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M.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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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릅니다.
부활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릅니다.
지난 주에 전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겨울에 열리는 월드컵으로, 사상 최초로 중동에서 열리는 월드컵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대표팀도 현지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첫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내일 밤 10시, 우루과이와 첫 경기를 가질 예정입니다. 마음 같아선 정의마루에 모여서 응원전을 펼치고 싶은데, 다음 날 새벽기도가 있어서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월드컵에서 초미의 관심사는, 우리 나라 대표팀의 핵심이죠, 손흥민 선수의 출전여부일 것입니다. 3주 전에, 안와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면서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는 줄 알았는데요, 놀라운 속도의 회복력을 보이면서 내일 열리는 첫 경기 출전에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손흥민 선수가 당한 부상이 얼굴 눈 밑 쪽 뼈 4군데가 부러진 심각한 부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손흥민 선수처럼, 월드컵 직전에 부상을 당해서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하는 선수들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그 부상선수들로만 베스트 일레븐을 꾸려도 될만큼 수준급 선수들이 나오지 못해 너무 아쉽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몸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자주 다치고, 회복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쉽게 다치고 회복이 더딘 연약한 존재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이틀 전에 치과 치료를 받았습니다. 지난 주일부터 두통이 심해져서 진통제를 먹고 버텼는데 어금니까지 아파 왔습니다. 그래서 치과에 예약을 하고 갔더니 충치가 가득 차서 신경을 누르고 있으니 신경치료를 해야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3일 동안 너무 아파서 괴로웠습니다. 그냥 이를 뽑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팠는데, 아직까지는 통증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치료를 받고 나니 이제 좀 살만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몸이 아프고 연약한 지체들이 많습니다. 수술을 받기도 하고, 장기간 약물에 의존해야 하기도 합니다. 자고로 몸이 건강해야 마음이 건강할 수 있는 법인데, 몸이 아프니 마음도 병들어 가기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픔이 없고, 더 이상 다치지 않으며, 몸이 상하지 않는 삶을 꿈꿉니다. 하지만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바램과는 다르게 인간의 몸은 결국 약해져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생을 마감했다'라고도 말합니다. 반면에 죽음 이후에 뭔가 막연한 것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사람들은 ‘좋은 곳으로 갔겠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죽음을 거부하는 종교입니다. 죽음을 극복하여 마침내 다시 사는 부활을 주장합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새로운 존재가 되어 삶을 이어간다는 부활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일 사도신경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항상 이 부활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도 그럴 수 없는 것이, 부활은 다가 온 현실이 아니라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이기에, 우리는 부활에 대해 막연함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위로가 되는 것은,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 역시 사람이 죽으면 부활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세계관에는, 사람의 부활이란 없었습니다. 이랬던 유대인들에게 부활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된 계기가 바로 바벨론 포로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은 낯선 이방 땅에서 포로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치 않았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에게 땅의 개념이 정말 중요했는데요,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이요 기업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전쟁에서 지고 바벨론에게 땅을 빼앗기게 되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할 곳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들 마음 속에 부활에 대한 소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방 땅에서 믿음을 지키고 의로운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헬레니즘 문화와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영육이원론 같은 사상들 때문에 부활에 대한 개념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그 몸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1세기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부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부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어느 고린도 교회 교인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함께 3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고린도전 15: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부활은 반드시 지금 우리의 삶과 연관이 있습니다.
부활은 반드시 지금 우리의 삶과 연관이 있습니다.
질문의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그 몸은 구체적으로 어떤 몸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몸이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부활한 새로운 몸은 과연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사도 바울은 여기서 기가 막힌 비유로 지금의 몸과 부활한 새로운 몸을 비교하고 있는데요, 지금 우리의 몸이 씨앗이라고 한다면, 부활한 새로운 몸은 열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과씨를 밭에 뿌려서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수확한다고 했을 때, 사과씨와 사과가 다른 것이 아니듯이 지금 우리의 몸과 부활한 새로운 몸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36절에서 바울은, 네가 뿌리는 그 씨가 죽지 않으면, 곧 지금 우리의 몸이 죽지 않으면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부활이니, 새로운 몸이니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 안에 부활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좀 전에 제가 설명드린 부활체에 대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부활하게 되면 새로운 몸을 입게 된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육체가 아닌 영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몸을 벗어나서 어떤 신령한 존재가 되는 것이 부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바로 지금 우리의 몸과 장차 부활할 새로운 몸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이란, 지금의 몸을 벗어나는 어떤 신령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의 몸과 아주 깊은 연관성이 있는 새로운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과 어떤 태도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가, 장차 우리가 입게 될 새로운 몸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연약한 사람에게 어떤 말을 했고, 어떤 대우를 했는지,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어떤 부끄러움 없이 당당했고 떳떳했는지, 그렇게 형성된 그 사람의 세계관과 인격이, 장차 입게 될 새로운 몸에 연속성 있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지금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방언과 예언과 같은 은사에 취해서, 마치 자신이 신령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일상생활은 엉망이면서 그럴듯한 종교적인 언어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저격하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판단하고 짓밟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엉망으로 살면서 신령한 존재로 부활하고 싶은 종교적 한탕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참된 몸의 부활이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그 모습이 연속성 있게, 더욱 고차원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선교부에서 통일선교비전트립을 다녀왔습니다. 강원도 철원 지역에 남아 있는 전쟁의 흔적과 멀리 내다 보이는 북한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일정 중에 철원지역에 있는 어느 교회를 방문하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해 교회가 무너진 아픔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저희는 무너진 그 교회 터를 방문했는데요, 마치 고대 유적지처럼 교회 외벽과 기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터 옆에 새롭게 지은 교회가 있었는데, 폭격으로 무너진지 63년만에, 무너진 교회를 기념한 철원제일교회였습니다.
저는 그 교회를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와 무너진 교회터를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기막힌 포토존이 있다며 그 곳으로 저를 안내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포토존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무너진 교회의 입구 사이로 새롭게 세워진 교회의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무너진 교회의 현실이 마치 새로운 교회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가치관으로부터 비롯된 나의 행실이 마침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몸의 부활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마지막 아담을 본받는 것입니다.
부활은 마지막 아담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어떻게 하면 새로운 몸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바울은 또 하나의 메타포를 사용하고 있는데, 바로 “아담 타이폴로지”, “아담 모형론"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45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에덴동산의 첫 사람 아담이 생령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아담을 창조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나오는 ‘생기'가 바로 오늘 말씀에 ‘생령'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아담은 어떻습니까?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차이가 발견됩니다. 첫 사람 아담은 그저 생명을 받은 살아 있는 자에 불과했지만, 마지막 아담은 그 자신이 생명을 주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그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가는 것에만 급급했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삶을 나누시고 희생하시며 마침내 영원히 사는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바로 이 마지막 아담,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줌으로써 참된 몸의 부활을 이루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에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이기적 본성과 한계를 극복하여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생명 나눔의 삶을 본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희 둘째 아이가 종종 저에게 읽어달라고 하는 동화책이 하나 있습니다. 제목은 “배추부인 뽐세라와 애벌레 친구들"입니다. 이전 교회에서 시무하던 당시에, 초등부 선생님께서 일본어 번역일을 하고 계셨는데 본인이 번역한 책이라며 저에게 선물해주신 책입니다. 선물받은 당시에는 자녀가 없었던지라 동화책에 큰 관심이 없어서 책장 한 구석에 꽂아 두기만 했었는데, 둘째 아이가 이 책이 흥미로워 보였는지 어느 날 이 책을 읽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배추부인 뽐세라는 자신의 화려한 외모에 관심이 많은 배추였습니다. 도도한 말투와 화려한 우산과 손수건을 항상 지니고 다녔고, 아침마다 이슬이 가득담긴 욕조에서 목욕을 하는 매우 고상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배추부인 뽐세라에게 어느 날 애벌레 친구들이 찾아 왔습니다. 뽐세라 부인은 배고픈 애벌레 친구들을 위해 자신의 드레스와도 같은 배추잎을 기꺼이 내어줍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 눈치에 못 이겨 내주었지만, 금새 애벌레 친구들이랑 친해지면서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몸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애벌레 친구들이 실수로 그만 뽐세라 부인의 몸을 거의 다 갉아먹고 말았습니다. 그 아름답던 드레스는 흉측한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상심에 빠져 있던 뽐세라 부인에게 농부 아저씨는 정말 잘한 일이라며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누더기가 되어 버린 뽐세라 부인이 어떻게 변했는지 아십니까? 배추부인의 배춧잎을 먹고 자란 애벌레들이 나비가 되어 뽐세라 부인의 누더기가 된 몸을 덮어 주었습니다. 뽐세라 부인은 세상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하얀 나비 드레스를 입고, 보석같은 눈물과 함께 달빛 아래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내어 준 배추부인에게 돌아 온 것은, 이 세상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정말 아름다운 몸을 돌려받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뽐세라 부인은 자신의 몸은 쇠약해졌을지언정, 그것으로 그녀의 삶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몸을 먹고 자란 애벌레들이 나비가 되어 그녀에게 새로운 몸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살신성인과도 같은 삶의 자세는, 그녀로 하여금 아름다운 존재로 다시금 태어나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인생이 너무 팍팍하고 삶은 너무 고단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쉽지 않은 일상의 연속입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의 이런 암울한 현실에만 골몰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그 어둠 속에 갇혀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지내게 만듭니다.
하지만 오늘 바울이 제시한 복음은, 우리가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주목하기 시작할 때 우리 인생은 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디 첫 사람 아담으로 인생을 살아 왔지만, 남은 인생은 마지막 아담과 같이 생명을 나누어 주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부활은 새로운 몸(M.O.M)을 입는 것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몸(M.O.M)을 입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함께 4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든 피라고 하는 성서학자는, 이 구절을 미래형이 아니라 권고형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원문에 가장 가까운 해석은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자'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말씀이 미래형으로 쓰여졌다면, 그것은 지금 현실과 관계 없는 그저 종말과만 관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성서학자들은 이 구절을 현재형이면서도 권고형으로 읽음으로써, 그저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는 것은 미래로 미룰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저 말로만 다른 이를 사랑한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사랑을 표현해야지 하고는 미룰 때가 많습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으로는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말한 대로 약속을 지키고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10월 29일, 이태원에서 큰 참사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많이 속상하고 우울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 눈에도 이 사건은 꽤나 큰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첫째 딸 아이가 사건이 있고 나서 며칠 뒤에 이태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언니, 오빠들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온 가족이 이태원을 다녀왔습니다. 그 날 따라 비가 많이 왔습니다. 신발과 옷을 다 젖어가며 사고가 있었던 골목길에 다다랐습니다. 그 곳에는 수많은 꽃들과 편지들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저희 첫째와 둘째 딸 아이도 미리 준비한 편지를 갖다 놓았습니다.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저는 우리 아이들을 통해 배웠습니다.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 생각하는 마음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이어야 한다. 나중에 해야지가 아니라, 지금 바로 순종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는 길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축구에서는 치열한 90분 경기가 다 끝나고 나면, 그 경기의 최우수 선수를 선정하는 관행이 있습니다. 골을 넣어서 결과를 만들어 낸 선수가 선정되기도 하고요, 그 경기에서 가장 많이 뛰면서 경기에 큰 영향력을 끼친 선수가 선정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그 경기에서 팀을 위해 가장 큰 헌신을 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것이 최우수 선수인데, 영어로 M.O.M. Man of the Match입니다. 공교롭게도 영어 약자를 그대로 발음하면 몸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자신의 몸(MOM)으로 최선을 다하여 섬기는 사람이 M.O.M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구 경기 90분처럼, 우리 인생이 다 끝나고 나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우리가 평생 쌓아올린 재산은, 우리가 죽으면 가져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부활한 새로운 몸(MOM)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 우리에게 부활한 새로운 몸(MOM)을 주실 것입니다. 그 몸은 지금 여기서 다른 이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며 희생하여 즉각적으로 우리 몸을 내어줄 때 얻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쇠하여지면서까지 생명을 나누셨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자신의 것을 나누며 지금 여기에서 즉각적으로, 최선을 다해 섬기시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부활의 새로운 몸을 입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