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The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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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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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RV)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구원의 여정을 잘 묘사한 책으로 베스트셀러이자, 유명한 기독교고전인 <천로역정>이 있습니다. 아마 한 번쯤은 읽어 보셨을 텐데요. 서방교회 전통에 <천로역정>이 있었다면, 동방교회에는 요한 클리마쿠스가 쓴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두 책은 기독교 전통 문학의 쌍벽을 이룹니다. 동방교회의 수도사들이나 사제들은 이 책을 일생에 4, 50번 이상 읽게 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좋은 지침서로 삼는 다는 것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 요한은 이 책에서 서른 개 계단의 사다리를 묘사하는데, 예수님의 공생애를 나서시기 전 30년을 상징합니다. 그 첫번째 계단을 보면 ‘삶을 부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세상과의 결별, 세상에서의 이탈에서 시작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도 자신이 살고 있던 곳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부터 여정을 시작하잖아요. 그렇게 보면 우리 인생 ‘내가 있어야 할 곳을 바르게 알고, 그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고백할까요. “우리는 믿음의 여정 가운데 있습니다. 이 여정은 중단할 수 없습니다. 끝가지 가봅시다.” 주님은 우리 여정의 친구가 되시며, 길이시며, 동시에 목적지가 되십니다. 우리 인생의 항해를 마치고 돌아갈 항구십니다. 믿으십니까?
바로 그 자리, 나를 위해 준비 하셨을 바로 그 자리.. 어딘가에 하나님이 예비 하셨을 바로 그 자리.. 내 삶을 어르고 달래시며 이끌어 가실 바로 그 자리로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그 자리는 어디 입니까?
첫째,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리
시대의 숙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갚게 살피고, 분별하지 않은면 진리에 견고하게 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먼저, 신앙의 제일 중요한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자리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리(14절)이고, 새로 지으심을 받는 자리(15절)이며, 예수의 흔적을 부여받는 자리(17절)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표현으로 바꿔 말하면 그 자리는 포기의 자리이고, 수치의 자리이며, 고난의 자리,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입니다. 이전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사는 자리를 말하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그 새로운 것,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은 더이상 할례 받은 사람과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새로운 질서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가 아닌 이 땅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거짓 메시지가 성도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거예요. 갈라디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자신들을 예루살렘에서 파송받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거짓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행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먹혔어요.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죠. “이것이 모세를 통해 받은 구약의 가르침”이라고 하니까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그 거짓 교훈에 흔들렸던 것입니다.
이건 우리 시대의 숙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진리가 왜곡되고, 자의적으로 해석되면서 갈기갈기 찢겨 인생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가 아닌 나 한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위한 개인의 말씀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구원과 상관없이 얼마나 내 마음을 감동시키는지, 얼마나 내 상황에 적합한지에 따라서 점수를 줍니다. 물론 우리는 말씀을 통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데도 유익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열쇠가 되고,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전무후무한 인권이 말씀 안에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제일 중요한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
# 기독교 신 앙의 본질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외적인 면에 있지 않고, 우리의 영적 내면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외적 의식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으로 들어가면 내적이고 영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형식인 율법에서 이제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것을 향해 가는 여정이 바로 우리 신앙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내용만 확실하고, 동기와 자세 그리고 중심만 분명하면 외적인 삶은 어떻게 드러나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15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할례주의자들이 모세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반대로 무할례자들이 은혜면 된다는 말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럼 뭔가요? 신앙의 핵심은 성령께서 우리 속사람을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셔서 내면에 진실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의 내면을 살리셨기 때문에 영적인 인지가 생겨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그 새로운 것,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은 더이상 할례 받은 사람과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는 겁니다. 새로운 질서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율법이냐, 은혜냐 하는 이 두 가지 선택지에서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성도가 자신에게 주어진 참 자유를 활용하고, 그에 걸맞는 책임의 자리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그 자리, 우리가 나아가야 할 그 자리는 새로이 지으심을 받은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6절을 읽어봅시다.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율법에 매이지 마세요, 그렇다고 은혜면 다 된다고 생각하지도 마세요. 오직 우리를 새롭게 하신 주님의 성령을 의지함으로 진실한 삶의 변화를 이뤄가시기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새로이 지으심을 받은 자리>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그 자리는 어디 입니까?
둘째, 열매 맺는 자리
기독교는 세상의 종교와는 철저하게 다른 구원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하면, 기독교는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감동시킬 만한 선이나 덕을 세울 수가 없다고 봅니다.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학교에서 교육을 잘 시키고 도덕을 가르치면 사람들이 할 수 있을 것 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제가 다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거나 덕을 행하여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는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의 행위나 자격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다는 진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보여주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향한 저주”는 믿는다고 고백은 하지만, 믿음에 합당한 행위가 없는 이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 루터의 “Sola Fide”
한국루터학회 부회장이며 지금은 실천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시는 김선영 교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라는 표현에 굉장한 오해가 있다는 걸 지적했습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당시 가톨릭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해서 구원을 이루어 간다는 구원관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관여할 수 있냐?’는 문제를 제기한거죠.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은혜로 이루시는 것을 말했습니다.
율법이 그렇잖아요. 우리가 이러이러한 것들을 지키면 구원 받고, 그렇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가톨릭도 그랬어요. 하나님이 구원의 문을 여셨지만 인간의 선행을 통해서 <신인협력>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 때 루터가 외쳤던 것이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입니다. 선행이나 율법이나 우리의 어떤 수고가 하나님의 구원에 관여할 수 없고, 다만 구원받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만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원리를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예요.
루터가 말한 건 선행이 잘못됐다는게 아닙니다. 그 근거가 잘못됐다는 겁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건강한 열매가 맺힌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Sola Fide”를 외치면서도 아무런 행실도 없이, 그 어떤 열매도 없이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의 ‘은혜’라는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본질의 회복을 위해서 외쳤던 “Sola Fide”가 또 다시 본질을 갉아 먹는 구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 예수의 흔적
사도 바울이 말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는 말씀은 자기 몸에 복음으로 인해 생긴 몸의 상처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수 없이” 맞았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 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복음 때문에 핍박받으면서 생긴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바울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하고 싶은 말은 율법의 할례가 나를 하나님의 백성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새겨진 복음을 위한 핍박의 증거가 바로 나를 하나님이 백성임을 증거한다는 겁니다. 그는 삶으로 열매 맺었습니다.
# 신율법주의? 리차드 백스터
여러분 리차드 백스터을 아시나요? 신앙생활을 꽤 오랜 시간 해오신 분들은 한 번쯤을 들어 보셨을 거예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목회자로서 <참 목자상> 이라는 책으로 목회자들의 귀한 모범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백스터 목사님이 쓴 많은 책들 중에 <기독교 생활 지침>이라는 책이 있는데, 백만 단어가 넘는 분량이어서 번역 될 때 총5권으로 번역이 돤 “기독교윤리” 에 관한 내용의 책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종교 활동이 아니라 신앙으로 일상의 삶을 사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당시에는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만으로 충만한데 새로운 율법을 만들었다면서 신율법주의로 몰아가기도 했어요. 저는 이런 규율과 율법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도록” 돕는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 들이겠습니다.
복음이 이끌어 가는 열매 맺는 자리로 가서 열매맺는 삶을 사는 것은 그렇게 살아도 되고 살지 않아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복음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 평생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말하면서 열매 없는 삶을 사는 것 보다, 내 삶을 스스로 옭아매고, 묶는다 해도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이 예수의 흔적을 내 몸에 갖는거 아니겠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두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죄악된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결론
우리 인생도 우리의 신앙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을 바르게 알고, 그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여정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시작할 때 서로에게 말했는데 떠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여정입니다. 혹시 아직 믿음의 여정을 떠나지 시작하지 못한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 이 예배를 기점으로 믿음의 항해를 떠나기시 바랍니다.
성령 안에서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여러분이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로 가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 여정을 멈추지 않고 끝가지 갈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은 우리 여정의 친구가 되시며, 길이시며, 동시에 목적지가 되십니다. 우리 인생의 항해를 마치고 돌아갈 항구십니다.
바로 그 자리, 나를 위해 준비 하셨을 바로 그 자리.. 어딘가에 하나님이 예비 하셨을 바로 그 자리.. 내 삶을 어르고 달래시며 이끌어 가실 바로 그 자리로 우리는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주님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14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기서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늘이나 땅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말합니다. 삶의 일, 다른 사람의 칭찬, 영광, 부, 그리고 화려한 모든 것입니다. “나에게 이것들이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며 항상 이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된 삶의 기초입니다.
# 프락티코스
‘실천’이라는 측면은 우리 영성의 결과가 아니다. 실천이 되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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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 이 귀절의 뜻은 알기 어렵다. 바울이 이때까지 대서자(大書者)의 손으로 갈라디아 서신을 기록하도록 하다가 여기서부터는 자기의 친수로 쓰기 시작하였다는 해석이 있다. 그렇다면, 그가 "큰 글자로" 쓰게 된 목적이 이 편지가 자기의 글이라는 것을 인표하려는 것이다. 일설에, 그가 이 편지 전체를 친수로 쓰면서 이 부분에 와서는 대자(大字)로 쓴다는 뜻이라고 한다(Duncan). 바울이 이렇게 자기의 서신에 대하여 자기의 저작 권위를 주장한 것은, 그의 서신이 일반적 통신이 아니고 특수한 영권(靈權)이 있는 것임을 지적함이다. 그의 영권은 곧 사도적 권위이다.
갈 6:12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 -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느다고 하면서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대중의 인기를 구하려고 아첨하면서 복음에 할례를 더해 가지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성령의 뜻이 아니고 육체의 소역대로 모양을 내어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으려는 비루한 행동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할 뿐이라 - 저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완전한 구주라고 하지 않고 할례를 겸하여 주장하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들이 유대인들의 핍박을 두려워한 까닭이다(행13:45,50,14:2,5,19)
갈 6: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 곧, 할례 받은 유대주의자들 자신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씀이다(마 23 장; 눅 11:46). 옛 글에도 말하기를, "사람이 비록 몹시 미련하여도 남을 밝히 꾸짖는다"고 하였다(人난支愚청仁즉明)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한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할례 받기를 원하는 목적은, 이방인 기독신자들이 할례를 받기만 하면, 그것은 바울을 반대하는 그들의 승리인 동시에 그들의 자랑거리가 된다. "너희의 육체로 자랑"한다는 말의 뜻이 그것이다.
갈 6:14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이와 같은 진리는 빌 3:7-9에도 나타났다. 고전 2:2 참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작가에 못 박히고 - 이 말씀은 윗 문구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자랑의 이유를 가리킨다. 그것은 이렇다. 곧, 바울과 세상과의 관계가 예수 십자가로 말미암아 끊어졌으니, 그 십자가는 바울에게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와 세상과의 관계가 존속하였더라면, 그는 세상과 함께 멸망할 뻔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의 자랑거리요 모든 신자들의 자랑거리이다.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세상이 비록 신자에 대하여 긴밀한 결탁을 가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자 자신이 아직 세상에 대하여 사모하는자라면, 그는 아직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역시 세상에 대하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사실을 믿음으로 되어진다.
갈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 곧, 구약시대에 있었던 "할례"는 이제 신약시대에 이르러서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란 말씀이다. 신약시대의 기독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새 사람된 것이 구원문제에 있어서 전부를 의미한다. 고후 5:17 참조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 -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된 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신자가 내세에 완전히 변화됨을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으나(막14:25;계 3:12,,21:1-5), 특별히 그가 현세에 이미 받은 새 생명을 의미한다. 누구나 이 새 생명만 받았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 문제될 것 없다(롬 2:29)
갈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 - "이 규례"란 것은 위에서 말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원칙"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14절)을 중심한 그 교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행하는 자"란 말은 기독신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 이것은 육체적으로만 이스라엘이라고 자세하는 유대주의자들에게 대조하여 말한 참된 이스라엘를 가리킨다. 곧, 이것은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새로운 이스라엘(기독신자)에대한 명칭이다.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 "평강"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이 된 뒤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구원의 총원천이다. 그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때에 우리에게 주시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갈 6:17
나를 괴롭게 말라 - 이것은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는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다. 그들의 방해운동은 바울에게 괴로움이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 바울이 유대주의의 거짓스승과 달라서 주님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았으니,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참된 사도인 흔적 곧, 증표이다. 롬 8:17;고후 1:5,4:10;골 1:24 참조.
갈 6:18
형제들아 -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들"이라고 한 것을 보니, 그들이 아직 유대주의자들의 그릇된 교훈에 완전히 빠지지 않은 것이 명백하다. 그는 이렇게 애정 깊은 명칭으로 그들을 부름으로 그들의 마음을 이끌어 자기의 말씀(복음진리)를 듣게 하고, 거짓 스승들을 멀리하게 하려고 한다.(Greijdanus).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 이 축도의 목적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심령(心靈)깊은 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그의 은혜에 참예하여 거기서 떠나지 않기를 위한 것이다(Greijdanus). 큰 은혜가 하늘에 쌓였을지라도 인간이 그 심령으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그것을 받아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무엇보다도 그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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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기신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마지막 말이라면 자기 생애에 가장 소중한 메시지와 교훈을, 평소에 이것만은 내 자녀들이 꼭 붙잡고 살아야될 철칙이라고 생각했던 내용을 전수하고자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는 지금 편지를 구술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빴기 때문에 편지 내용을 구술해서 받아쓰도록 했었습니다. 여기서는 누가 구술해서 받아썼는지 모르지만 다른 성경은 두기고라는 사람이 옆에서 늘 받아썼다고 말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해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구술을 받아쓰고 있는 기록자의 펜을 빼앗아서 스스로 큰 글씨로 편지의 마지막을 썼습니다. "이제는 내가 너희에게 직접 몸으로 부딪쳐서 최선을 다해 말하고 싶다." 는 의미에서였습니다. 여기 11절에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눈이 나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청각이 나쁜 사람은 말을 크게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잘 안보이니까 큰 글자로 썼을 것입니다. 과거에 박윤선 목사님께서 강의안 쓰신 것을 보면 어떻게 글씨가 크던지 꼭 200자 원고지 두 칸에 한 글자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200자 원고지에 백자 밖에 안들어갑니다. 본인이 강의하기 좋도록 자기 시력에 맞게 썼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도 그처럼 큰 글자로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구술해서 받아쓰도록 했는데 지금은 내가 직접 안타까운 마음으로 너희를 터치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직접 큰 글자로 썼다. 이것은 글자만 큰 것이 아니라 내 생애에 가장 소중한 메시지이고 지금까지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서 너희에게 전하고 싶은 결론이다.' 이런 의미로 붓을 빼앗아서 직접 쓰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 속의 염려는 이것이었습니다. '기독교와 종교가 다르다. 종교가 노력하고 애쓰고 수고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친히 역사하셔서 그의 십자가로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이다.' 여러분, 오늘날도 제가 볼 때 기독교가 자꾸 종교화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예수 믿으면 건강해진다. 예수 믿으면 형통해진다. 예수 믿으면 새로운 은사와 능력을 받는다. 그러면서 인간을 자꾸 키워가고 확장시키고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종교가 종교라면 기독교는 종교 아닙니다. 새로운 다른 질서입니다. 모든 종교는 사람이 자기를 잘 발전시키면 하나님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인간이 노력하고 애쓰고 수고하면 하나님 된다는 모든 철학은 사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고 특별히 인권이 없습니다. 유교에도 인권이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말했던 공산주의에도 인권이 없습니다. 동양 종교에는 인권이 없습니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이 사실을 모릅니다. 그런데 나는 죄인이고 쓸모 없고 한 일이 없고 오직 주께서 해주셨다는 이 종교 안에만 인권이 살아있습니다. 기독교에만 인간의 존엄성이 있습니다. 동양 종교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드러난 때가 한번이라도 있었습니까? 기독교는 그런 의미로 종교가 아닙니다. 인간이 노력하고 애쓰고 수고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종교라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사랑하시고 행해주신 은혜,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이 초대 교회 당시 사도 바울이 생생하게 복음을 전할 그 때에도 기독교를 종교화하고자 하는 기도들이 계속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외면에 신경을 썼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내면의 진정한 변화 보다는 우리가 깨닫고 발전시키면 무엇인가 이루어진다든지, 내게 더 좋은 귀한 것들을 붙여주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면 그 인생이 복되다든지, 등등의 외면적 종교 형태로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종교의 많은 모습 가운데 외면을 강조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지난번에 터어키에 갔을 때였습니다. 터어키의 이스탄불에서 얄로바市로 가기 위해서는 육로로 갈 수도 있고 배를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육로로 가면 에게해를 지나서 돌아가기 때문에 두 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그런데 선착장에서 바로 카 페리를 타고 가면 1시간 밖에 안걸립니다. 저희들이 차까지 배에 싣고 모두 올라가서 식당에 앉아서 차를 마시려고 했는데 저희 앞에 한 터어키 사람이 앉았습니다. 그 사람은 라마단 금식 기간 동안이었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신, 코란의 진리를 아는가?" 잘 모른대요. 아라비아 언어라서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냥 염불 외우듯이 아무 의미 없이 계속 외운다고 해요. 그런데 정확하게 하는 것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메카에 대고 하루에 다섯 번 정한 시간에 절합니다. 터어키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하루에 다섯 번, 마을의 확성기로 코란이 울려 퍼집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이맘들은 코란을 아는가?" 물었습니다. 코란을 읽는 선생을 이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도 모른대요. 누가 운율을 더 멋있게 읽느냐? 그것 밖에 모른답니다. 겉모양으로 종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불교가 1년 내내 아무 것도 않다가 초파일이 되어 연등 하나만 켜면 불교도입니다. 유교는 제사를 통해서 종교를 끌고 갑니다. 겉모양을 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교회에 들어와서 가르쳤던 사람들은 복음을 접해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복음을 접해보고 십자가의 영광을 아는 것처럼 느꼈는데 그 분들이 두 가지 이유로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첫째로는 십자가를 전하면 핍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 시대의 십자가는 사형 틀이었습니다. 여러분, 종교의 심볼이 사형 틀입니다. 지금이니까 2000년 동안 십자가가 너무 익숙해서 의미가 있고 내게 힘을 주는 것 같고 영광스럽지만 당시의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사형도구였습니다. 너무 잔인했기 때문에 로마 사람들은 그 십자가 형틀에 죽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사형제도를 법적으로 받아들일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는 어떤 경우에든지 십자가 사형은 행하지 않는다'는 단서 조항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시세로 같은 사람은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같은 것은 머리 속에서 언제나 지우고 살아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저들에게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또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는 거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보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받았던 할례를 소중히 여긴다" 며 도망갔단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이 사람들은 비웃음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또 자기 육체를 자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을 다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형벌이 끝났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안지켜도 됩니다. 그러면서 "그래도 우리가 노력해야 구원받지 않겠는가? 적어도 할례는 받아야 된다."고 스스로 할례를 받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계속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기 육체를 자랑했습니다. 내 노력을 자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가 종교화되는 것을 보다 못해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는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가 십자가 위의 내 죄 위에 부어졌습니다. 그렇게 십자가가 내 죄의 형벌을 모두 담당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십자가가 모든 죄를 담당했기 때문에 내 죄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깨끗이 씻김을 받은 것으로 압니다. 죄만 씻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죄 없다 선언하셨습니다. 죄 없다고 선언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빛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누리는 상속자의 영광을 성령께서는 내 속에 힘차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 살면서도 하나님의 상속자로 삽니다. 이 영광을 얻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그런가하면 십자가는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장소입니다. 한편으로 십자가는 세상이 나에 대해서 죽은 장소입니다. 세상에 귀하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자랑거리가 일시적으로 내 마음을 흔들 수는 있어도 내 마음을 완전히 붙잡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놀라운 은총에 힘입어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종교는 우리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종교는 우리에게 형태적인 삶의 모습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형태가 아니라 새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15절에 이렇게 외쳐댑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아래서 내가 새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새 인생을 삽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논리 종교 아닙니다. 생명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이론이 아닙니다. 이론이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새로운 삶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여러분, 이런 놀라운 은혜를 우리 속에 허락해줍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십자가의 규례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 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런 인생에게 반드시 두 가지가 따르는데 놀라운 평화와 그리고 하나님의 한없는 긍휼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한숨이 변해서 기쁨으로 바뀝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를 유혹하는 죄가 내게서 멀어지는 권능을 체험합니다. "오직 십자가, 이것 외에 내가 자랑할 것이 없다"고 사도 바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놀라운 영광을 가진 자,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흔적이 드러납니다. "이제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을 카톨릭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이 수도원에 가서 열심히 예수님을 묵상하고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있는 경험을 친히 체험하게 되면 그냥 내 손과 발에 주님이 입으셨던 거룩한 상처, 상흔이 손과 발, 옆구리, 이마에 그대로 새겨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아마 이것은 서양 미술사에 보면 이콘이라는 것 있습니다. 영어로는 아이콘(Icon)이라고 발음하는데, 이콘이라는 성상숭배하는 그림들이 있는데, 한 사람이 이렇게 누워 있습니다. 그러면 저 위에서 예수님이 손을 이리, 저리 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그 사람 손을 연결시켜 놓고 예수님의 발 상처와 그 사람의 발 상처 사이에 줄을 그어놓았습니다. 빛으로 비춰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 상처가 옮겨졌다는 뜻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의 이야기를 그렇게 말한 이래로 카톨릭에서는 그 상처를 자기 몸에 가졌다고 증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3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역사적으로 진실인가 아닌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깊이 사모하면 주께서 이적을 통해서 이런 흔적도 주실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흔적이 있어도 좋겠고 또 없어도 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또 다른 흔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흔적입니까? 십자가를 자랑하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 흔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흔적은 무엇을 말합니까? 상처가 만들어낸, 상처가 아문 다음에 생기는 것이 흔적입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당했던 멸시, 예수 믿기 때문에 당했던 손해, 예수 믿기 때문에 당했던 십자가,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며 당했던 상처들이 세월이 지남과 더불어 흔적으로 사도 바울 몸에 있었단 말입니다. 그는 40에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은 줄 알고 시체처럼 밖에 내던졌는데 다시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무수한 항해를 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지 모릅니다. 그는 광야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산의 위험과 강의 위험으로 가득찬 세상을 오직 주님의 십자가가 너무 소중하기에 십자가만 증거하기 위해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얻어진 거룩한 흔적입니다.
내적 치유 강조하면서부터 우리에게 말이 생겼습니다. "나 상처 받았어요." 아닙니다. 주님 십자가를 소중하게 여기고 믿음으로 나아간 사람에게 상처가 따릅니다. 종교는 우리에게 꼭 많은 것을 주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요즘 기독교도 점점 종교화되고 있는 모습 보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물건 팔 때 이렇게 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 제품은 아가페 출판사에서 000집사가 만든 성경책으로서 이 책의 장점은 한 쪽에는 NIV영문판이고 아래쪽에는 해석이 있기 때문에 보기가 참 좋습니다. 이 책은 원래 50,000원인데, 다 받느냐? 반으로 잘라서 25,000원! 그것이 전부냐? 아니, 이것도 하나 더 붙이고, 요것도 하나 붙이고... 여러분, 예수 믿는 것 십자가에다가 형통을 끼워 팔고 예수 십자가에 건강을 끼워 팔고 십자가에다가 출세를 끼워 팔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그 분이 너무 존귀하고 그 분이 내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기 때문에 손해가 나도 기쁘고 그 십자가의 영광을 붙잡을 때에 억울해도 즐겁고 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놀라운 하늘의 능력이 내게 임합니다. 그 분을 자랑하게 되면 세상에서 당하는 어떤 고통도 넉넉하게 승리하고 그것이 우리 주님이 내 삶 속에 역사하는 거룩한 흔적으로 남습니다. 그 흔적을 사도 바울이 가졌단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무수한 도마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능력을 의심하는 도마들이 있습니다. 이 도마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습니까?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여! 왜 한국 교회가 이처럼 멸시받습니까? 왜 한국 교회가 이처럼 힘이 없습니까? 왜 한국 교회가 이처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 믿고 성공하고 예수 믿고 출세하고 예수 믿고 부자되고 예수 믿고 건강해졌지만 그 대신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한 상처가 영광의 흔적으로 남겨진 것이 없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지고 있는 흔적이 내 삶에 있느냐고 묻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 믿었기 때문에 억울해서 한 밤을 지새우며 울어본 적 있습니까? 예수 믿기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까? 예수 십자가의 영광을 가슴에 품은 사도 바울은 몹시 매를 맞고 빌립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아픔은 계속 되었었습니다. 욱신거리는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과 가려움증은 옥에 갇힌 후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영광의 하나님을 향해 찬송했습니다. "할렐루야!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십자가 지고 가는 흔적이 내게 있단 말이예요. 현대의 도마들은 "남서울은혜교회야, 너 예수 믿는 흔적 있느냐?"고 묻습니다. "아무개 목사야, 너 예수의 흔적 있느냐?" 고 묻습니다. "아무개 장로야, 너 예수 흔적 있느냐?"고 묻습니다. 상처 있느냐고 묻지 않아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상처는 영광의 흔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 않으려거든 혀가 천장에 붙어야 됩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묵상하지 않는 성경공부는 죽은 성경공부입니다. 십자가를 찬양하지 않는 찬양과 십자가를 지고 헌신하지 않는 봉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후로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아라. 내게 너희가 없는 흔적이 하나 있다. 너희는 할례 받아서 외과적인 흔적이 있느냐? 내게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그 영광 때문에 내 몸에 거룩한 주님의 흔적이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심령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는 넘칩니다.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인줄 알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주의 은혜는 쏟아집니다.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사형틀이 기독교입니다. 거기에 내 모든 죄는 다 처단되었습니다. 내 삶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논리가 아니라 삶입니다. 새로운 인생의 스타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면 거룩한 흔적은 내 삶 속에 차곡차곡 드러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주님에게 있는 십자가의 못박히셨던 그 흔적들이 내 인생 속에도 있습니다. 이런 생애로 산다면 이것 보다 더 큰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은혜만이 십자가를 보게 만듭니다. 아니,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이 은혜의 아버지이십니다. 심령은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은혜로 풍성히 채워집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복스러운 이 시간, 주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됨의 영광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생애로 인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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