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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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한 사마리아인
본문: 눅10:25-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
이기적인 시대에 소망이 있는가? (저출산)
사마리아 사람처럼 희생적인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태생이 이기적이다. (젖먹이부터)
예수님은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며, 죽은 자를 살리신다.
예수님의 희생적 모델을 따라야 한다!
(적용)
영생을 얻는 방법
선한 사마리아인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도입)
이기적인 시대에 소망이 있는가? (저출산)
우리는 이기적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시대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가장 잘 드러내는 현상이 저출산 이라고 생각됩니다. 인터넷 인구 통계 자료를 보니 한해 2021년 인구 자연감소가 5만7천명이었는데, 올해는 10만명이 감소할 것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주요 이유는 혼자 사는게 편해서 결혼을 안 하는 비율이 많아지고, 또한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하면 아마 외계인 취급 받을 것입니다. 이대로 가면 국가 뿐만 아니라 교회도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대는 엘레베이터에서 만나는 이웃과도 인사를 잘 안하고 지냅니다. 이웃집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시대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우리의 이기심이 있습니다. 이웃과 사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나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이기심이 이 시대만의 문제인가 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이기심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이기심을 극복하고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은혜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초기대지) 성경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라고 한다!
오늘 본문은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하면서 시작합니다. 눅10 25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해 뭘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직접 답변하시는 대신 다시 질문을 던지십니다. 눅10 26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교사에게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눅10 27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의 핵심을 아주 잘 요약해서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눅10 28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분명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자기 의를 드러내며,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다시 질문합니다. 눅10 29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는 자신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하고 있고, 그걸 통해 영원한 생명,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수준을 끌어내려서 자기 수준으로 율법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인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눅10 30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그런데, 그길로 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섬기며 율법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어려운 이웃을 보고도 모른채하고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사랑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주셨는데도, 무시하고 지나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눅10 33-34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거의 죽은 자를 불쌍히 여겨 그의 상처를 소독해 주고, 싸매줍니다. 그 당시 병원이 따로 없었으니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눅10 35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일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입니다. 오늘로 하자면 한 20만원 정도 될까요? 어쨌든 그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주며 보살펴 줍니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말합니다. 만약 그의 회복이 지체되어 주막에 더 머물게 되면, 그 비용마저 다 갚아주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희생적 사랑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이 요구하는 사랑의 수준은 정말 높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희생적 사랑을 해야 한다고 결론에서 말씀합니다. 눅10:37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중간대지) 우리는 모두 바쁜 현대사회에서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아끼며 살아갑니다. 도무지 남을 돌아볼 틈이 없이 바쁘게 살아갑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무언가를 듣느라 바쁘고, 버스나 지하철, 엘레베이터에서도 핸드폰을 들고 다니면서 주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서울에 갔을 때, 출퇴근시간에 지하철을 타게 되었는데, 제 주위가 온통 핸드폰 화면으로 둘러싸여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서 이시대 문화를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이러하다 보니, 이웃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런 문화속에서 우리는 점점 이웃에 대한 관심을 잃어갑니다. 억울하게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오늘 예화에서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거룩한 예배를 마치고 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거룩한 의무 가운데, 하나님을 가까이 모셨지만, 하나님을 닮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다친 사람의 상태를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갑니다. 눅10:31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우리는 항상 나의 일이 급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이러한 어려운 사람을 만나게 하셨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웃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나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이만큼 자라 났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종교예식을 통해 수없이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누리지 못하고, 종교인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종교의식에서 만족을 누리지만,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분과의 교제의 풍성함을 누리며, 삶에서 그분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일에 무관심합니다. 종교는 예배의식할 때 뿐이고, 일상은 그것과 별개로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아도 될 합리적인 핑계가 많습니다. 종교적 의무에만 집착한 나머지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긍휼한 마음은 품지 못하는 것입니다.
강도가 나타나는 지역에서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려면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데, 그러한 위험을 무릅쓸만한 믿음이 없습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하겠지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빨리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어려움에 빠진 자를 보았지만 도와주라는 양심의 소리를 끝까지 외면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향한 존경과 사랑을 잃고 살때가 많은 것입니다. 이러한 불신앙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말미대지)그런데, 제사장도 레위인도 모두 무시하고 지나가는 상황에서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깁니다. 당시 문화적으로 볼 때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돕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눅9 52-4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원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이러한 적대감을 개의치 않고 그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깁니다. 눅10 34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회복할 수 있는 숙소로 데리고 가서 그를 돌보아 줍니다. 그뿐아니라 눅10 35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당시에는 남의 집에 빚을 지게 되어 갚을 능력이 없게 되면 종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만약 이 주막에서 회복이 늦어지면 그는 그 집에서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종살이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 지겠다고 합니다. 그가 종살이하지 않도록 모든 비용을 대신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헌신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원수로 생각하는 대상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며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자를 회복케 해주고, 종살이할 비참한 형편을 생각하여, 모든 대가를 완전하게 지불해 주는 사랑이 이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 표현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율법교사가 영생을 얻으려면 이와 같은 희생적 사랑을 해야 합니다. 저자 누가는 이 율법교사의 이 후 이야기를 소개하는 대신 자신과 원수된 자들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원수라도 끝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사랑해야 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여 영생을 얻어야 하는데, 우리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을 계속 해서 읽다보면 그러한 희생적 사랑으로, 자기 원수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그들을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분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심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웃사랑을 이루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를 믿고 나오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길만이 우리가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 대한 답변을 통해 이러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눅10 37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웃사랑을 실천해서 영생을 얻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온전한 이웃사랑을 대신 성취해주신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이웃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됨을 제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받은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삶을 모델삼아 기꺼이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능력과 재능을 드려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린 아이가 될 수도 있고,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될 수 있습니다. 동네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일 수도 있고, 몸이 불편한 장애인 형제 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그들의 아픔에 함께 슬퍼하며, 그들의 기쁨에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안에 그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졌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여러가지로 부족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부족한 선행을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것으로 받아 주시며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일 가운데, 얼마든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량에 맞게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순종을 통해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적 삶을 통해 주님을 높이는 복된 길이라 생각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희생적 사랑을 닮아 이웃을 끝까지 사랑하는 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후 찬양: 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