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 율법과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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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 303장(날 위하여 십자가의)
기도 :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이 오후시간에 주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의 말씀 들을 때, 성령님 역사하여주시고, 주의 말씀대로 믿고 행할 수 있는 은혜도 더하여 주옵소서.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본문 : 로마서 7:1-8 (1-6)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자유롭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세상은 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손해를 당하거나,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서는,
지키지 않는 것들이 있거든요.
가령, 교통 신호가 없어서,
사람들이
배려를 하고, 건너야 할 때 건너고,
안 건널 때는 안 건너고 그러면 좋은데, 그렇게 하나요?
사람들 안 볼 때는, 빨간불일 때도, 무단횡단하기도 하고,
차도, 막 지나가기도 하고 그러지요.
이게 법이 존재하는 목적인데,
인간이 선하고 착하고 지혜롭다면 법이 필요없겠죠.
학교에는 지식을 가르치는데,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 바뀐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사람이 더 교묘해지고,
더 악해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편법을 행하기도 하고, 그러죠.
이래서 형벌적 역할로서 법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한데,
말그대로 법이 존재하는 것은, 사람이 법대로 못 살기 때문이고,
법의 정신대로 못 살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기 때문이고,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 중심적이기 때문에 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법으로 손해를 받지 않으면,
언제나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에,
법으로 규제를 하는 것이죠.
과거, 1-20년 전만해도, 전통이 있고, 도덕이 있고, 공통된 정신이 있어서,
사람들이 법이 없어도,
고유의 도덕과 정신문화를 가지고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하고 살 수 있었지만,
현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공통된 정신 문화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같은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너무 다양해요.
이걸 포스트모던사회라고 합니다.
답이 없다.
다양하다.
다양성이 강조되고,
공통성이나, 일치성은 약화되는 사회가 포스트모던사회 아닌가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교회 안에도,
자유로운 영혼, 자유로운 사람들, 반율법주의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거 같아요.
사람이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구원 받았으면 자유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
법이고, 질서고 그런 것들이 필요한가?
예배에 대한 부분도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가 삶의 에배, 평일의 직업적 예배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함께 모여서 드리는 공적 예배도 중요한데,
이 부분에 있어서도, 무형식주의로 빠져서,
형식이 중요한가?
형식이 꼭 필요한가?
물론 형식이 본질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형식 때문에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령 부모를 공경한다는 명목으로 자주자주 전화를 드리지만,
그 전화내용은 전혀 부모를 공경하는 내용이 아니라면,
형식은 맞는데, 본질은 틀린 거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
안식일을 지키는 형식은 중요한데, 안식일에 병도 고치면 안 되고, 아픈 사람 치료도 받으면 안 되고, 병원도 가면 안되고, 이건 사람을 사랑하라는 본질적 요소를 놓치는 행동이었기에, 호되게 예수님이 비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면,
우리도, 아 본질이 중요하니까, 형식은 놓쳐도 돼. 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의 정신을 놓친 점은 비판했지만, 안식일이라는 형식을 폐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것인데,
그릇 안에 밥이 중요하니까, 밥그릇은 필요없어.
밥만 있으면 돼.
물론 밥이 더 중요하지만, 밥을 담는 그릇이 없다면, 밥을 온전히 섭취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배의 형식이 필요하고, 예배의 시간이 필요하고, 정해진 시간과 형식과 규칙적인 행동들과 예배 전례를 통해서, 그 본질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공통된 의식을 실천하고,
공통된 시간을 준수하고, 공통된 본질을 담아서,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도록, 공적 예배의 형식을 정립하고 함께 하나된 마음으로 준수해야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는
바울의 율법관이 나오는데,
두 가지 관점이 나옵니다.
보통,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다들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긍정적이에요.
아, 율법은 필요하다, 좋은 것이다. 선하다.
이게 이제 7절인데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니까,
자동차에 연료 게이지가 있는데,
그 연료 게이지가 죄냐?
그 연료 게이지가 있어야, ‘아 차에 기름이 없구나, 다음 주유소 때는 기름을 채워야 겠구나.’ 하고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율법이 있어야, ‘아, 내 안에 사랑이 없구나. 그러니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님을 받아들여야겠구나.’ 하고 결단이 나타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율법은 죄가 아니다.
율법은 그냥 연료 표시 게이지와 같다.
율법이 있어야, 아 내 안에 죄가 있구나. 하고 생각을 할 텐데.
율법도 없고, 아무런 하나님의 뜻도 없고, 그러면,
도대체 내가 죄인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것이죠.
우리 아이들도 어릴 적에,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해서, 선 긋는 작업을 미리 해주어야 합니다.
가치관이 세워져야 하는 어린 시절이 미리 선을 그어주어야 하는데,
분명히 성경을 기준으로 그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 내가 예배 잘 드리고 있구나. 반대로 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지고 있구나.
이런 선이 있어야,
죄도 깨닫고,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되는 것인데,
어린 시절에, 아이들을 마구잡이로 야단쳐서도 안 되겠지만,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율법 교육,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선 긋는 작업을 안 해주면, 아이들이 방종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율법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연료 게이지가 있어야,
내 안에 기름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간할 수 있는데,
종교개혁 시대에,
특히 칼빈은 안 그랬지만,
마틴 루터 같은 경우에는 아예 율법 자체를 복음과 분리해버리고, 율법을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컸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고 나서부터는,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마치 율법주의자를 만드는 거라는 생각이 들게 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선은 그어주어야 해요.
다만, 그 선을 그어주는 동시에,
그 선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교 교육은 달라요.
유교는 선을 그어주고는,
인간이 그것을 다 지키라고 교육하는 것이죠.
복음이 없습니다.
기쁜 소식이 아니에요.
유교는 선을 그어주고는, 그 선대로 인간이 노력해서 다 살면,
훌륭한 인간이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죠.
그러나, 기독교 교육은 그게 아닙니다.
선을 그어주기는 해야 하지만,
그 선대로 인간이 노력해서 다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선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교육을 유교적으로 가르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비판적이고, 냉혹하고,
차가워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복음이 빠져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빠져서 그런 것입니다.
아이들이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닮아가야 합니다.
죄인들을 사랑하고,
연약한 자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해져야 합니다.
율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대로 산다고, 사람이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율법대로 다 지키고 산다고,
성령을 받아서, 새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오직 새사람이 되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받는 것이지,
율법을 다 지켰기 때문에,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자동차에 연료 게이지를 보고,
아래로 떨어져 있으니까,
그 게이지의 눈금을 위로 올린다고, 차에 기름이 차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그 게이지를 맞추어도,
차에 기름은 똑같습니다.
그게 뭐에요?
우리가 율법을 아무리 지켜도,
우리 인생에 생명력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차에 연료 게이지가 떨어진 것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해요?
나의 외부,
나의 밖의 도움을 받아야죠.
내가 스스로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나의 외부,
나의 밖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주유소를 찾아 가야죠.
주유소를 찾아가서, 공급을 받아야죠.
채움을 받아야죠.
마찬가지에요.
율법은 좋은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내 마음이 비어 있고, 내 영혼이 죽어 있고,
내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러면, 이제
나의 외부,
나의 밖의 도움을 받아야죠.
이제는 누구를 찾아갑니까?
우리 영혼의 공급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이 가진 한계점입니다.
율법은 뭐에요?
연료 게이지라서, 연료가 가득차 있는지, 아니면 비어있는지를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자체는, 우리 영혼의 공급처가 되지 못해요.
누가 우리 영혼을 채워주십니까?
우리 밖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6절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이제는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다.
어떻게는 연료 게이지 눈금을 위로 올리면 되겠지. 하는 율법주의적 삶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우리가 영혼의 새로움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이제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은혜를 통해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게 6절 말씀인 것이죠.
*여러분,
로마 교회에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
그러니까,
선을 긋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
이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그러니까, 율법은 구원과 상관없고,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앞으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선이 없는 사람들,
아예 자유를 넘어 방종하는 반율법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두 부류가 서로 당파싸움을 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분란스럽게 하고 있었어요.
거기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모호한 호격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라는 호격을 쓰는데,
내 형제들은 누구입니까?
선 긋기를 좋아하는 율법주의자들입니까?
아예 선이 없는 반율법주의자들입니까?
둘 다를 지칭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이렇게 호격으로 부른다음에,
바울은, 그 모호한 대상들을 향하여, 너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라고 선언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바울의 율법에 대한 관점이 부정적이에요.
분명히 바울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후반부에서 너희라는 주어가 갑자기 “우리”라는 1인칭 복수로 바뀝니다.
‘너희’에서 바울을 포함한 ‘우리’라는 1인칭 복수 주어로 바뀌면서,
너희 뿐만 아니라, 나를 포함하여 모든 이들이, 율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것은,
다시, 새로운 남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그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생산해내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뭐에요?
분명히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면서, 반율법주의자들을 옹호하는 것 같았는데,
다시 열매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이제는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시 자동차 이야기로 돌아가서,
연료 게이지가 율법이라면,
연료 게이지 눈금이 아래로 떨어진 것을 보면,
우리가 주유소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기름을 넣지요.
기름을 넣은 차는, 더 이상, 나는 운행할 필요 없어.
나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돼.
나는 이미 마음이 충만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 해도 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왜요?
기름이 가득 찬 차는,
이제부터 정식적으로, 제대로, 자동차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기름이 충만하니까,
이제는 자동차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
그 율법대로 살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죠.
마찬 가지로,
우리가 성령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은혜로 가득채워지게 되면,
방종하고, 방탕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내가 지음 받은 목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율법이 복음으로, 또 복음이 다시 율법으로 향하게 하는 성령의 역동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말씀을 맺습니다.
바울의 율법에 대한 관점을 잘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부정적일 때도 있고,
긍정적일 때도 있는데,
부정적일 때는 언제냐?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율법주의에 대해서는 바울이 부정적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고,
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지,
율법 자체를 지키고 지킨다고 해서,
우리가 성령 충만해지거나,
구원을 받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말하기를,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다.
율법은 신령하다. 율법은 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 자체는 좋은 것이죠.
율법이 없으면 죄를 깨닫지 못하니까요.
율법이 구원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바울은 부정적이지만,
율법 자체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기준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고,
구원 받은 이후에도, 신자들이 믿고 따라야 할 신앙의 규범인 것이죠.
이런 측면에서 율법은 좋은 것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방종주의자가 있다면, 이 말씀을 통하여,
내 안에 거룩한 형식, 거룩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기준이 있어야 하고, 선이 있어야 합니다.
공적 예배를 형식적으로 드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형식에 대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이 형식이 담고 있는, 혹은 담아야만 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우리는 형식 그 자체를 신뢰하고, 형식적인 예배도 드려야 하는 것이죠.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주일에 이루어지는 모든 공적 예배와, 새벽에 드리는 모든 예배를 형식적으로 참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결혼식이라는 형식을 지키게 됩니다.
이 형식은 거룩한 형식이고, 서로를 향한 사랑의 보증을 서는 형식이고, 모든 이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결혼 언약의 거룩함을 엄숙히 맹세하는 형식이죠.
이 결혼식이라는 형식을 배제하고, 본질만 담겠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형식을 통해 본질을 담는 것이고,
그릇이 있어야, 그 안에 내용물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배라는 거룩한 형식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공적 예배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고,
예배의 형식을 껍데기처럼 여기면서, 본질만 지키면 된다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형식이 본질을 담는 것이죠.
반대로, 우리 가운데 율법주의자가 있다면,
냉혹하고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는가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형식을 지키고,
순서를 지키고,
법들을 지키고는 있는데,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사람들에 대한 정죄감이 심해지고, 비판의식이 강해지고,
미움이 생기고, 차갑고 냉랭해지고 있다면,
혹, 내가 형식 그 자체를 신처럼 섬기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가운데 무엇이 옳은 것이냐?
안타깝게도 바리새인들은 대답하지 않고,
밖에 나가서 예수를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 토론했다고 했습니다.
이게 율법주의자들의 특징인데,
형식이라는 형식은 모조리 다 지키는데,
그 마음은 갈수록 차가워지고,
미움과 살인의 마음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율법주의자입니다.
이들은 자동차의 연료 게이지 눈금을 올리면, 차에 기름이 채워질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어야지.
예수 없이, 율법을 지키는 삶은, 하나님도 죽이고, 내 옆 사람도 죽이게 되는 것이죠.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반율법주의자도 되지 말고,
율법주의자도 되지 말고,
율법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의 열매를 맺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이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이 차갑다면, 율법주의를 의심해야 합니다.
미움과 다툼, 증오와 살인, 이런 마음들이 가득하다면, 이 시간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녹이십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또한, 무형식주의자,
구원은 받았지만,
개인적인 안일함만 추구하고,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지 않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닮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누구보다 성령으로 충만했고,
누구보다 율법의 정신을 강조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을 초과하여, 심지어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초율법적인 행위를 실천하셨던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교회와 하나님을 위하여, 그런 헌신자의 자세와 실천을 갖게 해달라고, 은혜를 구하며 결단하시겠습니다.
*둘째로 교회를 위해서,
담임목사님과 사모님, 부교역자들을 위해서,
12월부터 변화되는 주일학교 각 부서별로, 하나님 은혜 주시고, 부서가 영적으로 부흥하도록
내년 목회계획을 두고 기도하고 준비하고 계시는 담임목사님 목회계획 가운데 은혜주시도록.
사역(관찰)
1 너희는 아그노에오(깨닫지 못하다, 알지 못하다, 모르다) 하느냐? 형제들아, 노모스(율법)을 아는 자들에게, 내가 말하는데, 그 노모스(율법)은 퀴리유오(주가 되다, 다스리다, 주관하다)한다, 사람의 살아있는 크로노스(시간) 동안에,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율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는데,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시간 동안만 그를 다스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람이 죽어버리면,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명 자체’,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법이 지배할 대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죽었는데 무슨 지배를 받겠는가?
2 진실로 남편이 있는 여인이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노모스(율법)으로 데오(결박하다, 매다, 구류하다 / 수동태)되어지지만, 만일 이제 그 남편이 아포스네스코(죽다 / 부과 가정)되었다면, 그것은 카타르게오(무효로 하다, 폐지하다, 없애다 / 수동태)되어진다, 그 남편의 노모스(율법)으로부터.
*남편이 죽기를 바래서는 안 되겠지만,
남편이 죽는다면,
더 이상 남편에게 얽매이는 삶을 끝이 난다.
남편에게 얽매인 인생은,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뿐이다.
남편이 죽어버린다면, 남편에게 얽매이는 법은 무효가 된다.
*남편이 살아 있다면,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없다. 왜냐하면 남편이 살아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게 묶어 있기 때문이다(데오 / 결박하다, 매다, 구류하다). 수동태로 되어 있으니, 스스로 묶은 것이 아니라, 묶여진 것이다. 그런데 그 남편이 죽어버린다면, 그 묶임은 없어져 버린다. 이제 여자는 남편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왜냐하면 남편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여자는 자유로운 몸이 되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그러므로,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은, 모아칼리스(음녀, 간음한 여인)이라고 크레마티조(경고하다, 불리우다, 명명되다 / 미래)될 것이다, 만일 다른 남자에게 가면, 그러나 만일 그 남편이 아포스네스코(죽다 / 부과 가정)되었다면, 엘류세로스(자유로운)된다, 그 노모스(율법)으로부터, 모아칼리스(음녀, 간음한 여인)가 되지 않는다, 다른 남자에게 가도.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간음한 여자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남편이 죽었다면,
그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데,
다른 남자에게 가도,
음녀가 되지 않는다.
살아있는데 가면, 음녀이고,
죽어서 가면, 음녀라고 불리지 않는다.
*아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음녀’라고 비판했을 것이다. ‘이 간음한 것들아! 어떻게 너희가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이냐?’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남편이 죽어버린 여인과 같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유이다. 율법에 대하여 자유이다. 이제는 율법이 그들을 묶을 수 없다. 이제 그들은 율법의 결박으로부터 풀려났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보다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태도가 더 관대한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의 선교사적 사명으로 인해서일 수도 있다. 이제는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그 여자는 음녀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더이상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음녀라고 부르지 말아라. 그들도 똑같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여기서 바울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옹호하고 있는 듯하다.
4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아, 또한 너희도 사나토오(죽이다, 죽게 하다 / 수동태)당했다, 그 노모스(율법)에 대하여, 크리스토스의 소마(몸) 때문에. 이는 너희가 다른 남자, 죽은 자들 중에서 살려지신(에게이로 / 깨우다, 살리다, 일어나다 / 수동태) 이에게로 가서, 우리가 카르포포레오(열매를 맺다, 수확을 내다)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너희도 죽임을 당하였다.
율법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 이유는,
너희가 다른 남자, 즉 죽은 자들 중에서 살림을 받으신 이에게로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
*너희에서 “우리”로 주어가 바뀐다.
*율법은 우리에 대하여 죽었고, 우리도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혼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바울은, ‘나의 형제들아’라고 하는 불특정 대상을 향한 호격 단어를 사용한다. ‘나의 형제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방 그리스도인인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인가? 둘 다를 의미하는가? 모호한 성격의 호칭을 통하여 바울은 이방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역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음을 설파하는 것이다. 너희도, 또 너희도 결박에서 풀렸다. 자유롭게 되었다. 두 종류의 집단 모두다 자유를 얻었다. 왜 그런가?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너희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우리가 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의 ‘열매’는 무엇인가? 로마서에서 ‘열매’는 어떻게 사용 되었는가?
로마서 1:13 (NKRV)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여기서의 열매는 ‘선교의 열매’이다.
고린도전서 9:7 (NKRV)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여기서의 열매는 복음 전도를 위한 ‘사례비’를 의미한다.
열매는 “과일이나 농작물”, “만들어진 제품, 상품”, “이익, 이득”을 의미한다.
*로마서, 7장이 꼭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로마서 7장이 로마서 전체에 필요한가?
5 우리가 사륵스(몸) 안에 있을 때는, 하마르티아(죄 / 복수)들의 파세마(욕망, 정욕, 고통)이, 노모스(율법)으로 인한, 엔에르게오(활동하다, 역사하다, 생산하다 / 미완료)하여서, 우리의 멜로스(지체, 부분, 구성원) 안에, 열매를 맺었다, 죽음을 위하여.
*우리가 몸 안에 있을 때
율법으로 인한 죄의 욕망이 계속해서 우리 지체들 안에서 활동하고 역사하였다.
죽음을 위하여 열매가 맺히도록
*율법의 자극을 받아서, 죄의 욕망이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었다. 그 죄들은 죽음을 위하여 이익을 내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이익을 내는가?”
누가 우리의 충성의 대상인가?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열매(이익)을 내고 있는가?
6 그러나 이제, 우리는 카타르게오(무효로 하다, 폐하다, 없애다 / 수동태)되어졌다, 노모스(율법)으로부터, 죽었기 때문에, 우리를 카테코(억누르다 / 미완 수동태)되어졌던, 그러므로 우리는 복종한다, 프뉴마(영)의 카이노테스(새로움, 새로운 것들)로, 그리고 그람마(글, 조문, 율법, 성경)의 팔라이오테스(오래됨, 낡음)로 섬기지 않는다.
*그러나 : 반전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억누르고 있던 것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으로부터 폐지가 되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섬긴다.
영의 새로움으로
글의 오래됨으로가 아니라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 이제는 그 어떤 법으로부터도 자유함을 얻은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안에 가득찬 사랑이다.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시켰다.
7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미래), 그 율법이 하마르티아(죄)인가? 그렇지 않다. 도리어 그 하마르티아(죄)를 내가 기노스코(알다, 깨닫다)하지 못하였다, 만약 노모스(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과연 에피쉬미아(욕심, 정욕, 탐심, 갈망)을 오이다(알다, 깨닫다)하지 못했다, 만약 그 노모스(율법)이 말하지 않았다면, ‘너는 에피쉬메오(열망하다, 음욕을 품다, 탐하다 / 미래)하지 말라’
*율법은 말한다.
‘너는 탐내지 말라’
이 율법을 통해서 나는 탐심을 알게 되었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되었다. 율법이 없었다면 죄를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다.
8 그러나 그 하마르티아(죄)가 아포르메(기회, 구실, 핑계)를 취하였다. 그 엔톨레(계명)을 통하여, 그가 카테르가조마이(성취하다, 행하다, 만들다)하였다, 우리 안에, 모든 에피쉬미아(욕심, 탐심)을. 왜냐하면 율법 없이 하마르티아(죄)는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죄가 기회를 얻었다.
그 계명을 통하여,
죄가 우리 안에 모든 탐심을 성취하였다.
왜냐하면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죄의 효력이 없다기보다는, 죄가 죄로서 인식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연구
율법은 우리가 꼭 알아야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만 효력이 있다.
사람이 일단 죽으면 법은 아무 힘이 없게 된다.
결혼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결혼관계 역시 오직 죽음으로 끊어진다.
부부 중 한 쪽이 죽으면 나머지 한 사람은 이전의 관계에서 해방된다.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의 법의 요구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요점은 율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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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유대인들의 결혼 제도를 예로 들면서, 예수님과 연합된 신자는 율법에 대하여 자유한 자라고 설명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역사했다
율법이 죄의 욕망을 더 충동질했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하지 말라’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하라’고 하면 더 하지 않는 고집을 부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영의 새로운 것 : 성령의 새로운 방식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활
율법 조문의 묵은 것 : 율법의 이전 방식
이제는 율법에 기록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새겨진 성령의 법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구원 받은 신자는 유대인들과 같이 율법의 외면적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따라서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참된 내면적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에 새겨놓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사탄은 계명을 죄를 짓는 기회로 이용하여, 하와에게 접근해서 범죄하도록 유혹하였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까지도 이용해서 인간을 죽음의 자리로 이끌고 간다.
율법의 기능 :
죄를 정의해줌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드러내줌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에게 올때, 그것이 우리 마음의 죄를 부각시키고 부추겨서 죄가 무엇인지 뿐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지 보여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규정한 모든 법은 우리의 절대 주권을 침해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원하는 대로 살면서 최고가 되려는 우리의 욕망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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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스 : 명사 노모스는 신약에서 190회 중에, 절반 이상이 로마서(74회), 갈라디아서(32회)에서 발견된다.
이 용어는 ‘규칙, 원칙’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구속력있는 규칙’이라는 좁은 의미까지 사용된다.
바울은 율법을 ‘의인화’하기도 했다. (롬 3:19)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는다. 즉, 그들은 시내산 언약에서 해방되었고 더 이상 그 정죄 아래 있지 않다.
율법은 바울에게 있어서 분명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 이 율법이 그 보낼의 기능인 생명을 주는 것에서 변질되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가?
“죄가 기회를 탄다”
로마서, 6-7장은 바울이 논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제기될 수 있는 3개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
6:1-14
둘째,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리니 죄를 지으리요? (6:15)
6:15-7:6
셋째, “율법이 죄냐?” (7:7)
7:7-25
율법이 비록 거룩하고 선한 것이지만,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죄의 권세를 바울은 이 단락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7:1-3은 “결혼 관계”를 예로 들어서, 율법의 본질인 “구속력”에 관해서 설명한다.
7:4-6은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7:7-9에서 바울은 율법과 죄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는 기능이 있다.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 가운데 율법을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율법 자체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연약한 육체 때문이다.
바울에 따르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인 존재”가 되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벗어날 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로마서는 미지의 교회에 바울 자신의 복음을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기술된 것이다.
구약에서 율법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해야 하는, 계시된 하나님의 총체적인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신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생명고 복의 근원이 된다.
이 율법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현실(샬롬) 안에 거하게 된다. (신 6:1-2)
중간기 시대,
바리새인들은 성전봉사를 하는 레위인들에게 소용이 되고 필요한 율법을 “모든 백성”에게 확대하여 적용시키고자 했다.
바울에 따르면,
율법은 성격상, 행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롬 2:13, 10:5). 따라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된다. (롬 2:12).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과 영예였다.
랍비 문헌 어디서도 계명을 완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부분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바울도 이러한 입장에 동의하고 있었을 것이다.
롬, 2:13의 바울의 설명은 “인간은 율법을 행할 수 있다”는 당시 유대교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5)로 자신의 옛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바울은 과거에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지킬 수 있었고, 또한 그럼으로써 구원된다고 하는 데에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예수님이 가지고 있었던 기존 유대교에 비판적인 태도를 수용하게 계승하게 된다.
안식일에 관한 비판
성전에 대한 멸망 예언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약속의 땅에 대해 회의적)
당시 유대교를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신학적인 개념(율법, 성전, 약속의 땅)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셨다.
더 좋은 ‘해결책’(그리스도)으로 인해 기존의 ‘해결책’(율법)은 지양되고 있다.
로마서 7:1-6은 ‘율법은 사람이 살아있을 동안에만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논제로 시작한다. 이 논제는 6:7의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는 진술과 맥을 같이한다.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부부 관계가 살아있을 동안에만 유효하다는 것을 제시한다(7:2-3).
그리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자들은 율법에서 자유로워지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한다(7:4).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경험한 이후에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주어서 위의 논제를 강화한다(7:5-6).
헬라세계에서 ‘노모스’는 ‘올바른 것’을 의미한다.
규범, 규정, 관습, 관용법 또는 전통 등에 아주 폭넓게 적용된다.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의 종교법에 대해 보통 ‘노모스’를 사용한다.
그는 또한 오경이나 구약에 대해 ‘노모스’를 쓰기도 한다.
때로 그는 다른 민족들의 법이나 자연 질서에 대해 ‘노모스’를 사용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긍정하시지만, 동시에 율법의 중재 역할을 자신이 대신하심으로써 율법을 부정하신다.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해결책은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회심과 용서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예수에 대한 태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예수의 말씀 및 인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으며, 예수 자신은 율법에 대하여 자유로우시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 맞다.
예수님은 율법의 중재 역할에 대해서는 부정하시지만, 예수님은 그의 용서가 의미하는 죄에 대한 심판을 통하여 율법을 긍정하신다.
회심은 죄인들이 율법에 순종하도록 회복시켜 준다. 이런 의미에서 회심은 율법의 긍정이다.
올바른 뜻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순종의 행위를 필요로 한다.
율법은 죄를 억제할 수 있지만, 예수께서 사랑의 순종을 확증하심으로써 죄를 제거하신 것처럼은 하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은 제한된다.
율법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선교 사역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세계에서 그들과의 친교를 납득케 할 만한 사항들을 지키기만 한다면 이 친교는 용납된다.
구약 ‘토라’ 220개 중에, 200개를 칠십인역은 ‘노모스’로 번역하였다.
칠십인역의 영향으로 인해 ‘노모스’는 ‘법’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신약에서는 ‘노모스’가 2배 더 자주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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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그의 유대교 생활과 활동은 하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행 9:4).
바울은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던 하나님과 동일하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미음’으로말미암아 얻어진다.
율법 vs 율법주의
죄가 토라보다 먼저 있었는데, 토라가 있기 전에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죄는 능동적 행위자로서 토라를 조종하여 죄를 부추긴다.
바울에게 ‘육신’은 옛 창조의 시대이며, ‘성령’은 새 창조의 시대이다.
그러나 완전히 상반된 두 극단 안에서만 작동되지 않는다. 성령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도 여전히 육신에 굴복할 때가 있다. 바울의 삶의 신학은 “중첩되는 시대의 신학”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여전히 이 세상 안에 있고, 종말을 갈망하나 지금 여기서 살아간다.
율법의 기능 :
신학적 용법 : 정죄의 기능 -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함
정치적 용법 : 죄를 억제하는 기능 -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죄를 억제하는 기능
성도들을 위한 용법 :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 작용하는 용법 - 가르치는 사역, 권고하는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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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당신은 모르십니까?
2절
이 구절에 기록된 법은 로마법보다는 유대법에 더 가깝다.
4절
4절은 전환적이다.
‘그러므로’, ‘같은 방식으로’
주어가 ‘너희’에서 ‘우리’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너희’는 “이중적 대상”을 지칭할 수 있다. :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지칭할 수도 있고,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게 누구가 되었든지, 바울은 너희는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받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바울은 ‘우리’라는 주어를 통하여, “이중적 대상”을 하나로 묶는다. 하나로 묶으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기 위해 율법에 대하여 자유함을 얻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은 ‘너희’와 ‘우리’의 사용을 통하여, 둘로 나뉜 공동체의 성향을 하나로 묶으려 하고 있다.
바울은 신자를 ‘결혼한 여자’로 비유하였다.
5절
5절은 ‘옛 시대의 삶’을 이야기한다.
천국의 현재성.
죄의 욕망 : 죄로 인도하는 욕망
6절
6절은 ‘새 시대의 삶’을 이야기한다. 천국은 이미 시작 되었다. 우리는 지금 현재 새 시대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옛 시대가 완전히 저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육신의 삶도 남아 있다.
‘이제는’
이제는 우리가 변화되었다.
8절
기회를 찾았다는 것은, ‘방법을 찾았다’로 이해될 수 있다.
죄는 내가 ‘온갖 것들을 원하도록 인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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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게 있어 “죄”란 무엇인가?
바울은 “죄의 기원”을, “아담”에게서 찾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인간의 죄를 아담에게 소급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성”,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아무리 율법을 다 지켜서, 하나님께 대한 반역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육신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결국 죄의 기원이란, 피조된 인간이 “인간임을 거부”하여 그 이상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 이하로 되려고 하는 것도 기원적 죄이다.
인간은 동물성을 추구하고, 다스려야 할 대상에 지배당하며, 피조세계를 섬기는 존재가 되었다.
“하늘”을 추구하고, “땅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땅”을 추구하고, “하늘”을 다스리려고 한다.
그러므로, 겉으로 완벽하게 “율법을 준수”하고 있었던 부자청년 역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하여,
“하늘”을 반역하고, “땅” 추구하려는 본심이 노출되고, 근심하며 예수를 떠나간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고, “땅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성령이 임하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이 아직도 “땅의 사람” “육신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묵상
율법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선하고 신령한 것이다.
아내가 아무리 남편을 만족시키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을 만족시킬 수도 없고, 남편으로부터 해방될 수도 없는 모순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지만, 성령이 내주하시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성령의 내주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을 받아들임으로 성령께서 내주시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내주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능력이 된다.
성령이 있는 사람이 율법을 행하고, 성령이 없는 육신의 사람도 율법을 행하는데, 그 결과는 전자는 영생이요, 후자는 사망이라는 점에서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바울의 율법에 대한 부정적 / 긍정적 관점
부정적 관점 :
긍정적 관점 :
‘하지 말라’는 명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 안에 ‘인간적 자율성’이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검출’된다.
이것이 ‘율법’이 가진 기능이다.
자동차의 연료 게이지는, 차 안에 기름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료 게이지 자체를 손으로 위로 올린다고 기름이 가득 차는 것은 아닙니다.
기름을 채우기 위해서는 기름을 채워주는 사람을 찾아가야 됩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은 우리 안에 죄가 가득함을 깨닫게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키면, 우리 마음이 생명력으로 가득채워지지는 않습니다. 율법을 다 지켜도 우리 마음은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다만 율법은 우리의 내면이 얼마나 하나님과 멀어져 있으며, 하나님 뜻에 반하는 마음으로 가득한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 우리 마음의 연료를 채워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갈 때, 그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의 기름으로 가득채워진 자동차는, 차고에 무슨 일도 하지 않고 멈춰서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득채워진 기름을 가지고, 그 목적대로 움직이고 일하는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 마음이 죽음으로 가득차 있고, 생명력이 완전히 비워져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비워진 마음을 새생명으로 가득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생명으로 가득채워진 인생은, 차고에 채워둔 차처럼 가만히 있지 않고, 그 생명력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죠.
그래서 율법은 복음으로, 복음은 다시 율법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책을 보면, 그 기준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기준대로 못 삽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있는데, 그렇게 살 능력이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마음에 사랑이 가득해지면 달라집니다.
마음에 가득한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행하게 됩니다. 이 행함은 없던 사랑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마음에 가득한 사랑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 뿐이죠.
이처럼, 복음은 우리 안에서 율법을 행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법률’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사랑’이 적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형벌의 두려움이 없이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다 지킨다고해서, 그 사람이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면, 자연스럽게 ‘법’을 이루는 사람이 된다.
적용