고 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이 더 많은 피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나의 욕망을 감추는 도구로 쓰는 순간 더 큰 폭력과 더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욕망을 어떤 방식으로 포장해서 표출하는지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나의 욕망을 하나님의 이름 안에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에게 큰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성경과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2-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수단으로 쓰는 이를 심판하신다.
(설명) 그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수단으로 쓰는 이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이 욕망의 수단, 폭력의 수단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오로지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예배를 받으실 이름이지 이용당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다윗은 11절에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12절에 다윗 곁에 있던 부하에게 명하여 바아나와 레갑을 죽입니다.
11절에 다윗이 언급하는 의인은 이스보셋을 말하는데 인간의 욕심으로 하나님의 뜻도 아닌데 왕위에 올라간 이스보셋을 의인이라고 하기엔 어색합니다. 문맥상 무고한 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이해가 쉽겠습니다. 다윗은 자다가 죽은 이스보셋이 무고한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아나와 레갑은 무고한 이를 죽인 악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무고한 자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두고 보시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이름이 개인의 욕망을 포장하는 수단이 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바아나와 레갑을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입니까? 9절에 보시면 다윗이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이 맹세를 하며 바아나와 레갑의 죗값을 치르도록 합니다. 다윗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악인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12절에 보시면 청년들을 명하여 그를 죽이는데, 수족을 베어서 헤브론 못가에 매달았다고 나옵니다. 고대사회에서 시신이 매장되지 못하는 것은 심판이고 치욕이었습니다. 시체가 매장되지 않고 버려져서 들짐승에게 먹히는 것은 성경에서도 굉장히 큰 저주로 규정됩니다. 조상들의 묘에 묻히는 것이 명예로운 죽음이고 일반적인 죽음입니다. 이집트 신화에서 세트라는 신이 오시리스를 죽이고 이집트 곳곳에 시신을 뿌리는데 세트가 부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나안 신화에서 바알이 바다의 괴물인 얌을 죽이고 시신을 훼손했는데 부활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시신을 훼손한 것은 언약의 조상들이 들어간 곳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상들과 함께 묻힌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관점에서 이것은 영생을 누리지 못한 것과 연관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폭력을 사용한 이들이 영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가족묘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언약 백성이 아님을 선언했습니다. 교회의 용어로 이들을 언약 바깥으로 출교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복락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을 대리해서 이들을 심판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에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 돌리는 삶을 거부한 이들에게는 구원의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름에 영광 돌리지 못한 이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이용하고 모욕하는 이들은 겉으로는 어떠하든지 교회에 속한 언약백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르반을 주장하면서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라고 선언하면서 부모님을 사랑하는 의무를 저버리는 이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적용)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은 다윗이 구별한 것과 같은 기준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결국 나의 유익을 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 받고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기뻐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참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무시하고 더럽히고 수단으로 삼는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삶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놀림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저거 예수쟁이라고 하고 하나님 핑계 대는데 결국 다 지 좋으라고 지 맘대로 저렇게 산다. 이기적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안됩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안에 자신의 욕망을 감추고 피해주는 것을 정당화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고난 받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생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악인들은 하나님께 심판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 참된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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