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19)

느헤미야12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4 views
Notes
Transcript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기억하소서
느13:10-14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기도할 동안에 앉아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다시 오셨을 때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때 성경은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표현한다. 이런 상황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고 옥한음 목사님이 제자훈련을 하는 리더들이 가장 힘든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잘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고, 변화된 것처럼 보였는데 그 영혼이 예전에 삶으로 다시 돌아간 모습을 보였을 때라고 말했다. 정말 공감되는 말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으로 다가서고 있는데, 우리 삶은 어떠한가. 예전으로 돌아가 있는 건 아닌가. 아니면 지금도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뒤따르고 있는가.
우리가 살펴본 느헤미야서를 보면, 하나님은 느헤미야에게 황폐한 예루살렘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주셨고, 왕의 마음을 얻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52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성벽을 재건한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벽만 재건한 것이 아니었다.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자들을 일으켰고, 부자들이 가난한 백성들에게 돈놀이하던 것을 개혁했고, 관행처럼 이어지던 총독 로비를 차단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안에 모든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만들었다. 안식일에 어떻게 하며 하나님 백성의 결혼에 대해 서로 믿음의 약속을 이끌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총독이었다. 페르시아의 신하였다. 그래서 일정한 시간 이후에 페르시아로 돌아가야 했다. 문제는 이때 일어난 것이다. 느헤미야가 다시 총독으로 돌아오기전 2-3년이란 시간 동안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텅빈 성전
10-11절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자본주의사회 어디에서나 나타나고 있는 문제가 부익부빈익빈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런 문제가 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교역자 사례가 천자만별이다. 제가 10년전에 집회를 나가면 사례비를 50-100만원 받았다. 그래서 요즘 전국구로 집회 다니는 형님에게 물어보니까 요즘은 일반적으로 50-100만원이 맞는데, A클라스에 있는 사람들은 년 1억에서 2억정도의 수입이 들어온다고 한다. 얼마전 행신교회 김관성 목사님이 개척을 위해 사임 설교에서 지난 7년 동안 외부에서 받은 사례가 20억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김목사님은 그 돈 거의다를 성도님들이나 어려운 교회에 나누고 지하방에서 계속 생활하셨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교회에서 사례를 받지 못해 직업을 가지는 목회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개척교회나 형편이 어려운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다보니 교회에서 사례는 주지 못하고 목회자 스스로 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단도 이제 이중직을 허락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오히려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수는 있겠다. 목회자도 교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약점은 말씀과 목양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와 보니 레위인들이 다 흩어져 있었다. 그 이유를 보니까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으니까 생활이 어려워서 다 일하러 가버린 것이다. 그러니 영적인 것이 무너져버렸을 것이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5절 말씀을 제가 읽겠다.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악인은 언제나 잘 살아남는다. 악은 지치지도 않고 포기를 모른다. 느헤미야가 있을 때는 때를 기다리다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돌아가자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다. 그가 했던 일은 성전에 방을 잡은 것이다. 우리로 말하자면 이슬람 기도처에 있는 지도자가 우리 예배당에 방을 잡은 것이다. 도비야의 돈과 지연 때문이었다. 십일조와 헌물을 두는 방을 도비야가 차지했다. 이방인도 못들어가는 성전에 도비야가 들어가 있다.
의분을 참지 못한 느헤미야는 도비야의 모든 물건을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그 방을 깨끗이 치워버렸다. 그리고 리더들을 불러 야단을 쳤다. 그들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도비야가 성전에 들어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고, 레위인들이 돌아가면 경고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절을 보면 느헤미야의 개혁으로 다시 십일조와 곳간에 음식이 모였다. 그리고 행정가답게 관리자를 세웠다. 제사장 셀레먀, 사독, 레위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임명하고,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으로 삼았다. 버금은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으뜸’이나 ‘능력자’나 ‘수’라 할 수 있겠다. 아마도 창고지기들을 돕는 역할로 임명한 듯 보인다.
느헤미야는 이 일을 행하고 기도한다. 이 모든 선한 일이 무너지지 않도록 말이다. 하나님이 지키시지 않으면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은보가족 여러분, 헌금을 인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기를 바란다. 영화관에 가면 내는 비용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행위도 있지만, 헌금은 교회 공동체를 돌보는 것이다. 우리가 내 주머니가 아까워서 헌금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도비야가 차지한다. 그러면 영적인 망대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어느 교회에 성도님들이 어느 시점부터 헌금을 잘 안하셨다. 교회가 힘들어지는데, 다른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나온 사람임을 알면서도 헌금 때문에 중직에 받았다. 그런데 성숙하지 못한 이 사람이 교회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는 아싸리판이 되었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으로 이주시켰을 때 총독이 시켰기 때문에 옮겼을까. 그들 중심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성을 지켜낸 것이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한 두 사람에 의해 무너진다. 그래서 아가서에서는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를 잡아라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란 성전에도 도비야나 여우가 뛰어놀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믿음을 넘어뜨리려 한다. 우리에게 작은 여우는 무엇인가. 우리 가정에 작은 여우는 무엇인가. 이것은 말씀 앞에 서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다.
2. 안식일, 느헤미야의 경계
15절 “그 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음식물을 팔기로 그 날에 내가 경계하였고”
우리가 앞에서 10장을 살피면서 첫 열매나 십일조, 결혼과 같은 문제 중심에 돈이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때 느헤미야는 안식일에 장사꾼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도비야나 이스라엘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세력과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문제였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서 다시 돌아와보니 장사하는 세력이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리더들의 잘못이었다. 그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17절 “내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귀인들”은 지체가 높거나 자유로운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아마도 장사하는 사람들과 커넥션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두워지기 전에 성문을 닫고, 아침이 밝아야 성문을 열어야 하는데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장사꾼들을 다 쫓아냈다. 그리고 성문 밑에서 기회를 엿보거나 자는 자들도 잡았다. 그러니까 이들도 도망가 버렸다. 그리고 레위사람들에게 성문을 지키도록 명한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14절에서 도비야를 쫓아내고 성전을 회복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안식일을 회복하고 기도드린다.
22절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안식일을 구별하며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주의 헤세드(긍휼,사랑)로 나를 아껴달라고 구하고 있다. 아마도 그도 하나님의 안아주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기도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31절에서도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로 끝나고 있다. 여기에 이 바라크나 아쉐레이가 아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이나 마음의 행복과 다르다. 여기에 복은 토브다. 하나님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말이다.
다시말해 느헤미야는 이 모든 일 앞에서 자신을 앞세우거나 세상의 위로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한 분만이면 모든 것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만 기억하시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호와 이레에 ‘이레’는 보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본문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숫양을 준비하셨기 때문에 준비의 의미로 읽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숫양을 준비하신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수고하고, 하나님 앞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아시면 다 된 것이 아닌가. 믿음은 늘 개혁하는 것이고 내 삶을 돌이키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주의 선하심을 힘입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원한다.
3. 유다 방언을 못하니
23-24절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그들의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므로”
9-10장에서 이들은 우리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말고 우리 아들들을 위해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말자고 굳게 약속했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온데간데없다. 이들이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이다. 솔로몬도 그러했지만 이런 결혼은 거의 다 실패했다. 인간의 욕심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여인을 아내 삼아 성공한 케이스는 손에 꼽는다. 이 실패에 길을 또다시 걷고 있는 모습을 본 느헤미야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이들에 결혼이 실패한 증거가 뭐냐하면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유다 언어를 몰랐다. 이방언어는 배워도 유다말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왜 큰 문제인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당시 세계 통용어는 아람어였다. 8장에 나오는 수문앞 광장에서 학사 에스라가 두루마리를 펼쳐 말씀을 풀어줄 때 여러 사람이 해석해 주었다. 언어를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의 언어와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신6:4-9절
우리는 우리 자녀를 성경을 가르치는 사명이 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계심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도 인간인지라 다시 말씀 앞에 겸허히 서자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말씀을 양육해야 한다.
친구 목사님 교회를 보니까 코로나 이후에 아이들 신앙이 다 바닥을 기는 것이다. 그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 아그들이 더 귀한 것이다. 우리 아그들 예배 정말 잘 드리거든요. 이번에 성탄전야 축하도 아이들끼리 회의해 보라고 했더니 아이들끼리 정했다.
친구 목사가 내린 진단이 그 교회에 중심이 교제였다. 교제로 모든 것을 이끌어왔는데, 3년이란 시간 동안에 바닥나 버린 것이다. 아이들이 우리 엄마 얼굴 봐서 예배라도 나오는거 감사하라는데 말문이 막히더라는 것이다.
말씀으로 지어지지 않는 집은 비가 오면 무너진다. 말씀이라는 반석위에 집을 짓지 않으면 아름답고 튼튼해 보여도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모래 위에 지었기 때문이다. 저는 우리 교회와 우리 가정이 반석 위에 든든히 서기를 소원한다. 아무리 바람이 불고, 무서운 비가 내려도 끄떡하지 않는 요새와 같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모두 성경언어를 잃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 자녀들도 성경 언어를 잃지 않기를 원한다.
<결론>
느헤미야는 12년의 임기를 마치고 페르시아 왕에게 돌아갔을 때, 한 순간에 이 모든 것이 무너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2-3년 반에 다시 돌아온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다시 이스라엘을 개혁해야 했다.
악은 성실하다. 지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의 말씀 앞에 서서 우리 삶을 개혁해 나가며 주의 몸 된 교회와 내 삶을 하나님이 기억하시며 주의 선하심으로 가득한 삶이 되기를 축복드린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