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정도(몬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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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2년 11월 20일 주일 청년부
제목 : 사랑의 정도
본문 : 빌레몬서 1장 8-10절 *신351
결단찬양 : 사랑 중에 사랑
[도입]
교회를 좀 다니다보면 굳이 몰라도 되는 사실들이 몇 가지 있는데, 가장 하나를 꼽자면, ‘사랑에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일 겁니다.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라 불리우는 플라톤은 사랑을 네 가지로 정의내렸습니다. 먼저는 에로스(eros) 입니다. 이는 성적인 사랑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이기심으로 뭉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정욕에 의한 사랑을 에로스라 말합니다. 흔히 우리가 하는 사랑을 에로스라 보시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스토르게(storge) 입니다. 이는 부모와 자식 간의 혈육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피를 나눴기에 가질 수 있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로 여러분들은 부모님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제가 부모가 되고나서 느낀 것은,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이쁘다’는 속담이 어느 정도의 사랑인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정말 몸소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를 키우신 부모님 또한 정말 사랑으로 나를 키웠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그걸로 그칩니다. 부모의 사랑을 알았다 하여도 자녀를 향한 사랑만큼 부모를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모님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라고 물어도, 또 너무 너무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해서, ‘그럼 부모를 더욱 사랑하십쇼!’ 라고 외칠 수는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못사는데,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선포하길 하나님을 사랑하듯 부모를 사랑하라 말합니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제가 강요하지 못하더라도, 저와 여러분들이 부모를 사랑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살아갑시다 우리.
세 번째는, 필리아(philia) 입니다. 이는 친구와의 우정입니다. 여러분들이 필리아적 사랑을 하는 친구들은 얼마나 됩니까?
저에게도 귀한 세상적 친구들이 참 많습니다. 확실히 사역을 시작하며 곁에 두고 케어가 안되니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며 참 아쉬운 세상 친구들이 제게는 그런 친구들 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너무 아름다운 단어인데, 요즘들어 이 단어가 동성애적 단어로도 사용된다 합니다. 분명 동성간의 또는 친구간의 우정을 의미하는 너무 좋은 단어였으나, 세상이 너무 타락하여 이제는 이 좋은 단어도 불명예스럽게 바뀌어감을 보게 됩니다.
마지막은 아가페(agape) 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게 지금도 이 자리 가운데 함께 하셔서 주시는 사랑이며, 우리의 삶 가운데 날마다 주고 계시는 변치않는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여러분들은 경험하고 계십니까?
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자신의 학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를 통해, 사랑의 네 단계를 설명하는데, 첫 번째는, ‘자기 유익을 위한 자기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쉽게 정욕으로 변질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자기 유익을 위한 하나님 사랑’인데, 이는 전형적으로 우리가 고난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을 찾는 사람. 다시 말해서, 고난이 올때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자기 사랑’인데, 베르나르는, ‘이런 방식의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의 필요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필요하며, 이런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계속해서 맛본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님이 얼마나 달콤한 분인지 증거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하나님의 달콤함을 맛본 후에는 우리의 필요 때문에 그를 사랑하도록 우리 자신을 강요하기보다는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간다.’고 설명했습니다.
마지막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 사랑’으로, 이런 종류의 사랑은 매우 드물게 발생하며, 그런 일이 일어날 때는 ‘마치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잃어버린다.’고 베르나르는 설명합니다.
베르나르는 처음 사랑의 단계가 미비했지만, 점차 하나님 안에서 그 사랑이 성장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여러분들의 현 사랑 단계는 몇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까?
오늘은 이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를 본문을 통해 풀어보고자 합니다.
[노예 오네시모에서 죄인 오네시모]
지극히 개인적 서신인 이 빌레몬서가 쓰여진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네시모’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저번주 빌레몬과 압비아, 그리고 아킵보에 대해 나누었으니 오늘은 오네시모는 그래서 누구인가에 대해 함께 나눠 봅시다.
그는 본래 골로새 지역에 거주하던 빌레몬의 개인 노예 였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이 어떤 사람입니까? 신앙도 꽤나 괜찮습니다. 물론 요즘 세상에 ‘기독교인’이라 말하면서 도통 제대로된 기독교인을 찾기란 쉽지 않은 세상이라 ‘신앙이 괜찮다’는 이유가 그닥 와닿지 않습니다. 여하튼 빌레몬은 건강한 신앙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빌레몬은 이웃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는 자 입니다. 이게 요즘 소위 세상에서 ‘나도 교회다녀!’ 라고 말하는 자들과 차이점 아니겠습니까? 빌레몬은 건강한 신앙으로 주변인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던 자였습니다.
분명 그는 인격적으로 훌륭하다는 사실에 거짓은 없겠지만, 오네시모는 그런 주인을 배신하고 도망칩니다. 물론 그냥 도망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돈과 또 값이 좀 나갈만한 물건들, 그리고 도망치며 생명을 유지할 약간의 식량들을 챙겨 나갔을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이런 일을 감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예라는 타이틀을 벗어 던지기 위해 죄인의 타이틀을 택하게 됩니다.
그가 그렇게 도망쳐 도착한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바로 로마입니다. 왜 그는 로마로 도망을 갔을까요? 일제 강점기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동경으로, 상해로 갔듯이, 아마 오네시모 또한 동일한 이유로, 즉 한적한 시골보다 사람이 많은 도심 속이 더 찾기 어렵고 숨어 있기에 제격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로마로 도망을 갑니다.
로마에서의 그의 삶을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자료도 정보도 없기에 잘 알 수는 없지만, 많은 학자들이 추측성 글들을 작성했습니다. 그 중 저도 가능성 있다고 보는 가장 유력한 것은 ‘개 버릇 남 못준다’고 로마에서도 도둑질을 하다 붙잡혔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로마, 대도시 로마, 중심부 로마. 당연히 이곳에서의 물가는 어쩌면 골로새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더 많이 들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그러니 자신이 들고온 재산이 생각보다 빨리 소비됨을 느꼈을 것이고, 이에 위기의식을 가진 오네시모가 자신이 시도했다 성공했던, 도둑질을 감행한 것은 아닐까 하고 조금 더 설명을 덧붙여보고자 합니다.
[죄인 오네시모에서 다시 노예 오네시모로]
여하튼 그는 10절에 기록된 것처럼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화려했던 지난 날은 짧디 짧았고, 그 화려함의 결말은 옥에 갇힘이었습니다.
그렇게 갇혀 수감자들과 함께 대화를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빌레몬의 노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로마법 중 도망친 노예를 숨겨 주는 것은 중죄였고, 만약 숨겨주었다 발각이 될 경우 숨겨준 자도 함께 동일한 처벌을 받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함부로 숨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도망친 노예나 죄인을 발견하게 되면 주인에게로 돌려보내거나, 또는 신고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사도 바울이 취해야 하는 제스처는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신고 입니다. 그렇게 그는 펜을 들어 종이에 글을 써내려 갑니다. 그 서신이 바로 빌레몬서인 것이지요.
노예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던 시대. 그 시대에 죄인이라는 타이틀까지 더 얹혀진 오네시모. 그는 갇혔고, 하필 그곳에서 자신의 주인 빌레몬을 아는 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제 그가 돌아가게 되면, 돌아오는 결과는 옥에 갇힌 것보다 더할 것입니다.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네시모의 죽음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10절, “갇힌 중에서 낳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신고가 아닌 간구하는 내용이 담긴 것이 빌레몬서입니다.
[담대하게 명할 수는 있으나]
이제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 살리기’ 작전에 돌입합니다. 이제 바울은 오네시모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려야 합니다.
8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무엇입니까? 사실 오네시모를 살리는 일은 바울에게 있어서 너무 쉬운 일입니다. 자신이 가진 힘을 사용하면 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한 가정의 가출한 자녀를 다시 받아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만큼 아주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한 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성실한 가정에 심방을 가서, 우리 OO이 그래도 사랑스러우시지요? 용서해주시고 함께 손 잡고 다시금 교회로 나오셨으면 너무 좋겠네요. 라고 말한다면, 순종하는 마음에 시도할 것이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도록 한, 새생명을 선물한 사도 바울이기에, 그의 권력과 능력으로 능히 빌레몬의 마음을 회유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빌레몬도 자신이 받은 은혜가 있기에 사도 바울의 말을 거절할만큼의 후안무치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그도 사도 바울의 명령이라면 듣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도, 또 듣고 실천해야 하는 빌레몬도 그 어느 곳 하나 권력과 힘이 사용된 곳은 없었습니다.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빌레몬을 향해 어떤 방법을 활용합니까? 9절입니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그가 택한 방법은 ‘사랑’입니다. 그가 사랑이라는 방법을 택함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1절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여러 사역들, 여러 은사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큰 은사를 사모하라 말하며, 그 은사가 무엇인가, 바로 사도고 선지자고 교사라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전하는 자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어 말하기를, 가장 좋은 길을 보이겠다 말합니다. 그 길이 무엇일까요?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소개되는 ‘사랑’입니다. 즉 사도 바울에게도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사도 바울은 택하여 빌레몬에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미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사랑을 강조 또 강조했습니다. 이미 4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많은 이들의 마음이 빌레몬으로 인해 평안함을 얻었고, 사도 바울 자기 자신도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는 것이 그 내용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너의 사랑으로 나도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진심이 담긴 메세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아 누린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빌레몬을 용서해주길 소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주 예수 안에서 기도하라]
그러면서 9절에 독특한 표현 두 가지를 넣어 빌레몬의 마음 문을 더 열고자 했습니다. 하나는 “나이가 많은 바울” 이라는 표현과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된 이” 라는 것이지요.
뭐지? 꼰대인가? 이 생각이 드는 접근법인 것 같습니다. 근데, 해석을 보면 진짜 꼰대가 맞는 것만 같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빌레몬, 이 친구야 내가 그래도 너보다 나이가 많잔니? 조금 마음을 차분히 먹고 내 편지를 읽어봤으면 좋겠어.’ 정도로 우리가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조금 꼰대같이 해석했지만, 사실 사도 바울의 마음 가운데에 빌레몬이 흥분했을 것 조차 염려하여 차분케 하고자 한게 아닐까 합니다. 나의 뒤통수를 치고 도망간 오네시모의 소식을 들었으니 충분히 화가 치밀어 올라 흥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화가 치밀어 오르면 어떻습니까? 당연히 이성적인 사고판단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부분마저도 차분케 하여 정말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오네시모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자, ‘나이가 많은 바울’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봅니다.
또 옥중에 갇혀 있음은 어떤 의미를 주고자 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왜 감옥에 있습니까? 예수 때문 아닙니까? 예수님을 전하다 감옥에 들어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 예수를 전해 들은 빌레몬 입장에서 바울은 어떻습니까? 너무 짠한 존재 아닙니까? 어떻게든 도와줘야 할 존재 아닙니까?
돕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연민만 있어서는 도움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연민은 ‘불쌍하네~’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사랑이 더해진다면, 이들을 돕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빌레몬에게 있어 받은 사랑, 그것을 실천할 것을, 베풀 것을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 편지한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사도 바울도 충분히 사랑으로 사역했던 자 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빌레몬을 보니 정말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먼저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 아닙니까?
주님의 사랑의 정도가 있다면, 아니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떤 단어로, 어떤 표현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과 빌레몬이 사랑을 주제로 서로 은혜를 나눌 수 있음은 가히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이 이들에게 먼저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랑이 그 날로 끝맺음 하였습니까? 오늘 날 우리를 향해서도 그 사랑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사랑을 받아 누리는 자가 우리들인데, 우리의 삶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답게 살아갑니까? 정말 내게 주어진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며 살아갑니까? 그 사랑이 정말 투영하게 비춰지는 그런 삶 살아가십니까?
바라옵기로는 정말 한 없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우리 모두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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